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 토론 2. “생태적 전환을 고려한 기본소득” 발제문(초고)
생태적 전환을 고려한 기본소득
발제자: 안효상 상임이사
기본소득을 실질적 자유의 보장이라는 관점에서 옹호하건 모든 시민의 물질적 기초를 마련해준다는 민주적 공화주의의 관점에서 지지하건, 아니면 공동의 유산에 대해 모두가 가지고 있는 몫에 대한 권리라는 공동부의 관점을 채택하건 기본소득이 겨냥하고 있는 것은 개인들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고 개인들의 힘을 강화(empower)하는 것이다. 따라서 겉보기에는 생태주의와 직접 관련이 없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녹색당 계열에서 기본소득에 대한 상당히 일관된 지지를 찾아볼 수 있다. 이는 녹색주의와 기본소득이 상당한 친연성이 있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기후 변화에 맞서 시급한 생태적 전환이 필요한 오늘날 우리 논의의 주요한 토대가 될 수 있다.
기본소득에 대한 녹색주의적 옹호는 기본소득이라는 경제적 보장이 (불평등 완화와 함께) 과잉 소비-과잉 생산 그리고 시장 노동에서 벗어나게 하고,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다른 활동 더 나아가 ‘자율적 영역’의 확장으로 이어지며, 이는 상대적으로 생태적인 활동이라는 주장에 근거하고 있다.
또한 생산주의, 성장주의, 채굴주의에 기초한 자본주의의 삶은 시기마다 다르긴 하지만 지구적, 지역 내, 계급 간, 인종 간, 성별 불평등과 함께 하는 것이었다. 거꾸로 자본주의에 의한 자연 파괴는 마찬가지로 다양한 층위에서 승자와 패자를 낳고 있다(Boyce 1994). 따라서 이런 자본주의적 불평등과 자본주의의 자연 파괴로 인한 불평등을 제거하는 것은 생태 사회로 전환하는 데 중요한 목표가 되며, 이때 기본소득은 적극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최근에 녹색 관점에서 부상하고 있는 기본소득 원리에 기초한 정책은 탄소세/ 탄소 배당(부분 기본소득)이다. 이는 기후 변화에 맞서기 위한 급격한 탈탄소화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저소득층을 비롯한 취약 계층에게 피해가 가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이는 탈탄소화를 추진할 수 있는 정치 연합을 가능케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정의로운 전환).
탄소세/ 탄소 배당 아이디어의 부상은 오늘날 기후 변화와 지구 온난화가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이에 따라 기후 변화에 맞서는 집단적이고 의식적이고 시급한 노력이 필요하며, 당연히 이는 기본소득 논의를 넘어서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기후 변화 속에서 우리에게 닥친 위협을 확인하고, 이에 맞서는 포괄적인 계획을 검토하는 가운데 기본소득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를 검출해야 할 것이다.
오래된 교훈
넓게 보아 정치생태학에 기초한 탈성장 패러다임에서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입장은 일찍부터 있었다. 1970년대 초에 워런 존슨은 “환경적 방책으로서의 보장 소득”이라는 글에서 고용의 유지를 위해 지속적인 성장이 필요하며, 이것이 과잉 생산과 과잉 소비로 이어지는 것이 기본적인 경제 문제라고 보고, 보장 소득이 지속적인 성장과 고용 창출의 필요성을 제거하고, 서비스 기회의 확대, 새로운 방식의 살림살이(livelihood)의 모색 촉진, 경제의 건강을 유지하는 유연한 장치라고 주장했다(Johnson 1973).
이렇게 기본소득을 통한 경제적 보장과 성장 및 일자리 창출의 분리가 기본소득의 생태적 옹호에서 주요한 흐름을 형성한다.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IEN) 창립자 가운데 하나인 얀 오토 안데르손은 적절한 기본소득을 통해 성장과 경제적 보장의 ‘불경한 연계’가 분리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Andersson 2009). 이러한 분리 속에서 존슨이 이미 제기한 것처럼 개인들이 기존의 생산주의적, 성장 기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이제까지와는 다른 생활 형태를 경험할 가능성이 열린다. 이는 다양한 방식으로 주장되는데, 기본소득이 보장됨으로써 개인들이 환경적 영향이 더 작은 자율적 영역으로 옮겨갈 수 있고(Boulanger 2009; Schachtschneider 2012; Widerquist et al. 2013), 사람들은 공식 경제 외부에서 환경적, 정서적 가치에 더 몰두할 수 있으며(Fitzpatrick 2009), 물질적 소비를 적게 하고 여가를 더 많이 선택하며(Goodin 2001; Johnson 2011), 완전고용 정책과 비교할 때 일자리 나누기가 더 용이하며(Fitzpatrick 1998, 1999), 일이 더 노동집약적이고 덜 자원집약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Van Parijs 2013).
탈탄소화를 포함한 탈성장 패러다임에 대해 두 가지 비판점이 있다. 하나는 탈성장 전략이 실제로 탄소 배출을 많이 줄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로버트 폴린은 앞으로 20년 동안 전 세계의 총생산이 10퍼센트 줄어든다 해도 탄소 배출을 10퍼센트밖에 줄이지 못한다고 말한다(Pollin 2015). 더구나 탈성장 패러다임은 특히 선진국에서 대다수 사람들의 생활수준의 저하를 가져올 것이며, 따라서 불가능하거나 바람직하지 않으며, 따라서 탈성장이 아니라 부의 더 평등한 분배에 기초한 지속적인 기술 발전과 성장을 옹호하는 입장이 있다(Phillips 2015). 그리고 특히 지구공학(Geoengineering)에 기대 지구온난화를 막으면서도 다수의 생활수준을 유지하거나 개선하자는 입장이 있다(Morton 2016).
급격한 탈탄소화를 위해 탈성장보다는 에너지 효율 증대 및 100퍼센트 재생에너지 체제로의 전환을 주장하는 녹색 뉴딜 전략은 성장과 탄소 배출 사이의 ‘절대적 탈동조화’가 가능하다고 보고 있으며, 경제 성장이 이루어질 때만 재생에너지 부문에 대한 투자도 가능하다고 말한다. 또한 이는 새로운 일자리의 창출 속에서 정의로운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전략이라고 말한다(Pollin 2018).
탈성장 패러다임에 대한 또 다른 비판점은 첫 번째 비판과 연동되어 있는데, 기후 변화라는 커다란 전 지구적 도전에 대해 탈성장 패러다임은 매우 나이브한 대응이라는 것이다. 이는 탈성장 패러다임이 주로 지역적이고 자발적인 이니셔티브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태적 전환이 기후 변화에 맞서는 것을 넘어서서 새로운 문명을 요청하는 일이라면 이는 새로운 주체성을 형성하는 일이며, 이는 새로운 주권체의 형성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라 할 때, 기존 주권체의 변동을 염두에 두지 않는 전략은 패배하거나 주변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탈성장 패러다임 속에서 기본소득의 위치를 잡은 것 또한 두 가지 난점이 있다. 하나는 기본소득이 복지국가의 개혁이라는 의제 속에서 노동 유인의 강화 혹은 최소한 약화의 방지라는 관점에서 제시되었고, 경제 활동을 촉진하는 효과가 있다는 실험 결과도 기본소득의 주요한 논거로 제시되었다. 따라서 기본소득이라는 경제적 보장이 시장 노동 참여가 아니라 다른 활동, 예컨대 자율적 영역의 활동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새로운 주체성의 형성이 요구된다는 주장이 있다(Lawhon and McCreary 2020). 첫 번째 난점과 연동된 두 번째 난점은 기본소득이 경제적 보장을 통해 ‘개인들’에게 역량을 주는 것(empowerment)이라고 할 때 이 역량이 적절한 방향으로 흐르도록 하는 사회적 배치, 즉 또 다른 적절한 정책과 제도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의 지속성을 담보하는 소비주의가 소비자 금융, 브랜드화, 광고, 계획된 노후화(도덕적 마모)를 비롯한 다양한 물질적, 제도적 배치 속에서 승리를 거둔 것(규율 있는 쾌락주의)과 마찬가지 과정을 필요로 할 수 있다(Bonneil and Fressoz 2016).
새로운 문제(?)
오늘날 기후 변화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 생활의 생태적 한계에 대한 인식은 이미 1960년대 시작되었다(이른바 환경적 자각).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산업적, 상업적 팽창(이른바 거대한 가속)의 시기는 환경 위기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때이기도 했다. 문제는 인간의 진보를 가능케 한다고 보았던 과학과 기술의 발전 자체가 인류의 퇴행과 인간의 삶의 조건, 즉 자연 환경의 파괴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었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 속에서 급속하게 늘어난 물질적 생산과 소비는 급속한 인구 증가, 오염, 자원 고갈을 초래했고, 이는 인간이 생존하는 환경 자체에 위협을 제기했다.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The Silent Spring, 1962), 폴 얼리히의 <인구 폭탄>(The Population Bomb, 1968), 에드워드 골드스미스의 <생존을 위한 청사진>(A Blueprint for Survival, 1972), 프리츠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 1973) 등은 이런 위협에 대한 경고이자 대안을 제시하려는 시도였다.
이렇게 성장의 한계 혹은 파괴적 결과에 대한 인식이 커가는 가운데 오일쇼크(1973년)가 일어났고, 오일쇼크 전후로 시작된 경제 위기는 무제한적 경제 성장에 대한 기대를 약화시켰다. 이런 상황을 반영하면서 환경 위기에 대한 최초의 슬로건이 된 ‘성장의 한계’라는 관념이 등장했다. 1972년에 발간된 <성장의 한계>는 이런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진단을 내린다.
세계 인구, 산업화, 오염, 식량 생산, 자원 고갈의 현재 성장 추세가 변하지 않고 지속될 경우 이 행성에서 성장의 한계는 다음 백 년 내 어느 시점에 도달할 것이다. 가장 그럴듯한 결과는 인구와 산업 능력 모두에서 다소는 갑작스럽고 통제할 수 없는 쇠퇴일 것이다(23).
이를 전후로 하여 제한받지 않는 경제 성장이 정치적 의제로 올랐는데, 높은 비율의 경제 성장이 바람직한지 혹은 심지어 가능한지에 대한 질문을 둘러싼 논쟁이 시작되었다.
한쪽 극단에는 성장 옹호론자들이 다른 쪽 극단에는 에코사이드(ecocide)라는 음울한 전망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던 이 논쟁이 잠정적으로 해결된 것은 1980년대 이후였고, 이때 다시 등장한 슬로건이 ‘지속가능한 발전’이다. 지속가능한 발전 개념이 등장하기 이전에는 발전은 자원의 이용[착취]으로, 보존(conservation)은 자원의 보호로 이해되었지만, 이제는 발전과 보존의 타협으로서의 지속가능한 발전 개념이 등장한 것이다.
1987년에 유엔은 22명으로 이루어진 브룬트란트 위원회로 더 유명한 세계환경발전위원회를 구성하여 국제 사회를 위한 장기적인 환경 전략 구상을 의뢰했고, 그 결과로 나온 것인 브룬트란트 보고서, 즉 <우리 공동의 미래>(Our Common Future, 1987)이다.
이 보고서는 지속가능한 발전이란 “미래 세대가 자신들의 필요를 충족할 수 있는 능력을 위태롭게 하지 않으면서 현재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발전”이라고 정의한다(43). 이때 지속가능한 발전의 근본적인 세 가지 구성부분은 환경, 경제, 사회이며, 사회적 형평, 경제 성장, 환경 유지가 동시에 가능하다고 본다.
지속가능한 발전은 일종의 모순어법(oxymoron)이란 지적에서 알 수 있듯이 발전 개념에서 벗어나 있지 못하다. 따라서 지속가능한 발전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경제의 효율성을 높이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또한 덜 발전한 나라들이 경제 개발을 통해 생활수준을 높이면서도 미래 세대에게 해가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발전한 나라들이 성장을 덜 해야 할 뿐만 아니라 ‘서방’이 ‘나머지’ 지역에 실질적인 소득을 이전해야 한다. 이로부터 나오는 또 다른 문제들은 과연 지속가능성의 기준이 무엇인가, 누구를 위한 지속가능성인가이다(Du Pisan 2006; Luke 2005).
하지만 이렇게 모호하고, 현실에서 실행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에 1992년 리우 정상회의(유엔 환경개발회의)에서 지속가능한 발전은 각국 정부, 비정부기구(NGO), 기업 들이 널리 받아들이는 개념이 되었다. 이후 지속가능한 발전은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구성물로 ‘지속가능하지도 않고 발전도 아닌 것’을 덮어주는 수사적 장치로 작동했다(Mensah 2019).
이렇게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말로 우리의 대처가 지연되고 있는 사이에 오늘날 지구와 인류는 인간의 삶을 떠받치고 있는 생태적 한계(ecological boundaries)를 넘어서는 다중적인 생태 위기를 겪고 있다. 스톡홀름 회복력 센터(Stockholm Resilience Center)는 아홉 가지의 행성적 한계를 제시하고 있다. 대기권 오존 고갈, 생물권의 온전함의 상실(생물다양성 상실과 멸종), 화학적 오염과 새로운 물질의 방출, 기후 변화, 대양 산성화, 담수 소비와 지구적 수자원 순환, 토지 체제의 변화, 질소와 인이 생물권과 대양으로 배출, 대기 에어로졸 부하 등이 그것이다(Stockholm Resilience Center; Rockström et al. 2009).
이 가운데 인류의 삶에 가장 큰 위협이 되는 것이 기후 변화라고 지목되고 있다. 모든 대륙에서 기록적인 기온 상승이 일어나고 있으며, 해수면이 상승하고, 삼림이 불타고, 빙하가 녹고, 슈퍼폭풍이 빈발하고 있는데, 이는 지구 대기 중의 특정 미량 가스의 비율이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온실가스인 지난 200년 사이에 이산화탄소(CO2)는 250ppm에서 400ppm으로, 메탄(CH4)은 700ppb에서 1700ppb로 증가했으며, 이로 인해 기후 체계 내의 열에너지 운동이 변화한 것이 기후 변화를 가져왔다(Wainwright and Mann 2020; Bonneil and Fressoz 2016).
2018년 10월 IPCC에 제출한 <섭씨 1.5도 지구 온난화> 보고서에 따르면 최근의 인위적 온난화로 인한 온도 상승 추세는 10년마다 섭씨 0.2도이며, 현재 속도로 지구 온난화가 지속되면 2030-2052년 사이에 섭씨 1.5도 상승하게 된다고 한다. 섭씨 1.5도 상승 시 섭씨 2도 상승에 비해서는 약하지만, 대부분의 지역에서 평균 온도 상승, 거지 지역 대부분에서 극한 고온 발생, 일부 지역에서 호우 및 가뭄 증가가 나타난다고 한다.
2100년까지 전 지구 평균 온도 섭씨 1.5도 상승 제한을 위해 남은 잔여탄소배출총량(carbon budget)은 4,200-5,800억 CO2 톤이다. 따라서 2030년까지 2010년 대비 CO2 배출량을 최소 45퍼센트를 감축하고, 2050년까지 전 지구적으로 CO2 총 배출량이 순제로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1000억 – 1조 CO2 톤의 이산화탄소를 흡수해야 한다. 이외에 메탄(CH4), 에어로졸 등의 배출량도 줄여야 한다(IPCC 2018).
이렇게 인류의 삶 자체를 위협하는 기후 변화뿐만 아니라 생태계 전반의 파괴 속에 우리 인류가 새로운 지질학적 시대로 들어섰다는 인식은 인류세(Anthropocene)라는 문제틀을 낳았다(Curtzen and Stroermer 2000). 인류세는 인류가 주요한 지질학적 힘으로 등장한 시기로 “수많은 방식으로 인류가 지배하는 지질학적 시대”이다(Curtzen 2002). 인류세를 이전 시대와 구분되는 하나의 시대로 볼 수 있는 이유는 세 가지이다. 첫째,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 농도가 지난 4백만 년 사이에 가장 높으며, 온난화는 향후 1500만 년 동안 지구를 미지의 상태에 놓이게 할 것이다. 이 속에서 생물다양성의 멸종이 일어나고 있다(여섯 번째 멸종). 둘째, 대기의 구성을 인간이 변화시킴으로써 남극 얼음 핵을 비롯한 지표면에 여러 흔적을 남겼다. 이는 멸종부터 생물종의 이동에서 도시 및 인간 축조물까지 그리고 지구 온난화가 화산 활동과 지각 활동에 미친 영향까지 다양하다. 셋째, 지난 150년 동안 지구의 생태계에 축적된 완전히 새로운 물질이 있다(Bonneil and Fressoz 2016).
지난 1만 년 동안의 홀로세 시기에 기후가 안정되었던 것이 인류의 문화와 문명이 발흥할 수 있었던 조건이라고 한다면, 인류세는 이런 조건 자체를 변경시켰다. 이렇게 ‘인간의 조건’ 자체가 변화했다면, 우리의 인식과 정치 자체도 변화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인식과 관련해서 더 이상 자연과 인간을 구별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인식이 있다. 다시 말해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이건, 정복과 착취의 대상이건 자연은 인간과 떨어져 있지 않다(Büscher and Fletcher 2020). 정치와 관련해서 보자면 인류세를 낳은 여러 가지 힘(화석 연료 사용, 군사주의, 소비주의, 자본주의 등등)은 하나의 인류에게 동일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영향을 미치고 있고, 이를 둘러싼 갈등과 타협이 지난 200년의 역사였다(Bonneil and Fressoz 2016). 이런 갈등과 타협의 조건 자체가 바뀔 경우, 정치의 조건 자체도 변화할 수 있을 것이다.
생태적 전환의 기본소득
오늘날 기후 변화에 맞서는 가장 포괄적이면서도 ‘진보적인’ 정책이자 전략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 앞서 말한 (글로벌) 녹색 뉴딜이다. 다양한 판본의 녹색 뉴딜 전략이 있지만 크게 세 가지 내용을 중심으로 담고 있다. 첫째, 100퍼센트 재생에너지 체제(태양광, 풍력, 수력, 지열 등의 혼합)로 전환하여 탄소 배출 순제로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대략 GDP의 2퍼센트가 매년 투자되어야 한다. 둘째, 이 전환 과정에서 다수의 생활수준이 저하되지 않아야 하며,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되어야 한다. 셋째, 아래로부터의 주도성(initiative)이 중요하긴 하지만 대규모 투자와 동원을 위해 국가가 주요한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Pollin 2018; Pettifor 2019; 김병권 2020).
탈성장 지지자들은 녹색 뉴딜 혹은 녹색 성장에 대해 크게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하나는 녹색 뉴딜 지지자들이 전제하고 있는 경제 성장과 에너지 사이의 절대적 탈동조화가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비록 일부 지역과 일부 부문에서 이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인간 활동의 총량은 안전한 행성적 한계 안에 있어야 하며, 이 총량의 생태적 발자국은 이용가능한 생태계의 능력(biocapacity)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탄소만이 문제가 아니라 물, 공기, 숲, 농지, 어장 등 생산, 소비, 교역의 과정에서 영향을 받는 모든 것이 문제이다(Hickel and Kallis 2019).
첫 번째가 생태계의 하위 범주로서 경제를 바라보는 정상 상태 경제의 시선이라면, 두 번째 문제는 경제 성장의 동력에 관한 것이다. 대부분의 녹색 뉴딜 지지자들은 ‘녹색 케인스주의’의 관점에서 신자유주의의 (금융적) 이윤 추구를 비판하면서 에너지 전환, 실질적인 경제 성장, 완전고용 등을 조화시키려고 한다(Pollin 2018; Harris 2013). 이에 반해 일부 탈성장 지지자들은 자본주의 자체의 가차 없는 이윤 추구 경향은 새로운 이윤 형태를 발견하려 할 것이고, 자연자원을 포함한 생태계도 여기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자본주의와는 다른 생산방식, 예컨대 사회주의적 생산방식이 요청되는데, 이 생산방식은 지구의 생태계 능력의 범위 한계 내에서 인간적 필요를 만족시킬 수 있는 인간 능력을 전개한다는 원칙에 기초한 질서를 말한다(Burton and Someville 2019).
탈성장의 경향을 받아들이면서 사회적, 생태적 전환을 추구할 때 기본소득은 세 가지 측면에서 그 효과를 발휘하거나 필요한 요소일 수 있다: 정의로운 전환, 자율적 영역의 확대, 평등의 추구.
정의로운 전환과 관련해서 첫 번째로 제기되는 정책이 탄소 배출을 급격하게 줄일 수 있는 탄소세(+ 탄소캡)와 탄소 배당이다. 이는 탄소 배출 감축 목표량을 설정하고 이에 맞게 탄소세를 부과하는 것이며 설정한 목표대로 추진할 경우 상당한 수입이 발생하며, 또 그만큼 직접적으로 저소득층 비롯한 취약계층에게 부담이 된다. 이런 이유로 평등을 실현하면서도 생태적 전환을 위한 정치적 지지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탄소세/ 탄소 배당이다(조혜경 2019; Paul, Fremstad, and Mason 2019).
탄소세/ 탄소 배당이라는 정책은 ‘정의로운 전환’이라는 더 넓은 틀에서 보았을 때 그 의미가 분명해질 수 있다. 이때 정의로운 전환은 전환 과정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피해를 입지 않아야 한다는 소극적 의미에서 시작해서, 전환의 비용 혹은 대가를 누구 부담할 것인가 그리고 생태적 전환이 그동안 인류가 쌓아온 정의의 진보, 즉 차별 없고 더 평등한 사회로 가는 커다란 흐름 위에 놓여야 한다는 적극적 의미까지를 포함한다.
정의로운 전환과 관련해서 논의해야 할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산업 구조, 넓게는 경제 구조의 변화 속에서 나타날 일자리 축소와 상실의 문제이다. 다른 하나는 산업화된 지역과 그렇지 못한 지역 사이에 나타난 그리고 나타날 혜택과 부담의 불평등한 분배의 문제이다.
생태적 전환 혹은 환경주의에 대한 일부 노동조합과 노동자들의 반대는 잘 알려져 있다. 이는 ‘일자리 대 환경’이라는 대당으로 채굴 산업 등을 중심으로 여전히 강력하다. 하지만 21세기 들어서서 노동조합 운동 내에서 녹색 일자리의 창출이라는 의제로 환경 문제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움직임이 등장했다. 생태 전환을 위해 재생에너지 산업을 비롯한 녹색 산업을 육성하고 여기서 노동조합이 있는 제대로 된 녹색 일자리를 창출해야 한다는 것이다(Lawhon and MecCreary 2020; 래첼, 우제 2019; Gough 2017).
정의로운 전환으로서의 녹색 일자리 창출과 관련해서 두 가지 쟁점이 제기된다. 하나는 녹색 일자리 창출이 여전히 성장 패러다임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며 여기에는 ‘리바운드 효과’도 포함된다. 다른 하나는 성장 패러다임에 기초하고 있을 때, 여전히 필요할 수 있는 더러운 산업과 일자리는 개발도상국으로 이전함으로써 특정 국가(이른바 선진국 혹은 선진 지역)를 환경 친화적으로 만드는 또 다른 생태 제국주의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캘리포니아 효과’는 전 지구적 기후 변화에 맞서는 전 지구적 노력을 어렵게 할 것이다(래첼, 우제 2019). 최근 미국에서 크게 부상한 녹색 뉴딜은 그 판본에 따라 뉘앙스가 있지만, 성장주의와 자국 중심주의를 크게 벗어나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녹색 일자리 창출 혹은 일반적으로 일자리 보장 그 자체는 크게 보아 두 가지 난점이 있다. 하나는 이른바 녹색 성장이 괜찮은 일자리를 새로 창출한다 하더라도 이른바 완전 고용을 보장할 정도의 규모일 수 있는가이다. 이와 관련해서 최근 낙관적인 전망이 제시되고 있지만(Jacobson et al. 2019), 이른바 기술적 해고의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즉 자본주의의 경제적 엔진이 기능하는 방식에서 노동은 점점 덜 중요해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하비 2014). 다른 하나는 기존의 일자리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새로운 일자리로 부드럽게 이전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를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과 훈련 프로그램을 제공해야 하지만, 현재까지 이런 훈련 프로그램의 이행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가 있다(Selingo 2018).
녹색 일자리 창출인가 기본소득인가라는 대당은 노동시장과 기본소득의 관계에 대한 분석 더 나아가 자율적 영역의 확대라는 오래된 지혜의 문제로 이어진다. 이와 관련해서 기본소득이라는 경제적 보장이 노동자들의 발언권과 협상 위치를 강화한다(1), 이는 노동 조건의 개선 및 노동자의 지위 향상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2), 그렇지 않을 경우 노동시장에서 벗어날 수 있는(exit) 기반을 제공하기 때문에 더 생태적일 수 있는 자율적 영역의 확대(3) 혹은 사회적 경제의 번성(4)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3)의 주장은 경제적 보장으로 인해 사람들이 자율적인 시간을 선택할 수 있다는 근거에서 나온다. (4)의 주장은 에릭 올린 라이트의 ‘리얼 유토피아’ 프로젝트에서 제시하는 탈자본주의 혹은 사회주의로의 ‘공생적 전략’의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라이트 2012; 2019). 하지만 (3)와 (4) 모두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노동시장에서 벗어날 수 있고(거부할 힘), 새로운 활동을 찾을 수 있을(수용할 힘과 자유) 정도로 기본소득이 충분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또한 이는 아래에서 볼 것처럼 개인들의 생태적인 삶, 즉 탈소비주의적 삶을 살고, 공동체 경제 혹은 사회적 경제 활동을 새로운 지향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가정에 기초하고 있다. 사실 이는 새로운 사회경제적 주체성(Lawhon and McCreary 2020)의 형성에 내깃돈을 거는 일이라 할 수 있으며, 당연하게도 이는 문화적, 제도적 배치의 변화를 필요로 한다.
세 번째로 새로운 분배 패러다임으로서의 기본소득은 더 평등한 사회를 가져올 수 있는데, 더 평등한 사회일수록 성장주의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금민 2020). 이는 두 가지 근거를 가질 수 있는데, 하나는 탈성장의 관점에서 평등한 분배가 이루어질수록 물질적 부의 축소를 사회구성원들이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소비주의의 동력인 ‘과시적 소비’와 지위재의 추구를 약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Howard et al. 2019).
잠정적 결론과 남는 문제들
기후 변화로 인한 위기는 인류에게 생태적 전환이 시급한 과제라는 것을 말해준다. 하지만 지질학적 힘으로서의 인류가 가한 충격의 결과로 그 이전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새로운 인간 조건에서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내는 것뿐이다. 이 새로운 문명은 우선 인간과 자연의 분리불가능성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때 분리불가능성은 자연이 인간의 삶의 토대라는 의미를 넘어서서 인간이 자연에 끼어들어가 있다는 의미이다. 이는 살아 있는 존재들을 그 모든 차원에서 존중하면서 생태계를 옹호하는 것이며, 인간에게 그만큼의 책임성을 부여하는 일이다(Büscher and Fletcher 2020).
생태적 전환은 또한 사회적 전환일 수밖에 없다. 인류세의 시작을 16세기 근대 자본주의와 서양의 발흥에서 찾건, 지난 200년 사이의 화석 연료 자본주의에서 찾건, 아니면 더 올라가서 농경의 시작에서 찾건 인류 문명이 불의와 불평등과 함께 해왔다는 것을 감안할 때,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로의 진전 없이 생태적 전환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Bonneil and Fressoz 2016; Lewis, S. L. and Maslin, M. A. 2018).
개별적으로는 경제적 보장을 통한 자율성의 확대, 사회적으로는 더 평등한 소득 분배를 가능케 하는 기본소득은 사회적, 생태적 전환에서 주요한 정책 수단이자 구성부분일 수 있다. 또한 전환 과정에서 다수의 삶을 보장하고, 이를 기반으로 해서 정치적 연합을 형성할 수 있는 주요한 수단이기도 하다.
하지만 다른 정책 및 제도와 함께 어울려 적절한 배치를 이룰 때에만 기본소득은 사회적, 생태적 전환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때 당장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새로운 가치와 문화를 습득하는 교육, 기본소득 지급이 더 많은 시장 노동으로 이어지지 않게 하고 그 결과 초래할 수도 있는 불평등 경향을 막기 위한 노동 시간의 단축 등이다(Howard et al. 2019; Cieplinski et al. 2020).
이런 정책 및 제도에는 재원도 포함된다. 탄소세에 기초한 탄소 배당 혹은 생태 배당을 (부분) 기본소득으로 볼 수 없다는 견해가 있는데, 이는 그 목적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생태 배당은 전환을 위한 과도기적인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소멸하는 어떤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공유부에 기초한 기본소득도 그 공유부의 활용이 과도한 생태적 부담을 가져오지 않는 범위 내로 한정된 기초 위에서 설계되어야 한다.
이는 생태적 전환 과정 및 (추정컨대) 생태 사회에서 기본소득이 어떤 역할을 하는가라는 문제와 관련이 있다. 기본소득이 화폐 형태를 띤다는 것은 자본주의와 구별되는 교환의 장으로서의 시장의 필요성을 전제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장이 소비주의와 이윤 추구의 매개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시장 자체에 대한 적절한 규제뿐만 아니라 시장 외부, 즉 사회적 경제, 공유재(commons) 경제, 공공서비스의 적절한 배치를 필요로 한다.
이런 배치 속에서 기본소득은 ‘정의로운’ 사회적, 생태적 전환을 가능케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두 가지 문제가 남는다. 하나는 자연과 마찬가지로 ‘타자화’된 여성의 해방 그리고 이것이 함축하는 재생산의 적절한 위치 부여의 문제이다(Terreblanche 2019). 생태주의의 중심 내용인 생태중심주의(ecocentrism)에서 인류세라는 새로운 시대의 선포까지 생태 정치 혹은 녹색 정치는 자연과 구별되는 무차별적 ‘인간종’의 힘과 지위에 주목해 왔으며, 이는 의도했건 그렇지 않건 인간 사회와 역사에서 지속되어 온 차별과 불평등 및 이를 넘어서고자 한 투쟁을 주변화하거나 무화하는 효과를 가져왔다(Dobson, MacGregor and Torgerson 2009; Chakrabarty 2009). 이를 넘어서는 지구적 차원의 사회적 전환이 요청된다.
다른 하나는 생태적 전환을 위한 ‘인류 공동의 노력’을 가능케 하는 거버넌스 혹은 국제 연대의 구성 혹은 이를 넘어서는 새로운 주권체와 새로운 주체의 구성 문제이다. 이와 관련해서 기본소득이 어떤 대답을 할 수 있다면, 아마 그것은 오직 가능성(기후 X)일 것이다. 사회적, 생태적 전환으로 가는 기본소득의 모험은 여기에서 성패가 갈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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