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 토론 4. “기본소득과 젠더 평등” 질의-답변
“기본소득과 젠더 평등” 쟁점에 대한 질의와 답변
정리: 김수연 이사
질문 1. 발표문에서 페미니즘 진영의 기본소득 비판에는 이성애 결혼제도가 전제된 듯하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20대 청년 거의 절반이 비혼을 결심하고, 사회가 1인 가구 중심으로 재편되는 상황으로 변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기본소득은 젠더 평등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기본소득은 가구 단위가 아니라 개인 단위로, 정기적으로 지급되기 때문에,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를 주고 가부장제에 균열을 낼 수 있다. 다만 결혼을 하지 않을 자유, 원하는 파트너와 동반자로 살아갈 자유는 충분한 액수의 기본소득이 주어져야 가능할 것이다. 젠더 평등은 ‘충분한’ 기본소득이 지급되어야 할 정당성을 부여한다는 데 의미가 크다.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는 일찍이 “생활동반자를 찾는 밤(2019.07.05.)”, “1인가구를 위한 독립생활개론”, “우리에게 조금 먼 가족이 필요해”(2018.11-2019.04) 등의 행사를 개최하면서, 기본소득이 “자유와 예속의 관계가 아닌 새로운 관계를 어떻게 맺을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해온 바 있다. 기본소득은 생계부양(임금노동)과 돌봄제공(무급가사/돌봄노동)이라는 오랫동안 여성을 억압해왔던 노동들에서 자유로운 활동과 관계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이렇게 사회가 변화하고 있지만, 우리는 전통적인 재생산가구 안에서 젠더 불평등 문제를 회피할 수 없다. 여전히 (이성애)가족은 사회구조를 떠받치는 국가의 중요한 재생산 수단이자 정책 대상이기 때문이다. 결혼과 임신·출산으로 야기되는 여성의 경력 단절은 불안정노동의 여성화, 빈곤의 여성화 현상을 심화한다. 가사 노동과 돌봄 노동이 여성에게 강요되는 현실은 여성이 낮은 사회적·경제적 지위에 머무르는 것을 정당화하고 존속하게 만든다. 비혼과 저출산 현상은 젠더 불평등한 현실을 방증한다. 기본소득이 주어졌을 때 다양한 가족 및 공동체가 출현하는 효과도 가져올 수 있다.
질문 2. 기본소득이 무급노동에 대한 사회적 인정이라는 프레임은, 기본소득이 모든 인간 권리로서 주어져야 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위험해 보인다. 기본소득이 무급노동에 대한 인정이라는 표현은 수사적인데, 엄밀하게 말하면 참여소득이라고 표현하는 편이 적합하지 않은가?
기본소득이 무급노동에 대한 사회적 인정이라는 표현을 당위적/개념적 수준의 논의와, 가사노동/돌봄노동에만 종사하면서 기본소득을 직접 받는 사람의 경험은 다를 수 있다. 가정 내 가사/돌봄노동이 화폐 가치로 환산되지 못하고, 사회적 평가도 받지 못하던 여성이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는 경험이 되기 때문이다. 이 돌봄/가사 노동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연장선상에서 행해지는 것이기도 하다. 돌봄을 스스로를 위한 재생산 활동 ─ 자고 먹고 스스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활동 ─ 에 대한 인정이라고 관점을 확장하면, 기본소득이 무급노동에 대한 인정 여부인지 논쟁을 푸는 실마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한편 저평가된 가사/돌봄노동에 종사하는 여성에게 더 많은 인정과 보상이 돌아가는 것(가사노동중심주의)이 젠더 정의에 더 부합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이것은 참여소득의 원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기본소득은 돌봄노동을 젠더 평등하게 분배하기 위해 필요한 전제 ─ 양육의 재분배 및 생산과 재생산 전체에 걸친 시간의 재분배 ─ 를 마련하는 데 탁월한 전략이 될 수 있다. 권리 기반의 동등한 기본소득은, 평등한 시간 활용에 대한 요구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에서 기본소득을 주는데 나도 회사에서 야근이 아니라 집에서 아이를 돌보고 싶다는 돌봄 욕구는, 노동 시간의 단축에 대한 요구, 나아가 또다른 정책 패키지에 대한 요구로 이어진다. 물론 시간 투쟁뿐만 아니라, 시간의 조건을 바꾸는 사회적 개입이 필요하다.
질문 3. 남성들이 실업을 겪는 상황에서(전쟁이든 재난이든) 시간이 넘치는 남성들이 가사노동을 할까? 상황 자체를 자존심의 문제로 받아들여서 더 가부장적인 태도, 더 열심히 놀겠다는 태도를 보일 수 있다. 시간 자체가 객관적으로 주어지더라도 여전히 문화적인 성별 역할과 위계 서열이 영향을 준다. 기존 페미니즘 진영이 지적해 왔던 문제일 텐데, 여기에 대해서 조건이 주어지지만 보충하기 위해 어떤 전략이 필요한가?
남성이 가부장적 남성성을 수행하고 여성을 억압하는 현실에서 기본소득은 여성이 탈출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한다. 가부장제를 향한 투쟁에도 기본소득은 경제적/시간적인 객관적 토대를 제공할 수 있다. 먼저 경제적으로 공식 경제에서는 저임금 일자리를 거부하고 임금 협상력을 부여하며, 재생산 및 가족 영역 안에서는 남성 생계부양자에 대한 경제적 예속성을 끊어낸다. 기존 성별 분업관계에 대한 해체 효과는 기본소득이 노동과 무관한 소득이라는 점에서 비롯된다.
무조건적 기본소득을 시간 분배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적어도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다른 일에 시간을 돌릴 수 있게 해준다(일종의 ‘무조건적 시간배당’). 무조건적 시간배당은 남성이 공식 노동 시간을 줄이고, 가사 노동 시간을 늘리는 방향으로 사회적 시간을 재분배할 가능성을 높인다. 더불어 출산육아휴직을 부모 모두에게 의무화하고 유급화하는 등의 법제도적으로 가부장적 행태에서 벗어나도록 강제하면 사회문화적인 인식도 변화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기본소득은 가족 구성의 자유, 관계 형성의 자유를 부여한다. 가사노동을 하지 않는 남성과 굳이 참고 같이 살 유인을 덜고, 다양한 관계를 구축할 수 있는 가능성과 더불어, 기존 이성애 성별 역할에서 벗어나 젠더를 가로질러 자신의 정체성을 탐색할 수 있게 하면서 기본소득은 문화적 위계서열에 균열을 낼 수 있다. 법제도적으로는 출산육아휴직을 부모 모두에게 의무화하고 유급화해야 하는 등 돌봄 활동을 강제하면 사회문화적인 인식의 변화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질문 4. 발표문에서 돌봄노동은 보육/육아를 중심으로 쓰여진 듯하다. 점점 노인 돌봄 문제가 커지고 있는 시점에서 특히나 육아뿐만 아니라 노인돌봄 영역은 민간 사회서비스 비중이 굉장히 높고, 이게 장기요양 부분을 다 민영화해서 풀어놔서 더 그럴 텐데, 이렇게 민간서비스 비중이 높은 것에 대해서 젠더 관점에서 어떤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 기본소득은 노인 돌봄에 있어서 어떤 영향을 줄까?
노인 돌봄에 있어서도 시장화된 민간 돌봄서비스 문제도 있지만, 발표문에서도 언급된 커뮤니티케어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돌봄서비스가 시장화되기도 했지만 정부에서는 사회 서비스를 공공화하려는 게 아니라, 시민사회에 비용을 떠넘기려는 정책적 흐름이 있다. 민간 돌봄 시장에서는 어떤 요양원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등급별로 서비스와 처우가 달라진다(극단적으로 인권 침해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장애인/노인요양시설). 노인 빈곤의 불평등, 특히 소득불평등뿐만 아니라 본인이 취약해졌을 때 받는 처우와 돌봄의 질에 있어서 불평등 극대화는 문제적이다. 가정 내 노인 돌봄도 아내, 며느리 등 여성에게 강요되는 한국에서 기본소득은 시간의 재분배와 돌봄의 재분배를 꾀할 수 있는 전략이 된다.
특히 정부에서는 경제 지표와 연계되는 저출산을 위기라고 규정하면서 아동 돌봄에만 제도의 역량을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아이에서 청년으로, 또 경제활동인구로 가치 있는 인구 집단에 자원과 관심이 집중되는 것이다. 이제는 우리가 자본주의 시장 안에서 유급노동을 할 수 없는 취약한 몸들과 생명들이 사회에서 더불어 살아나갈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공공서비스 영역을 노인 돌봄에까지 확장해야 한다. 돌봄 서비스 영역은 특히 여성노동자 종사 비율이 높은 직군인데, 무상 또는 저가로 제공되는 공공서비스는 여성의 공식 노동시장 참여를 늘리면서 동시에 서비스 노동의 저임금화를 방지, 젠더 특유한 산업별 임금 격차를 없앤다. 사회 서비스 노동은 여성 비율이 두드러진 분야이기에 공공서비스화는 성별 임금 격차도 완화하는 효과가 있다.
질문 5. 정부의 긴급재난지원금을 젠더 관점에서 설명해 달라.
중앙 정부의 긴급재난지원금은 전 국민에게 조건 없이 현금을 지급했다는 점에서 기존 선별성 수당 지급보다 진일보했지만, 가구 단위로 지급되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개인인가 가구인가, 라는 첨예한 문제를 제기한다. 특히 가구주가 아니지만 가사/돌봄노동 및 재생산 활동에 종사하는 여성이나 아동이 그 혜택을 받기 위해 가족 안에서 또다른 투쟁을 진행해야 한다.
더구나 코로나 시국에서는 재택근무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재택근무하는 여성들의 노동 강도가 가사/돌봄노동 때문에 훨씬 강해진 경향이 있다. 특히 이런 재난 상황에서 누가 재생산 노동과 돌봄노동 부담을 더 지게 됐는지도 젠더 불평등한 현실을 반영한다. 포스트 코로나 사회는 원격근무로의 패러다임 전환의 기회로도 보이는데, 그 장밋빛 미래는 모두에게 평등하게 열리지 않는다. 불안정 노동자, 여성이라든가 취약한 사람들이 더 열등한 위치에서 취약한 경험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젠더, 계급, 국적 등 사회적 정체성의 다양한 측면을 확장해서 자세하게 살펴야 한다.
【참고문헌】
금민. 2020. 『모두의 몫을 모두에게』, 서울: 동아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