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에서 “한국 사회의 변화 방향에 대한 청사진을 기본소득 의제를 중심으로” 마련하는 것을 목표로 “기본소득 쟁점토론회”를 진행합니다. 이 쟁점토론회는 기본소득을 둘러싼 여러 이슈와 기본소득 실현을 위한 로드맵을 검토하는 자리이며, 2020년 2월부터 2021년 7월까지 진행될 예정입니다.
아래의 글은 2021년 1월 9일 <쟁점토론 12. 경기조절형 기본소득, 화폐론>을 위한 발표문(초고)입니다. (참고. 아래 글은 원문의 표와 그림, 참고문헌을 포함하고 있지 않습니다. 표와 그림을 포함한 전체 발표문은 PDF 파일에서 볼 수 있습니다.)

쟁점 토론 12. “경기조절형 기본소득, 화폐론” 발제문(초고)

화폐 발행 체제 개혁을 통한 기본소득 재원 조달
(주권화폐과 기본소득)

발제자: 유승경

제1절.  현대 화폐 발행 체제의 작동 원리와 특성

I. 현대 경제의 화폐 종류와 규모

화폐는 네 가지의 기능을 수행한다: 계산 단위, 교환 수단, 지불 수단, 가치 저장 수단. 계산 단위로서의 화폐는 가치 측정 기능을 수행하는 개념적 화폐이다. 한편 가치 저장 수단은 화폐 외에도 귀금속, 부채 등 다른 대체물이 있다. 화폐가 실물적 형태로서 수행하는 고유한 역할은 교환 및 지불 수단이다. 여기서 지불이라는 것은 부채의 변제, 세금 납부와 같은 금전적 의무를 수행하는 기능을 말한다. 이 절에서 다루는 화폐는 교환 및 지불 수단으로 사용되는 화폐이다.

현대 경제에서 교환 및 지불 수단으로 사용되는 유통 화폐의 기본 형태는 두 가지로현금과 요구불 예금이다. 현금은 법정화폐인 중앙은행권(지폐)와 주화를 말하며 요구불 예금은 은행에 대한 청구권의 의미를 갖는 은행화폐(bank-money)이다. 우리는 요구불 예금을 계좌 이체, 현금 카드, 수표 등을 활용하여 거래에 사용한다. 일반 경제주체는 경제 활동에 현금을 사용하거나 은행을 매개로 하여 은행화폐를 사용한다. 그 외에 또 하나의 화폐 흐름이 있다. 은행 상호 간이나 중앙은행과 상업은행 간의 거래에 사용되는 지불준비금의 흐름이 있다. 그리고, 중앙은행은 경제 내에 통화량을 측정하기 위해서 몇 개의 상이한 측정 지표를 사용한다.

현 체제에서 가장 우선적인 범주는 본원통화이다. 본원통화는 중앙은행이 공급하는 화폐를 말하며 은행의 지불준비금과 은행이 아닌 경제주체가 보유하고 있는 현금으로 구성된다. 보통 M0라고 표시한다. 그 다음으로 M1으로 불리는 통화량이 있다. M1은 은행이 아닌 경제주체가 보관하고 있는 현금과 요구불 예금을 합친 것이다. M1이 지불 수단으로 사용되는 일반적인 의미의 유통 화폐로서 협의의 통화라고 한다. M2는 M1에 저축성 예금 등을 합친 것이다. 저축성예금은 직접 교환수단으로는 사용되지는 않기 때문에 화폐의 성격보다는 자산의 성격을 갖는다. 하지만 저축성 예금은 일정 시간과 절차를 거친 후에 유통에 사용될 수 있기 때문에 통화량 측정의 중요한 지표이다. 특히 최근 들어 특정한 이자가 붙는 정기 예금이지만 고객들이 즉시 지불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현재 M2로 기록되는 단기 자본 중에서 상당한 비중(적어도 30%)은 M1으로 분류되는 것이 더 적합하다. 통화량의 정의를 정리하면 표 1과 같다.

한국 경제에서 통화량의 구체적 수치는 표2와 같다. 2019년 기준으로 본원통화의 양은 178.9조 원이다. 이중 현금은 약 108.7조 원이며, 지불준비금은 약 70.3조원이다. 그리고 요구불예금 등이 약 768.2조 원이다. 따라서 M1은 약 876.9조 원이며 2019년 한국 GDP의 약 46%에 해당한다.

II. 교과서 경제학의 신용화폐 창조 과정

은행화폐인 요구불 예금은 상업은행의 신용(화폐) 창조 과정을 통해서 경제에 공급된다. 경제학 교과서는 은행화폐의 창조 과정을 대부자금이론(Loanable Funds Theory)과 화폐승수이론(Money Multiplier Theory)를 통해서 설명한다. 대부자금이론은 “투자의 자금은 저축을 통해서 조달된다”는 함의를 갖는다. 그리고 화폐승수이론은 저축을 통해서 은행에 예치된 “애초 예금의 일정한 배수로 은행화폐”가 창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두 이론에 따르면, 예금이 상업은행으로 들어오면 상업은행은 법정 지급준비율에 따라서 일정량을 지급준비금을 남기고 나머지를 대출한다. 이렇게 대출된 돈은 다시 은행에 예치되어 은행화폐가 된다. 그리고 상업은행은 다시 예치된 예금을 또 법정 지급준비율만큼 남기고 나머지를 대출한다. 그 대출은 새로운 예금을 낳아 다시 은행화폐를 창조한다. 이 과정이 연속되어서 은행화폐는 법정 지급준비율에 의해서 결정된 화폐승수를 애초의 예금에 곱한 것만큼 창조된다.

대부자금이론과 화폐승수이론이 의미하는 대로 현실이 작동한다면, 중앙은행은 세 가지 방식을 통해서 경제에 유통되는 화폐의 양인 통화량을 재량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 첫째, 중앙은행은 상업은행과 채권(주로 국채)을 거래하는 공개시장정책을 통해서 지급준비금을 조정하여 본원통화의 양을 조절할 수 있다. 즉 중앙은행이 은행으로부터 채권을 매입하면 은행이 보유한 지급준비금이 늘어나고 매각하면 지급준비금이 줄어든다. 그리고 상업은행은 본원통화량의 변화에 맞추어 대출을 조절하게 됨으로 은행화폐의 양은 변한다. 둘째, 중앙은행은 법정 지급준비율을 조절하여 통화량을 조절할 수 있다. 중앙은행이 법정 지급준비율을 낮추면 대출 여력이 늘어나서 은행화폐의 양이 늘어나고, 그 반대의 경우에는 은행화폐의 양이 줄어든다. 그리고 중앙은행은 공개시장정책으로 은행의 지불준비금을 적정 수준으로 조정하지 못했을 때, 할인창구를 통해서 은행에 지불준비금을 대출해줄 수 있다.

교과서 경제학의 설명에 따르면 상업은행은 은행화폐의 창조 과정에서 단순한 지극히 수동적인 역할만을 하고, 중앙은행은 본원통화와 법정 지급준비율을 통해서 통화량을 재량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 교과서 경제학은 위와 같은 전제에 따라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을 설명한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 화폐의 창조 과정은 교과서와는 아주 다르다.

영국의 금융경제학자인 찰스 굿하르트(Charles Goodhart)는 1984년에 교과서에서 사용하는 화폐승수이론이 “통화량의 결정 과정에 대한 기술은 불완전해서 결국 잘못된 이해를 낳는다”고 주장했다.. 최근에 와서는 잉글랜드은행(Bank of England)의 계간 보고서도 화폐승수이론은 “현실에 대한 부정확한 기술이자 오해”라는 점을 확인해주었다.

III. 현실 경제의 화폐 창조 과정

1.   화폐승수이론의 오류

대부분의 교과서에서 설명하는 것과 달리, 상업은행은 현실적으로 은행화폐의 창조 과정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 교과서는 예금이 대출을 낳는다고 한다고 설명하지만 실제로는 대출이 예금을 일으키고 화폐를 창조한다. 그 반대가 아니다. 또한 상업은행은 지급준비금을 중앙은행이나 다른 은행으로부터 빌릴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은행은 단순히 저축된 예금을 대출로 연결하는 금융 중개기관에 머물지 않는다.

우선 상업은행은 은행화폐의 창조할 때 금리, 경제 조건, 다른 투자 대상 등을 고려하여 특정 고객에게 대출할지의 여부를 결정한다. 그리고 은행이 고객에게 신용을 주기로 결정하면 현금의 형태로 대출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고객의 예금계좌에 금액을 기록한다. 그 금액은 곧 수표, 계좌이체, 현금카드 등을 통해 지불 행위에 이용된다. 이처럼 신용 창조와 함께 예금과 화폐가 창조된다. 현실에서 은행가들이 지불준비금의 상태를 확인하고 대출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은행도 이윤을 추구하는 영리 기업이기 때문에 이윤 전망이 높으면 먼저 대출을 하고 이후 지급준비금을 맞춘다. 중앙은행은 상업은행의 최종 대부자이기 때문에 이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

많은 은행가들과 경제학자들은 이 현상을 오랫동안 지적해왔기 때문에 그 사례들은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대표적으로 미국의 경제학자 제임스 토빈(James Tobin: 1918~2002)은 1963년에 은행화폐를 “은행장의 펜에 의해서 창조되는 만년필 화폐”라고 불렀다. 그는 은행장이 대출을 승인하고 차입자의 요구불예금 계좌에 입력하면 화폐가 창조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 과정에서 화폐는 창조되지만 은행의 대차대조표나 본원통화는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상업은행이 대출할 때 반드시 새로운 저축이 필요하지는 않다. 미국 중앙은행의 선임 부총재였던 알랜 홀름즈(Alan Holmes)는 1969년에 “현실 세계에서 은행은 신용을 확대하여 이 과정에서 예금을 창조하고 이후에 지준금을 찾는다”고 증언했다.

이처럼 현실 세계에서는 중앙은행이 통화량을 교과서에서 말하는 전통적인 통화정책을 통해서 통화량을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 시중은행, 즉 상업은행의 영리적 판단에 따라 통화량이 변하고 중앙은행은 오히려 그것에 순응하는 경향을 보인다.

제2절.  현대 화폐 발행 체제의 문제점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현대의 화폐 발행 체제에서는 중앙은행이 국채를 비롯한 자산을 매입하는 방식으로 법정화폐인 본원통화를 발행하고, 상업은행이 본원통화를 기초로 삼아 경제주체에게 대출을 하는 방식으로 은행화폐를 창조한다. 그리고 상업은행이 창조하는 은행화폐가 경제 내에서 유통되는 화폐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런데 이러한 체제는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I. 경기 변동의 증폭

3.3에서 확인했듯이, 현대 경제에서는 통화량이 중앙은행의 정책적 통제가 아니라 영리적 판단에 따라 대출을 결정하는 상업은행과 대출을 받는 가계 및 기업의 의지에 크게 의존한다.

경기가 좋으면 상업은행은 이윤을 쫓아서 대출을 늘려 화폐의 공급을 늘리려 하고 가계나 기업도 대출 수요를 늘린다. 따라서 낙관적 경제 분위기는 쉽게 경기 과열과 자산 거품을 낳아서 금융위기를 불러온다.

이에 대한 설명은 하이먼 민스키가 적절하게 설명했다. 민스키에 따르면 민간 부문(투자자, 은행, 기업)의 걷잡을 수 없는 투기와 부채 누적이 경제를 피할 수 없는 위기로 몰아넣는 메커니즘이다. 민스키는 경제가 장기간 번영하면 경제 행위자들은 투기적인 도취에 빠져 더 큰 위험을 감수한다고 말한다. 대출 기관은 먼저 헤지(hedge) 대출에서, 즉 원금과 이자를 현금 흐름으로부터 상환할 수 있는 대출에서 출발한다. 그 다음에는 현금 흐름으로는 원금이 아니라 이자만 갚을 수 있는 투기적 대출로 이동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현금 흐름으로는 이자와 원금을 감당할 수 없어서 부채를 갚기 위해서는 자산이나 기업체를 팔아야 하는 폰지 대출로 이동한다. 그리고 경제의 한 부문에서 대출의 경향이 폰지 범주에 가까워지면 위기의 가능성이 커진다.

리처드 베이그는 민스키의 견해에 하나의 주석을 첨가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은행가들은 행복감에 빠져서 차입자의 미래 현금 흐름을 너무 낙관적으로 예측하고 있는 경우나 대출을 실행한 후 경쟁 여건이 불리하게 변하는 경우에도 스스로 진심으로 헤지(hedge)론을 하고 있다고 스스로 믿을 수도 있다.”

현대의 화폐 발행 체제가 이 같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1930년대의 대공황과 2008년에 발생한 대불황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림 1을 보면, 대공황 이전인 1920년대에 미국의 민간 부채가 급격한 증가가 있었다. 1920년부터 1929년까지 민간 부채는 52.7%나 증가했다.

이러한 양상은 2008년에도 아주 흡사하게 나타났다. 선진권 경제의 민간 부채는 1990년대 중반에는 GDP의 90% 수준이었는데, 2007년에는 거의 두 배로 늘어나 170%에 이르렀다.

민간 부채의 이 같은 누적은 대체로 상업은행의 무분별한 대출에 의한 자금이 이 금융 및 자산 시장으로 몰렸기 때문이다. 은행 대출을 새로운 화폐를 창조하며, 경제의 지출 능력을 증가시킨다. 증가된 화폐는 상품과 서비스에 대한 총수요를 증가시키지만 이것이 과다할 때 경제 전반의 생산 과잉을 낳는다.

이와 반대로 경기가 위축될 때에는 상업은행은 대출을 지나치게 주저한다. 그래서 경기 후퇴를 막기 위해서 화폐의 추가적인 공급이 더욱 필요한 시기에 오히려 화폐 공급이 줄어든다. 이로 인해 경기가 위축되고 가격이 전반적으로 하락하는 디플레이션이 발생하는 심각한 공황에 빠져든다. 이 경향은 대공황이 진행되는 동안 전형적으로 나타났다.

1920년에 미국의 통화량이 민간 부채의 증가와 함께 크게 늘어났다가 1929년을 기점으로 급격히 수축되었다. 미국의 통화량(M1)은 1929년부터 1933년까지 약 1/3이 줄어들었다.

자본주의가 은행을 중심으로 하는 자체적인 금융체제를 수립한 이후 200년 동안 금융위기를 주기적으로 겪었다. 그 원인은 공통적으로 과다한 대출에 의한 민간 부채의 과잉에 있었다. 이처럼 상업은행이 영리적 판단에 따라 대출의 형식으로 통화를 공급하는 현 체제는 경기 변동이 화폐적 요인 때문에 증폭된다.

II.  안정적 통화 공급의 지속 불가능성

화폐의 과잉 공급이 금융위기를 불러오지만 경제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새로운 화폐가 공급되어야 한다. 이 견해는 경제학 내에서 주목받지는 못했지만 존재해 왔다.

대표적인 이론 중의 하나는 1930년대에 더글라스가 제시한 A+B 이론이다. 경제학의 고전적 이론인 세의 법칙에 따르면 공급이 스스로 수요를 창출한다. 공급의 과정에서 발생된 소득이 그 상품의 수요를 보증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케인스는 화폐 소득이 경제 외부로 퇴장할 수 있기 때문에 수요가 부족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세의 법칙을 비판했다.

이에 반해 더글라스는 공급의 과정에서 생성된 소득은 생산된 상품의 가격에 미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하나의 상품의 생산 과정에서 임금과 이윤이라는 두 가지의 소득이 창출되지만, 소득으로는 생산된 상품을 모두 소화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상품의 가격에는 임금과 이윤 외에 원자재 비용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더글라스는 현재 부족한 소득은 은행 부채에 의해서 조달되고 있는데 부채에 의한 수요 충족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국가가 화폐를 발행해서 시민에게 배당하는 사회 신용을 주장했다.

이와 다른 맥락에서 1960년대부터 연구되어온 ‘화폐적 성장이론’은 기술 진보율 이상의 ‘화폐 증가율’을 유지하지 못하면 경제는 장기적으로 디플레이션에 빠진다고 주장했다. 최근 리처드 베이그는 성장이 필연적으로 새로운 화폐를 필요로 한다는 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경제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이전 시점보다] 더 많은 지출을 해야 한다. 그러나 경제 내의 통화량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특정 지출을 늘리려면 다른 지출을 줄여야 한다. 따라서 다른 지출을 줄이지 않으면서 더 많이 지출하려면 이전 시점보다 더 많은 화폐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화폐는 창조되어야 한다»

경제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화폐가 필요하다는 것을 논증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그 사실은 역사적 경험에 의해서 잘 입증된다. 옆의 그래프는 1959년 1월 1일부터 2020년 7월 1일까지 미국 통화량(M1)의 추이이다. 미국의 통화량은 1959년 1월 1일에 약 1,389억 달러였는데 2020년 7월 1일에는 약 5조 3,291억 달러에 이르러 61년 간 약 38배가 늘어났다. 이 같은 장기간에 걸친 통화량의 증가를 만성적인 화폐 남발로 인해 발생한 부정적 현상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이런 설명을 보태지 않더라도 생산이 늘어나는데 화폐가 그에 부응하여 늘어나지 않는다면 경제는 유동성 부족이나 디플레이션에 직면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은행화폐가 유통 화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현재의 체제에서는 새로운 화폐의 창조는 민간 부채의 증가를 동반하지 않을 수 없다. 상업은행이 화폐를 창조한다는 것은 곧 부채가 늘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현 체제에서 화폐 창조는 신용 창조와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폐 공급을 확대하여 성장을 이끌려면 민간 부채의 누적이 불가피하다.

자본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30년 간 높은 성장을 기록했는데, 그러한 성장이 가능했던 것은 그 이전 시기에 «잔인한 방식으로» 민간 부채가 크게 낮아졌기 때문이다. 민간부채는 공황과 전쟁을 거치면서 1945년에 20세기 최저 수준인 37%»까지 줄어들었다. 결국 자본주의의 황금의 30년은 그 이전시기에 대폭적으로 낮아진 민간 부채가 증가하면서 통화량을 지속적으로 늘려서 유효수요를 창출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민간 부채가 일정 수준에 다다르면 통화 공급이 안정적으로 이뤄질 수 없다. 왜냐하면 민간 부채가 위험 수준을 넘지 않도록 억제하면 성장이 정체하고, 성장을 허용하면 민간 부채가 과잉이 되어 금융위기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제가 필요로 하는 화폐를 은행화폐로써 조달하는 방식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III. 시뇨러지의 유출과 공공적 활용의 제약

시뇨러지는 전통적으로 화폐가 갖는 구매력과 화폐 제조 비용의 차이이다. 역사적으로 화폐 발행을 독점해온 주권자는 화폐를 지출을 통해서 경제에 투입하면서 시뇨러지를 취했다.

현대의 화폐 발행 체제에서는 상업은행이 대부분의 유통 화폐를 창조하기 때문에 국가는 그만큼 시뇨러지를 확보할 기회를 갖지 못하며, 중앙은행이 본원통화의 발행할 때 발생되는 시뇨러지도 온전히 국가의 재정으로 귀속되지 않는다. 그 대신에 상업은행이 시뇨러지를 변형된 형태로 흡수하여 특별 이윤을 누린다.

우선 상업은행이 어떤 방식으로 특별 이윤을 누리는지 알아보자. 상업은행은 은행화폐를 창조하여 지출하는 것이 아니라 투자자나 소비자에게 대출의 형식으로 공급한다. 즉 상업은행이 신용을 창조하면 대차대조표에 자산과 부채가 동시에 만들어지며 대출이 상환되면 자산과 부채가 동시에 사라진다. 따라서 상업은행이 전통적인 의미의 시뇨러지를 그대로 누리는 것은 아니다.

상업은행은 보통 대출 금리와 예금 금리의 차이인 예대마진을 통해서 이윤을 실현한다고 말한다. 이 논리는 비은행 금융기관에는 적용되지만 상업은행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3.3에서 확인한 것처럼 상업은행이 대출을 하는 데에는 반드시 고객의 저축에 의한 예금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업은행은 저축을 유인할 수 있는 경쟁적인 예금 금리를 지불하지 않고도 대출 금리를 통해서 특별 이윤을 올릴 수 있다.

예를 들어 상업은행이 비은행 금융기관처럼 다른 곳에서 자금을 빌려서 대출을 한다면 자금 확보에 따르는 비용을 치러야 한다. 예를 들어 회사채를 발행한다면 채권 금리를 부담해야 한다. 그러나 상업은행은 신용화폐를 창조할 수 있기 때문에 자금 조달에 따르는 비용을 그만큼 치르지 않고 최소한의 예금 금리만을 보장한다.

이를 달리 말하면 경제 주체들은 은행화폐를 사용하면서 예금 금리와 대출 금리의 차이만큼을 화폐 사용료로 상업은행에 지불하는 셈이다. 이는 일종의 화폐 조세(money taxes)라고 할 수 있는데, 상업은행의 특수한 이윤의 원천이 되고 있다. 이처럼 상업은행이 은행화폐의 대출을 통해서 거둬들이는 특별한 이윤은 상업은행이 주된 화폐 공급자의 지위에 힘입어 누리는 변형된 형태의 시뇨러지라고 할 수 있다.

영국의 신경제학재단(New Economics Foundation)과 코마하겐 비즈니스 스쿨은 최근 보고서에서 영국 등 4개국에서 상업은행이 누리는 특별한 이윤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추정했다. 은행이 누리는 특별한 이윤은 요구불예금의 총액에 시장의 자금 조달 금리와 요구불 예금 금리의 차이를 곱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위의 연구진들은 여기에 상업은행이 일상적 결제 업무, 유동성 관리 등을 위해서 지준금과 현금을 보유하는 데 따르는 비용 등을 포함시켜 추정치를 내 놓았다.

그들의 보고서에 따르면 영국에서 상업은행이 이런 방식으로 거둬들이는 특별 이윤은 1998년부터 2016년까지 연 평균 230억 파운드로서 GDP의 1.23%에 달한다. 다른 3개국도 은행의 연간 평균 특별 이윤은 GDP의 0.6~0.9%에 이른다.

이 수치들은 신용화폐와 민간부채가 늘어날 수록 은행의 특별 이윤이 높아지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은행의 특별 이윤은 소득 불균형을 심화시킨다. 또한 은행의 특별 이윤은 화폐가 이자 없이 발행되는 경우와 비교하면 경제 주체가 화폐를 사용하면서 부담하는 비용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현행 중앙은행이 본원통화를 발행할 때에도 시뇨러지가 발생한다. 그 시뇨러지는 중앙은행의 최대 출자자인 재무부로 귀속되어 정부의 재정 수익으로 활용된다. 하지만 현 체제에서는 그 규모는 매우 적다. 그 이유는 상업은행의 은행화폐가 큰 역할을 하고 있는 데다 본원통화의 발행 제도가 화폐를 상품이라는 전제하에서 구축된 금본위제 시대의 제도를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앙은행은 금본위제도 시기에 지폐(은행권)를 액면 가치에 상응하는 금을 토대로 발행하고 상환 요구가 있을 경우 은행권의 액면 가치에 해당되는 만큼의 금을 상환했다. 따라서 엄격히 100%의 금 준비금 제도가 운영된다면 중앙은행은 시뇨러지를 누릴 여지가 없다. 대공황 이후부터 대부분의 나라는 금본위제에서 벗어나서 금 준비고를 토대로 은행권을 발행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중앙은행은 금본위제도의 형식을 활용하여 주로 국채를 자산으로 삼아서 발행한다. 그리고 중앙은행도 상업은행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지출이 아니라 자산 매입을 통해서 본원통화를 공급하기 때문에 시뇨러지가 본원통화인 주화, 지폐, 지준금의 공식 가치와 제조 비용의 차이에 의해서 발생하지는 않는다. 그러면 정부는 본원통화의 발행으로 발생하는 시뇨러지를 어떤 방식으로 취하는가를 살펴보자.

중앙은행은 우선 상업은행으로부터 국채를 매입하면서 우선 지준금을 공급한다. 지준금은 전자 기록이기 때문에 그것의 생산에는 아주 적은 비용만 든다. 따라서 중앙은행이 지준금에 대해서 이자를 지불하지 않는다면 매입한 자산에 붙은 이자만큼의 시뇨러지를 얻을 수 있다. 이 수입은 중앙은행의 최대 출자자인 재무부로 귀속된다. 결국 정부는 국채 이자를 중앙은행에 지불한 다음 그것을 다시 거둬간다. 그런데 2008년 금융위기를 전후로 미국, 영국 등에서는 지준금에 이자를 지불하고 있기 때문에 그만큼 시뇨러지의 여지는 현재 줄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중앙은행이 현금을 발행하는 경우를 보자. 중앙은행은 상업은행이 고객의 지폐의 현금 수요를 예상하고 현금을 요구하면 현금을 발행하여 상업은행의 지준금과 교환한다. 현금은 중앙은행의 부채이지만 이자를 지불하지 않는다. 따라서 중앙은행이 지준금을 공급할 때 매입한 자산에 붙는 이자에 현금의 제작과 유지에 따르는 비용을 뺀 것이 시뇨러지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다른 한 가지 요소가 있다. 한국의 경우 한국은행이 주화를 발행하지만, 영국, 미국 등은 아직까지 재무부가 주화를 발행한다. 이 나라에서는 재무부가 주화를 제조하면 중앙은행이 매입하여 통화정책의 경로로 경제에 공급하거나 은행들이 직접 지준금을 주화와 교환한다. 그래서 정부가 동전을 직접 발행하는 나라에서는 정부가 동전의 액면가치와 제조 비용의 차이만큼의 시뇨러지를 취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화의 제조에 따르는 비용이 지폐에 비해서 많이 드는 반면 주화의 액면 가치가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시뇨러지는 미미한 수준이다.

이상의 검토에 비춰봤을 때 상업은행이 유통 화폐의 대부분을 발행하는 체제에서는 화폐 발행에 따른 국가 수익이 극히 적다. 이처럼 상업은행이 유통화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은행화폐를 발행하고 있기 때문에 국가는 시뇨러지를 공공적 목적을 위해 확보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기고 있다.

제3절.  화폐 체제의 개혁과 기본소득의 도입

I. 주권화폐론의 개혁의 관점

앞서 검토한 현행 화폐 발행 체제의 한계점들은 두 가지 요인에서 기인한다. (1) 첫째는 상업은행이 창조하는 은행화폐가 유통 화폐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점이이다. (2)둘째 요인은 신용화폐의 기초가 되는 본원통화가 중앙은행이 국채 매입을 통해서 공급된다는 점이다. 이 두 요인 때문에 화폐 공급의 증가는 정부 부채와 민간 부채의 증가를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예를 들어서 미국의 전후 민간 부채 및 정부 부채의 추이를 보자. 정부 부채는 1981년까지 감소하는 추세였지만 그 기간에 민간 부채가 빠르게 늘어나서 총부채는 지속적으로 늘어났다. 그 이후 1981년부터는 민간 및 정부 부채가 함께 늘어났다. 만약 이 같은 부채 증가가 없었다면 미국의 경제 성장은 실제보다 훨씬 낮았을 것이다.

따라서 주권화폐론은 (1) 상업은행의 부분지급준비제도를 폐지하여 은행화폐의 발행을 정지시키고 (2) 정부가 직접 발행하는 법정화폐로써 은행화폐가 담당해온 역할을 대체할 것을 제안한다.

상업은행의 신용화폐 창조가 갖는 문제를 해소하자는 안은 오래 전부터 제시되어 왔다. 대표적인 예가 대공황이 진행되던 1930년대에 시카고 대학의 교수들이 제안했던 시카고 플랜이다. 시카고 플랜은 상업은행의 신용 창조 기능을 정지시키기 위해서 완전지급준비제도를 제안한다.

그러나, 완전지준제도만으로는 현행 체제의 문제점을 해소할 수 없다. 왜냐하면 본원통화가 중앙은행의 국채 매입을 통해서 부채의 형식으로 발행되는 한, 봉원통화의 공급은 정부 부채의 증가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권화폐론은 정부(지위가 변경된 중앙은행일 수도 있다)가 본원통화를 직접 자산으로서 발행할 것으로 제안한다. 국가기관이 법정화폐인 본원통화를 자산으로서 발행한다면 새로 창조된 본원통화는 정부의 재정으로 이전되어 공공적 목적을 위한 재정 지출을 통해서 경제에 공급될 수 있다. 그리고 정부 재정 지출의 한 형식으로서 전 국민에게 기본소득을 제공하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은행화폐에 의해 야기되는 제반 경제, 사회, 환경적 문제를 해소하는 한편 정부는 법정화폐의 창조에 따른 시뇨러지를 기본소득의 지급과 같은 공공적 목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II. 주권화폐제도의 내용과 이행 방안

1. 이행의 절차

주권화폐론은 현재의 체제를 어렵지 않게 새로운 체제로 재편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주권화폐론은 현 체제의 개혁을 위해서, 현재 예금계좌에 전자화폐의 형태로 기록되어 있는 신용화폐 자체를 법정화폐(legal tender)로 선언하는 것에서 시작하자고 한다. 법정통화는 국가가 세금을 내거나 민간에서 부채를 청산할 때 그 수단으로 인정해주는 화폐를 말한다.

요구불예금 자체를 법정화폐라고 선언하면 기존의 은행화폐는 주권화폐로 전환되어 상업은행의 대차대조표에 더 이상 부채로 잡히지 않고, 개인이 가진 유일한 화폐 자산으로서 유통된다. 그리고 은행은 고객의 계좌를 관리만 해주며 그 거래는 중앙은행의 데이터베이스에 기록된다. 현행 체제는 지준금의 순환과 신용화폐의 순환이 분리되어 있다. 하지만 주권화폐론에 따른 체제는 지준금이 없는 법정화폐의 단일 순환 시스템이 된다.

그리고 새로운 제도에서는 화폐 창조와 신용(대출) 활동을 분리한다. 주권화폐론은 은행의 계좌를 (1)고객이 즉각 인출금을 할 수 있는 거래계정(Transaction accounts)과 (2) 고객이 수익을 얻기 위해서 투자 용도로 사용하는 투자계정(Investment accounts)으로 분리할 것을 제안한다.

거래계정은 현행의 요구불예금계좌(당좌예금 계좌)를 대체한다. 고객들은 수표, ATM, 현금카드, 계좌이체를 통해서 자유롭게 입출금을 할 수 있다. 이 계정은 완전히 안전한 예금의 기능을 수행한다. 은행들은 내부 데이터베이스에 있는 각 개인의 계정을 관리하지만, 이 돈은 중앙은행의 고객기금계정에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 자체가 돈이기 때문에 특별한 별도의 지준금은 필요하지 않다. 따라서 고객의 예금은 더 이상 민간은행의 부채가 아니며, 고객의 법적 사유재산이다. 따라서 예금은 개별 상업은행의 건전성이나 유동성과 관계없이 가치를 유지한다. 만약 은행이 파산하면, 거래계정은 단순히 다른 은행으로 이동한다. 따라서 거래계정은 위험이 없고 예금보험이 필요 없다, 하지만 예금에 대한 이자는 붙지 않으며, 은행은 이 서비스에 대해서 비용을 물릴 수 있다.

투자계정은 현행 저축성예금계좌를 대체한다. 고객들은 거래계정에서 투자계정으로 돈을 옮길 수 있다. 투자계정은 금리, 만기, 용도 및 목적에 따라 다를 수 있다. 투자계정은 국가 보증이나 예금보험의 보호를 받지 못하며, 위험은 은행과 투자자가 분담한다. 투자계정에 할당된 돈은 즉시 그 은행의 통합투자계정으로 들어간다. 통합투자계정의 돈은 거래계정과 마찬가지로 중앙은행에 기록된다. 투자계정은 어떤 돈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것은 단지 은행이 고객에 대해서 지고 있는 부채일 뿐이다. 그리고 이것이 대체 화폐로 발전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투자계정의 소유권은 바뀔 수 없다.

주권화폐제도로의 이행 과정에서 상업은행의 요구불예금은 모두 거래계정으로 전환된다. 기존의 요구불예금은 상업은행의 부채이고 대출은 상업은행의 자산이다. 그런데, 이것이 모두 고객의 주권화폐로 바뀌면 상업은행은 자산(대출)은 그대로 가진 채 엄청난 양의 부채를 덜게 된다. 왜냐하면 상업은행이 더 이상 요구불예금을 뒷받침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행과정에서 정부가 요구불예금에 해당하는 것만큼의 이자 없는 전환부채(Conversion Liability)를 상업은행에 부과할 필요가 있다. 전환부채는 중앙은행의 자산이며 만기는 은행이 가지고 있는 대출의 만기에 맞춰서 설정할 수 있다. 은행은 장기 간에 걸쳐서 대출이 회수되는 대로 이 전환부채를 상환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은행과 민간이 가지고 있던 국채는 국가발행화폐에 의해 상환되면서 정부는 부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2. 주권화폐의 회계

주권화폐론은 주권화폐를 도입하더라도 중앙은행의 회계 관행을 변경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한국을 비롯한 각국의 중앙은행은 약간의 예외는 있지만 은행권, 주화, 지준금을 부채(liabilities)로 간주한다. 이와 같은 방식을 중앙은행이 주권화폐를 창조할 때에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

주권화폐론은 국가 화폐는 사실상 부채가 아니라고 본다. 이 관점에서 보면 은행권과 주화를 중앙은행의 부채로 간주하는 현재의 회계 관행은 내용과 형식이 일치하지 않는다. 그래서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화폐를 부채가 아닌 자산으로 간주하는 것이 이제까지 논의한 주권화폐론의 내용에 더 부합하는 것일 수 있다. 그렇지만 화폐에 관한 회계 관행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주권화폐를 도입할 수도 있다.

그것은 중앙은행이 주권화폐를 창조하여 정부의 거래계정에 입금하는 방식이다. 그때 정부는 이 거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하여 중앙은행이 창조한 화폐의 양만큼 무이자 영구채를 발행하여 중앙은행으로 이전하는 것이다. 정부가 무이자 영구채를 발행했기 때문에 정부 부채는 늘어나지 않고, 중앙은행은 정부의 무이자 영구채를 자산을 보유할 수 있다. 이 방법을 활용하면, 주권국가가 발행한 화폐는 국가의 부채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전통적인 회계 관행을 유지할 수 있다.

물론 다름 방식을 선택할 수도 있다. 중앙은행이 화폐를 발행하여 자신의 자산으로 삼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중앙은행은 화폐의 액면 가치와 제조/유지 비용의 차이만큼 시뇨러지를 누리게 된다. 그리고 그 시뇨러지를 주주인 국가에 배당의 형식으로 지불할 수도 있다.

III. 주권화폐제도하의 통화정책과 기본소득

상업은행이 더 이상 은행화폐를 공급할 수 없게 되면 새로운 화폐제도에서는 경제가 필요로 하는 유통화폐를 어떻게 공급할 것인가? 주권화폐론은 정부의 새로 만들어지는 통화관리위원회나 새롭게 지위가 규정된 중앙은행을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와 대등한 제4부로 만듦으로써 화폐의 공급을 책임지도록 할 것을 제안한다. 왜냐하면 특수한 기구가 전체 통화량을 탄력적으로 조정하는 임무를 맡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즉 통화관리위원회(혹은 중앙은행)가 독립적으로 인플레이션율, 성장률, 인구 증가 등에 기초하여 필요한 통화량을 결정하는 것이다.

새로운 제도에서 의회나 행정부가 통화관리위원회(이제부터 새로운 지위를 부여받은 것을 전제로 중앙은행으로 지칭한다)에 대해서 화폐를 요구할 권리를 가져서는 안 되며 중앙은행의 판단에 발언권을 가져서는 안 된다. 즉 중앙은행에 민주적 권력분립에 기초하여 헌법적 지위를 부여해야 한다. 이 방식은 은행과 금융시장의 금융적 기능을 화폐적 기능과 분리시키고 통화 권력과 재정 권력을 분리시킴으로써 안정적 통화와 건전 재정을 보장할 수 있다. 즉 화폐와 신용을 분리하여 더 이상 한 나라의 화폐가 은행 및 금융 산업의 특정 이해관계의 볼모가 되지 않도록 하고, 중앙은행과 의회/행정부를 분리하여 주권화폐가 정치적인 이해에 좌우되지 않도록 할 수 있다.

1. 통화 공급의 대안적 경로들

중앙은행이 화폐공급을 늘리는 기본적인 경로는 화폐를 발행하여 정부의 재정에 보태는 것이다. 이 화폐는 대출이 아니라 정부의 지출을 통해서 유통에 들어가며 그 자체가 순수한 화폐 발행 이익이다. 이것은 국채와 같이 상환할 필요가 없는 정부의 화폐적 소득이다. 또한 통화당국이 일정 비율을 상업은행에 대출을 해줄 수 있다. 통화당국은 이 경로를 통화정책의 한 수단으로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부로 이전된 새 화폐를 어디에 사용할 것인가는 통화장국의 업무 사항이 아니라 정부와 의회의 소관사항이다. 주권화폐론은 화폐의 첫 분배는 의회의 결의에 의해서 평등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화폐의 첫 분배를 국가의 민주적 결정에 따를 때 자산 거품을 형성시키는 방향으로 화폐가 공급되는 것을 억제할 수 있다. 그리고 정부는 부채의 누적 없이 예산을 넘어서는 추가적인 지출을 할 수 있다.

정부의 지출 방식으로는 크게 네 가지가 제안된다: 1) 시민에게 주는 기본소득(혹은 시민 배당으로 부를 수 있다), 2) 정부 지출의 지원 3) 세금 감면, 4) 기업 등을 위한 간접적인 자금 제공(은행 및 비 은행 대출 기관에 대한 대출). 여기서 1)~3)은 결과적으로 새롭게 창조된 화폐가 지출을 통해서 경제로 투입된다. 하지만 4)의 경우에는 대출이 상환되면 화폐는 다시 파괴되기 때문에 지출을 통해서 항구적으로 경제에 투입되는 1)~3)의 경우와는 성격이 다르다.

이 네 가지 방안은 상호 배타적이지 않다. 정부는 민주적 과정을 거쳐서 새로운 화폐의 창조에 따른 시뇨러지를 네 가지 방안을 적정하게 배합하여 활용할 수 있다. 그렇지만, 새로운 제도에서도 정부의 기본적인 재정 지출은 세금에 기반할 것이며, 세금 감면은 소득 불평등의 개선에 부합하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새로운 제도에서 상업은행의 대출은 기본적으로 저축에 기반하기 때문에 정부가 저축 이상의 자금 수요에 자금을 제공하는 것은 경제적 필요성에 따른 보완적인 역할에 한정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 보고서에서는 1920년대에 더글라스가 제안한 바와 같이 모든 시민에게 화폐 발행 이익을 매년 기본소득으로 제공하는 것을 권한다.

기본소득 도입의 정당성은 여러 가지 차원에서 제기된다. 공동부에 입각하여 모두의 몫을 모두에게 돌려주는 사회 정의의 구현, 지원 사각 지대의 배제, 행정적 효율성 제고, 생활방식 선택의 다양성, 복지, 고용, 생산, 자원 고갈 및 오염 간의 연계 단절을 통한 환경적 책임 강화 등을 포함한다. 이 같은 기본소득은 이 프로젝트의 다른 장들에서 다루고 있듯이 안정된 재원을 바탕으로 해야 하기 때문에 세금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 옳다. 이 기본소득은 이노우에 도모히로가 규정했듯이 고정 기본소득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장에서 제시하는 기본소득은 공동부의 하나인 화폐발행이익을 국민에게 돌려주는 것임과 함께 경제 성장에 맞춰 유효 수요를 확장함으로써 경제를 안정시키는 거시경제정책의 성격을 아울러 가진다. 따라서 화폐발행이익에 따른 기본소득은 인구 증가율, 물가 상승률, GDP 갭 등을 감안하여 거시경제 상황을 반영하여 변동시킬 필요가 있다. 따라서 화폐발행이익에 근거한 기본소득은 경기 변동에 따라 변할 수 있으며, 화폐 제도의 개혁 이후 새로운 통화정책에 조응하여 지급되어야 할 것이다.

2. 주권화폐 체제의 통화정책

주권화폐 체제에서는 다양한 방식의 통화정책을 상정할 수 있다. 상업은행의 화폐 창조기능을 정지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화폐 공급이 경직적으로 되어 경제 성장을 제약할 수 있다는 비판이 있다. 그러나 주권화폐 제도에서도 다양한 보완적 제도를 통해서 화폐 공급의 탄력성을 유지할 수 있다.

우선 통화 공급을 매해 고정된 명목 증가율로 증가시키는 방식을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폐 공급을 경제 성장과는 무관하게 매년 2%씩 늘리는 것을 상정할 수 있다. 이 같은 엄격한 준칙에 기반한 공급 체제는 밀턴 프리드먼이 제안했던 통화주의적 접근방식과 유사하다. 이에 따르면 통화 공급의 증가율은 장기 경제성장률(과 적정 인플레이션율)을 반영하여 정해지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준칙 기반 체제는 통화 증가율이 경제의 현 상태와 관련이 단절되어, 사전에 결정된 통화증가율이 명목 경제성장률과 일치할 경우가 아니면 디플레이션적이거나 인플레이션적일 수 있다.

영국의 연구단체 Positive Money는 보다 대안적인 통화 공급 체계로서 탄력성의 정도에 따라 5개의 유형을 추가적으로 제시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표 2와 같다.

유형 1은 위에서 가장 기본적인 유형으로서 화폐의 중가율을 고정시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유형 2는 경제 외부적 요인인 인구 증가율이나 생산성 증가율의 지표를 만들어 화폐 증가와 연동시키는 방법이다. 이는 화폐 공급이 보다 탄력적일 수 있지만 일반적인 지표를 설정하는 것이 어렵다. 유형 3은 통화 당국이 인플레이션, 고용 등의 목표를 설정하고 화폐 증가율을 설정하는 것이다. 이 유형이 가장 바람직하겠지만 새로운 통화정책의 규범에 대한 광범위한 합의가 필요할 것이다.

유형 1, 2, 3은 화폐의 기본적인 공급을 어떤 원칙에 따라 수행할 것인가에 따른 구분인데 반해서, 유형 4, 5, 6은 통화당국이 경제 내의 자금 수요에 대응하여 새로운 화폐를 창조하여 은행 혹은 비은행 대출기관에 대출해주는 방식을 결합한 제도이다. 주권화폐 제도에서는 기본적으로 대출을 저축에 기반하도록 한다. 따라서 앞서 언급했듯이 통화당국이 새로운 화폐를 기업과 가계의 자금 수요에 맞춰서 공급하는 것은 경제적 필요에 따른 대출의 보완적인 방법일 뿐이다. 따라서 유형 4,5,6에서는 기본적인 화폐 공급이 기본소득 지급을 비롯한 정부 지출 등으로 사용되도록 하고, 그 같은 화폐 공급이 자금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할 때 통화당국이 화폐를 창조하여 은행 및 비은행 대출기관에 대출해주는 것을 허용한다.

이 중에서 유형 4는 통화 당국의 대출을 Fire 영역(금융, 보험, 부동산)을 제외하고 GDP에게 기여하는 실물 부문으로 한정하는 모델이다. 유형 5는 자금 공급을 GDP 기여 기업 외에 가계로 확장하는 유형이다. 그리고 유형 6은 통화 당국에 의해 뒷받침되는 대출을 Fire 영역을 포함한 모든 기업과 가계에 허용하는 유형이다.

이 유형 분류를 제시한 Positive Money에서는 유형 1, 2, 3이나 유형 6과 같은 극단적인 유형보다는 유형 4와 5와 같은 절충적인 유형을 권하고 있다. 이 보고서에서는 통화당국이 경제 상황에 맞게 기본적인 화폐 공급을 하고, 그것이 GDP 기여 기업과 가계의 자금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할 때, 통화 당국이 은행과 비은행 대출기관을 매개로 대출하는 유형 5가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 본다.

IV. 주권화폐 도입에 따른 기본소득의 재원 추정

4.2에서 밝혔듯이 경제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화폐가 지속적으로 공급되어야 한다. 화폐의 증가는 자주 인플레이션을 연상시키지만 경제의 필수적이자 자연스런 현상이다. 경제가 성장하는 동안 통화량은 지속적으로 늘어났으며 앞으로도 계속 늘어나야 한다.

그렇다면 특정 국가가 주권화폐 제도를 도입하여 경제가 필요로 하는 유통 화폐를 주권화폐로 대체한다고 했을 때 국가가 확보할 수 있는 시뇨러지는 어느 정도이며, 그것을 재원으로 한다면 국민들에게 어느 정도의 기본소득을 보장할 수 있을지를 추정해보자.

경제가 인플레이션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안정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기술 발전 속도에 대응하는 만큼의 통화 증가율이 필요하다. 기술 발전의 속도보다 통화 증가율이 높다면 인플레이션이 일어날 수 있으며 그 반대의 경우에는 디플레이션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기술 발전의 속도를 정확히 파악할 수가 없다. 따라서 미래의 적정 통화량을 도출하여 시뇨러지를 계산하기보다는, 과거의 경제 성장률이 주어진 상황에서 통화량이 어느 정도로 증가했는지를 근거로 주권화폐 개혁을 통해서 국가가 누리게 되는 시뇨러지를 추정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다. 과거의 가설적 시뇨러지가 도출된다면 시기 별로 국민들에게 제공할 수 있었던 기본소득의 금액을 쉽게 추정할 수 있다.

조세프 후버 등은 2001년의 논문에서 미국, 영국 등 4개국을 대상으로 은행화폐를 주권화폐로 대체했을 때 예상되는 통화량의 규모를 추정했다. 이 글에서는 그들이 사용한 방법을 원용하여 한국 경제를 적용했다. 즉 한국경제의 2007년부터 2019년까지의 통화량 변화를 기준으로 삼아 그 기간 동안 주권화폐 제도에 따라 유통 화폐를 공급했다고 했을 때, 기본소득으로 제공할 수 있는 시노러지의 규모를 추정했다.

주권화폐 개혁은 은행화폐(bankmoney, 요구불예금)을 주권화폐로 대체한다. 이는 현 제도에서 M0와 M1의 차이를 없애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새롭게 규정되는 공식 유통화폐를 M이라고 하자. 개혁 이후의 M의 총량은 현재의 M0와 M1을 근거로 해서 대략적으로 추정할 수 있다.

주권화폐 개혁을 단행하면 M은 기존에 M0과 M1이 수행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따라서 M은 현재 유통 화폐를 대표하는 M1의 구성요소인 유통중인 현금(A)과 요구불예금(B)을 포함해야 한다. 한국 경제의 M1이 해당 기간에 어떻게 변동해왔는지는 표 2의 4열에 표시되어 있다. 2019년 기준으로 M1은 876.9조이며 GDP의 약 45.6%이다.

또한 M은 현재 지불준비금의 한 요소인 시재금(C: 은행이 보유하는 현금)과 함께 지준금 중에서 은행 자체의 영업에 사용될 부분(D)을 포함해야 한다. 여기서는 단순화를 위해서 기존의 지준금 중 50%가 새로운 제도에서는 은행 자신의 영업에 활용되는 것으로 가정한다. M1에 시재금(C)과 은행 영업을 위한 지준금(D)를 보태면 현재의 조건에서 도출할 수 있는 M의 규모라고 할 수 있다. 그에 대한 추정치는 표 2의 7열에 표시되어 있다.

개혁이 이뤄진다면 여기에 두 가지 요소를 더 고려해야 한다. 하나는 3.1에서 언급했듯이 현 제도에서는 M2에 포함되지만 개혁 이후에는 요구불예금으로 전환될 M2의 약 30%로 추정되는 현재의 저축성 예금이다. 또 다른 항목은 개혁에 힘입어 늘어날 수 있는 은행의 운영 자금이다. 개혁이 이뤄지면 비현금성 결제가 지준금과 현금의 순환이 이원체계가 아니라 단일체계에 따라 이뤄지기 때문에 은행이 대출 중개나 투자 사업에 활용할 수 있는 자금이 늘어날 것으로 기대된다. 이 같은 금액은 오늘날 은행 시재금의 50%에 해당할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추정에 따르면 2007년부터 2019년까지의 한국경제가 주권화폐 제도에 따라 운영되었다고 했을 때의 M의 규모 표2의 10열의 수치와 같다. 2019년의 기준으로 봤을 때, 개혁 이후의 M의 규모는 1,795조 원으로 같은 해 GDP의 약 94%이다.

이 모델에서는 새롭게 창조된 M이 모두 기본소득을 통해서 경제로 투입되는 것으로 상정하고 있다. 따라서 연간 M의 증가량이 중요하다. <표 4>의 2열은 2008년부터 2019년까지 M의 연간 증가액을 나타내고 있는데, 12년 간의 연 평균 증가액은 약 91.6조원이다. 여기에 화폐의 제조 및 유지 비용을 뺀다면, 나머지는 국가의 순수한 시뇨러지라고 할 수 있다.

만약 12년 간 M을 기본소득의 지급을 통해서 공급하고 제조 및 유지 비용을 무시한다면, 각 연도의 기본소득 지급액은 각 연도 M의 증가량을 그 해의 인구를 나눈 값이 된다.

이 같은 추정에 따르면, 2008년부터 2019년까지의 가설적인 1인당 기본소득 추정액은 <표4>의 4열과 같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2008년의 가설적인 1인당 기본소득 추정책은 약 97만이며 매년 약 4.6%씩 증가하여 2019년의 추정액은 약 189만원(월 16만원)이다.

이 추정치는 중앙은행이 경제 상황에 대한 판단에 따라 재량적으로 통화정책을 전개했던 과거의 통계를 근거로 삼았기 때문에, 5.3에서 논의했던 새로운 제도의 유형 중에서 유형 3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유형 4,5,6처럼 새로운 화폐를 가계와 기업을 위한 대출에 활용할 수도 있겠지만, 그 경우에는 기본적인 것 외에 추가적인 화폐 창조에 의해서 자금이 조달되어야 할 것이다.

V. 주권화폐론과 기본소득의 또 다른 유형

이제까지 검토한 주권화폐론의 기본 목적은 기본소득의 지급 자체에 있지 않다. 시뇨러지는 공공적인 다른 목적에 활용할 수도 있다. 주권화폐론의 1차적 목적은 화폐 공급이 부채 누적을 동반하는 현재의 화폐 발행체제의 내재적 모순을 해소하는 데 있다. 현재의 체제에서는 새로운 화폐의 공급이 부채의 누적을 동반하기 때문에 경제 성장의 단절 없이는 성장 과정에서 초래되는 민간 부채를 감축할 수 있는 방안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의식과는 달리 주권화폐의 도입과 기본소득 지급을 현대 자본주의에서 심화되고 있는 유효수요 부족의 문제를 타개하는 방안으로서 검토하는 흐름도 있다. 이 입장은 주권 화폐의 도입이 부채 축소 이상의 목표를 가져야 한다는 입장을 가진다.

주권화폐의 옹호자들 간에는 국가가 상업은행을 배제하고 화폐 창조의 권한을 독점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상이한 견해가 있다. 논자에 따라서는 국가가 화폐 창조의 독점권을 갖는 것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고 보며, 국가가 “부채가 아닌 돈(debt free money)”을 창조하도록 허용하는 개혁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입장을 취한다. 그래서 상업은행의 신용화폐 창출을 현행 체제의 방식대로 허용하면서 정부에 의한 “부채 아닌 주권화폐의 발행을 병행할 것을 주장한다. 이 글에서는 이 후자의 방안을 주권화폐론의 유형 2로 지칭한다.

1. 주권화폐론 유형 2의 문제의식

유형 2는 기술 발전으로 경제의 총 산출에서 임금 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어서 근로소득만으로는 소비자의 지출과 경제가 필요로 하는 적정한 유효수요를 뒷받침할 수 없기 때문에 기본소득의 도입이 필요하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유형 2의 주창자들은 오늘날의 경제에서 소비자의 근로소득이 소비자의 지출보다 적지 때문에 그 간극을 가계 부채와 사회보장 혜택이 메우고 있다고 분석한다. 그러한 이유로 가계 부채와 함께 정부 부채가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그래서 유형 2는 주권화폐를 발행하여 그 시뇨러지를 기본소득과 정부의 적자 지출에 필요한 재원으로 삼을 것을 제안한다.

영국의 데이터에 따르면 1948년부터 2016년까지 70년 동안 소비자 지출의 흐름에 비해서 총 근로소득이 상대적으로 계속 감소했다. 임금이 총 생산량과 지출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감소했다. 현재 일반 국민들은 전체적으로 소비를 뒷받침기에 충분할 정도로 벌지 못하고 있다.

이로 인해 불가피하게 근로 소득에 비근로소득을 보충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으며, 실제로 비근로소득은 연금, 복지 혜택, 배당금 및 가계 대출의 형태로 크게 늘어났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가계 대출의 역할이다. 가계 대출은 지속 불가능한 수준의 빚을 낳았다. 또한 복지 혜택의 증가로 정부의 예산 적자가 계속되어 정부의 부채가 과다해졌다. 따라서 현 경제 체제는 반복적으로 가계 및 정부 부채를 발생시켜서 은행 파산과 경제 위기를 불러온다. 또한 정부는 과도한 공공 부채 때문에 긴축정책을 실시하여 사회의 저소득층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줄이고 있다.

경제가 근로소득에 덜 의존하고 비근로소득에 더 의존하게 만든 장기적인 구조적 변화는 무엇 때문에 일어났는가? 여러 가지 대답을 할 수 있겠지만, 유형 2의 제안자들은 기술 발전으로 인해 임금이 산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줄어들어서, 실질 임금의 증가가 산출 GDP의 증가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래서 비근로소득이 첨단기술경제에서 총 수요의 핵심적인 요소가 되었다는 것이다.

영국의 경우, 최근 23년 중 단지 2년만 재정 흑자를 달성했는데, 이런 점을 고려하면 정부 적자는 경제의 주어진 상태가 되었다. 만약 전체 인구가 적정한 정부 서비스와 복지 급여와 함께 합리적인 수준의 삶을 영위할 수 있을 정도로 정부가 지출을 한다면 현재 주어진 경제 구조하에서 정부 적자는 GDP의 10%를 초과할 것으로 본다.

2. 유형2의 제도적 구상

이 같은 인식에 입각하여 제안자들은 기본소득 안과 주권화폐 안의 결합을 제안한다. 즉 두 방안은 각각 경제 내의 부채를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 단순화시켜서 말하면, 기본소득이 주어지면 가계가 지출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대출을 늘릴 필요가 없기 때문에 소비자 부채를 크게 줄일 수 있다. 2007년 경제위기의 주요 원인이 소비자 부채의 큰 증가였다. 따라서 소비자의 부채를 기본소득으로 대체하면 그러한 위기를 피할 수 있다.

또한 정부가 직접 주권화폐를 직접 발행하고 그것을 부채가 아닌 것으로 정의할 경우, 즉 국채의 매각 없이 정부가 직접 화폐를 발행할 경우, 주권화폐로 조달된 정부지출은 더 이상 적자 지출로 간주되지 않아서 공공 부문의 부채는 발생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정부의 재정 적자를 줄이기 위해서 긴축 정책을 실시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주권화폐와 그것에 의해서 자금이 조달되는 기본소득의 조합은 소비자와 정부의 부채를 각각 줄여서 위기와 긴축을 피한다. 이 시점에서 주권화폐의 발행과 기본소득의 지급은 잠재적인 완전고용 산출 GDP의 추정치에 의해서 제한되어야 한다는 것을 언급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러한 정책은 인플레이션을 불러올 것이다. 그러나, 잠재적인 완전고용 산출 GDP 수준을 달성하기 전까지는 기본소득 및 주권화폐는 긴축정책에 의한 재정 삭감을 역전시키고, 생산 투자를 시킬 뿐만 아니라 저소득층의 생활수준을 높일 것이다. 기본소득은 개인들에게 돈을 지급하자는 제안이지만, 주권화폐는 정부의 지출 부서에게도 발행될 수 있다.

3. 한국의 가계 부채로부터 도출한 기본소득

한국의 가계부채는 2019년 기준으로 약 1,600조 원이며 2009년 이후 연 평균 7.5% 증가했다. 유형 2의 제안자들이 전제한대로, 2009년 이후 가계부채의 증가가 소비자들의 적정 소비 지출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발생한 것으로 전제하자. 모든 국민들이 가계부채를 균등하게 나눠서 가지고 있지 않지만, 매년 1인당 부채 증가액만큼 기본소득이 주어졌다면 한국의 가계 부채는 2010년 이후 지금처럼 늘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전제에 따른다면 2010년부터 1인당 평균 가계부채 증가액을 구하면 우리 경제에서 필요한 기본소득의 규모를 추정할 수 있다.

표7의 3열은 각 연도 별 1인당 가계부채 증가액이다. 예를 들어 2019년에는 국민 1인당 가계부채가 약 124.8만원이 증가했다. 유형 2가 전제한대로 가계부채가 경제의 정상적인 유효수요와 소비자 지출을 뒷받침하기 위해 근로소득을 보충하는 역할을 했다고 가정하자. 기본소득이 2019년에 전 국민에게 1인당 124.8만원이 주어졌다면 가계부채의 증가를 상쇄하면서 경제 성장에 필요한 유효수요가 뒷받침했을 것이다.

지난 10년 간으로 기간을 확장해보면, 전 국민에게 연 평균 1인당 165만원의 기본소득이 제공되었다면, 가계 부채의 규모를 2009년 수준으로 유지하면서도 비슷한 경제 성장을 실현했을 것이다.

결론. 제도 개혁의 전망

중앙은행이 정부 바깥에서 독립적으로 부채의 형태로 화폐를 공급하는 방식에 익숙해 있는 현대인들에게, 중앙은행이 국가의 독립된 한 부(제4부)가 되어서 화폐를 찍고 그것을 정부의 재정으로 이관하는 방식은 매우 낯설다. 상업은행의 신용 창조 기능을 보존하더라도 정부가 중앙은행과 별로도 주권화폐를 발행해서 기본소득과 정부 재정으로 활용하자는 방안도 역시 급진적이다. 또한 주권화폐제도로의 이행은 기존의 상업은행이 누리는 막대한 특권적 이익을 제한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치적 저항도 아주 클 것이다. 따라서 단기간에 이런 유형의 개혁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현재의 체제가 지속되기에는 여러가지 구조적인 한계를 안고 있다. 첫째 정부 부채를 줄일 수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현 체제에서는 우선 중앙은행이 민간의 자산을 매입하는 방식으로 본원통화를 공급하고 상업은행은 본원통화를 기반으로 해서 은행화폐를 창조한다. 경제가 정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경제성장에 조응하는 통화량의 증가가 필요하다. 따라서 중앙은행은 계속 민간의 자산을 매입해야 본원통화를 공급할 수 있고 상업은행은 그 지급준비금을 바탕으로 은행화폐를 창조할 수 있다. 본원통화의 증가 없이 상업은행의 신용창조만으로 통화량을 계속 늘릴 수는 없다. 현재 중앙은행이 매입하는 주요 자산은 국채다. 그렇다면 정부는 계속해서 재정 적자를 통해 국채를 만들어 내야 한다. 결국 본원통화가 늘기 위해서는 정부가 부채를 계속 발생시켜야 하는 문제가 따른다. 정부부채가 늘어난다고 해서 반드시 정부가 파산하는 것은 아니지만, 회계상으로 부채가 계속 발생하는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현 체제는 정부 부채의 증가 없이는 유지될 수 없는, 지속 불가능한 체제라고 할 수 있다. 현 체제 내에서는 현재 누적된 정부 부채를 줄일 방법이 없다. 정부가 기존 부채를 줄이기 위해서는 흑자 재정을 유지해야 한다. 흑자 재정을 유지한다는 것은 시중의 국채를 줄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럴 경우, 중앙은행은 매수할 자산이 없어서 적절하게 통화를 공급할 수가 없다.

두 번째는 민간 부채가 전 세계적으로 과도해서 신용 창조를 통한 통화 공급도 한계점에 다가서고 있다는 점이다. 2018년 기준으로 세계 주요국의 민간 부채는 표에서 보듯이 대부분 GDP의 200%를 넘는다. 따라서 전 세계적으로 민간 부채를 줄여야 한다. 그런데, 현대의 화폐 제도에서는 «경제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그에 해당하는 만큼 혹은 그 이상의 민간 부채 증가가 필요»하다. 결국 민간 부채가 위험 수준을 넘지 않도록 억제하면 성장이 정체하고, 성장을 허용하면 민간 부채가 과잉이 되어 금융위기가 일어날 수 있다. 따라서 현대 경제는 화폐 제도 때문에 GDP 축소 없이 민간 부채를 줄일 수 없는 구조적인 딜레마에 빠져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화폐 제도의 개혁이 가장 확실하고 직접적인 방법이라는 인식이 강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셋째는 통화정책의 수단이 없어졌다는 점이다. 현 제도에서 통화정책의 수단은 기본적으로 금리정책이다. 중앙은행은 기준금리를 통해 시중금리를 조절한다. 그런데 이미 많은 선진 자본주의국가에서 기준금리는 제로 수준으로 떨어져 있다. 금리를 제로 이하로 내릴 수는 없다. 그래서 그러한 나라들은 중앙은행이 민간 자산을 직접 매입하는 방식으로 화폐를 민간에 공급해 왔다. 이렇게 중앙은행이 본원통화를 늘려도 유통화폐가 충분히 늘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유통화폐의 대부분은 은행화폐이고 이 은행화폐는 기본적으로 대출을 통해 창조되기 때문이다. 은행이 위험 때문에 대출을 주저하고 기업과 가계가 불확실한 전망 때문에 대출을 받지 않으면 유통화폐가 늘어나는 데 한계가 있다. 이 경우에 시중에 통화량을 공급하는 유일한 방법은 중앙은행이 정부가 발행한 국채를 직접 인수하고 정부가 지출을 늘리는 것이다. 정부가 국채를 발행하고 중앙은행이 화폐 발행을 통해 그것을 매입하는 것은 사실상 국가가 화폐를 발행하여 지출을 늘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일본의 아베노믹스가 바로 그러한 정책이다. 그런데 현행 제도에서는 정부 부채 누적이라는 형식적인 불균형을 계속 남긴다. 그렇다면 형식적으로 일관되게 중앙은행이 정부의 한 기구가 되어서 주권화폐를 발행하는 주권화폐제도가 내용과 형식을 통일시키는 훨씬 나은 방법일 것이다.

정부가 화폐를 발행하는 것은 현재의 중앙은행 제도가 정비되기 전까지는 오히려 전형적인 화폐 발행의 방식이었다. 근대로 들어와서 미국의 링컨 대통령은 남북전쟁 때 정부 지체를 발행했으며 케네디 대통령도 정부 지폐 발행을 검토했다. 현재에도 미국과 영국에서는 재무부가 주화를 발행하고 있다. 미국의 오바마 행정부는 한때 1조 달러짜리 동전을 발행해서(미국은 재무부가 동전을 발행한다) 그 동전으로 미국의 국채를 청산하는 방법을 검토한 적이 있다. 이 시도는 변형된 형태로 주권화폐를 활용하는 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정부 부채를 동반해야 하는 현 제도의 자체적인 모순 때문에 주권화폐제도로의 이행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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