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 토론 1. “기본소득의 정의” 발제문(초고)
기본소득의 정의와 공통부(공유부/공동부)
발제자: 금민 이사
I.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의 기본소득 정의에 대한 분석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는 기본소득을 “자산 심사나 노동에 대한 요구 없이 무조건적으로 모두에게 개별적으로 주어지는 정기적인 현금 이전”(BIEN, 2016)으로 정의한다. 이로써 기본소득인가 아닌가를 구분하는 지표는 현금 이전, 정기성, 무조건성, 보편성, 개별성의 다섯 가지로 제시된다. 이러한 정의의 실익은 기본소득을 다른 종류의 복지제도로부터 구분하고, 분류하며, 유형화한다는 점이다. 아래에서는 BIEN이 제시한 기본소득 정의의 장점과 한계를 분석적으로 뜯어본다.
1) 현금 이전
‘현금 이전’(cash payment)는 기본소득을 교육, 의료 등의 현물서비스와 구분하는 지표이다. ‘현금 이전’은 복지제도 중에서 기본소득을 현물서비스를 구분해 주는 종차(differentia specifica)이지만, ‘현금 이전’에는 다양한 방식이 있을 수 있으므로 ‘현금 이전’이라는 지표만으로 기본소득은 아직 채 정의되지 않았다. 기본소득은 특정한 방식의 ‘현금 이전’이며, 이 점에서 ‘현금 이전’은 종차일 뿐만 아니라 기본소득이 속한 류(Genus)이기도 하다.
– 그런데 정의는 유적 공통성을 밝히고 종차를 드러내는 서술 형식이다(definitio fi(a)t per genus proximum et differentiam specificam). 따라서 다양한 ‘현금 이전’ 중에서 기본소득만의 종차를 드러내어야 정의는 완결되며, BIEN은 이를 위해 정기성, 무조건성, 보편성, 개별성이라는 네 가지 지표를 제시한다.
2) 정기성
기본소득은 ‘정기적인 현금 이전’이다. 정기성에 의하여 기본소득은 성년에 도달할 때 일회적인 종자돈의 형태로 지급되는 ‘사회적 지분급여’(stakeholder grants)와 구분된다. 하지만 기본소득만이 ‘정기적인 현금 이전’의 유일한 형태인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현대 복지국가가 등장하기 이전부터 내려온 공공부조도 ‘정기적인 현금 이전’이다.
– 따라서 기본소득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나머지 세 가지 지표, 곧 무조건성, 보편성, 개별성을 제시하여야 한다. 무조건성, 보편성, 개별성은 기본소득 정의를 이루는 가장 핵심적인 지표이다. 세 지표는 현존하는 복지국가의 공적 이전소득(public transfer income)과 기본소득의 차별성을 보여준다.
3) 무조건성, 보편성, 개별성
BIEN은 무조건성을 노동의무나 노동의사에 대한 심사가 없는 것으로 설명하며, 반면에 보편성은 자산 심사가 없어서 모두에게 지급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기본소득은 일자리 여부나 노동 의사의 확인이 없고 자산 심사가 없다는 특징으로 오랫동안 ‘무조건적 기본소득’(Unconditional Basic Incoem)으로 불렸고, 조건적인 지원으로부터 무조건적인 배당으로의 이행은 18세기 말 토마시 페인의 기본소득 혁명의 전과 후를 나누는 기준이기도 하다. 무조건성을 일자리 여부와 노동 의사에 대한 심사와 연관시키고 보편성을 자산 심사와 연관시킨 설명 방식은 혼동을 나을 수 있다.
– 또한 종차를 드러내는 정의 방식은 기본소득과 현존하는 다른 제도의 차별성을 알려 주기 위한 것인데, 무조건성과 보편성을 이렇게 구분하는 것은 큰 실익이 없다. 자산 심사는 있지만 노동 의사 확인은 없는 ‘정기적 현금 이전’은 제도화되어 있지 않다. 노동 의사를 확인하지만 자산은 심사하지 않는 제도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한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들에서 예를 들어 0에서 7세 또는 65세 이상 등 특정 연령에게만 지급하는 유형을 ‘범주형 기본소득’(Categorical Basic Income)이 등장했는데(Van Parijs and Vanderborght, 2017: 158-162), ‘범주형 기본소득’은 범주 내에서는 무조건성, 보편성, 개별성을 충족시키지만 범주 외부에는 어느 요건도 충족시키지 않는다. BIEN의 보편성 지표는 “자산 심사 없이 모두에게 지급된다”는 특징인데 ‘범주형 기본소득’은 자산 심사가 없지만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지급되지 않는다. ‘범주형 기본소득’은 BIEN의 보편성 지표가 준별적 기능을 약화시킨다는 점을 보여준다.
– 무조건성 지표를 자산 심사 및 일자리 여부, 또는 노동 의사에 대한 확인이 없다는 것으로 확대하고, 보편성 지표는 BIEN 홈페이지에 등장하는 자산 심사를 빼고 ‘모두에게 지급된다’만을 내용으로 삼는 것이 유익하다.
– 20세기 복지국가의 이전지출은 ‘기여의 원리’에 따른 사회보험(social insurance)을 한 축으로 하고 ‘필요의 원리’에 따른 공공부조(public assistance)를 다른 한 축으로 하고 가계를 단위로 지급되었다. 무조건성 지표는 ‘기여의 원리’나 ‘필요의 원리’와 다른 원리를 담고 있다. ‘무조건적 정기적 현금 이전’으로서 기본소득은 모든 이에게 지급될 수밖에 없다.
– 가구 단위가 아니라 개별적으로 지급된다는 특징도 기본소득의 정의를 구성하는 종차이다. 현존하는 복지 국가의 공공부조가 가구 단위로 지급되기 때문에 개별성은 준별적 기능을 가질 수 있으며, 앞으로 무조건적 보편적 정기적 현금 이전이 등장하더라도 가구 단위로 지급되는 것은 기본소득과 유사한 제도이지만 기본소득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도록 한다.
II. BIEN의 기본소득 정의의 공백
1) 충분성은 정의를 이루는 지표가 될 수 있는가?
– 기본소득의 유형을 생계수준을 기준으로 그 이상의 액수를 지급하는 충분기본소득(Full Basic Income: FBI)과 그 이하의 액수를 지급하는 부분기본소득(Partial Basic Income: PBI)으로 구분하기도 한다(Fitzpatrick, 1999; 36). 이러한 구분은 딱 최소생계비만큼을 지급하는 생계수준 기본소득(subsistence-level basic income) 개념을 설정할 수 있도록 해 준다. 하지만 지급수준이 어떠하든지 모두 무조건적(Unconditional), 보편적(Universal) 개별적(Individual), 정기적(Periodic) 현금 지급(Cash Payment)이라는 점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 많은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많은 지역의 네트워크들은 충분성을 기본소득의 지표로 삼는다. 이 때 충분성은 생계수준 기본소득 이상의 지급수준을 의미하며 ‘해방적 기본소득’으로도 불린다. 반면에 BIEN은 충분성은 기본소득에 대한 분석적 지표일 수 없으며 정책 목표일 뿐이라는 입장이며, 생계에 충분하며 문화적 정치적 참여가 가능한 지급수준을 목표로 함을 2016년에 정책결의로 밝히지만 지급수준이 낮은 부분기본소득(Partial Basic Income: PBI)부터 출발하는 것에도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기본소득의 도입으로 현존하는 복지혜택이 축소되는 계층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유보조항을 분명히 한다. 충분성을 정책 목표의 문제로 접근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충분성을 기본소득 정의에 포함시키는 것은 류와 종차를 드러냄으로써 최소한의 분석적 정의만을 제시하려는 목표에 들어맞지 않는다.
2) 지급주체와 수령권자의 공백
– 하지만 BIEN의 정의에는 대단히 큰 공백이 있다. BIEN의 정의는 현금 이전 방식의 특징을 분명히 드러내 주지만, 단지 이전 방식만을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공백이 있다. 첫 번째 문제는 현금 이전에서 지급주체는 누구이며 수령권자는 누구인가라는 것이다. 두 번째 문제는 기본소득의 원천은 무엇인가, 곧 지급되는 현금의 성격에 관한 문제이다.
– BIEN이 지급주체와 수령권자에 대해 명확히 하지 않는 것은 일정한 의의가 있다. 이전의 홈페이지에서 지급주체는 ‘정치공동체’로 되어 있었지만, 현재의 홈페이지의 ‘정의’ 부분에 ‘정치공동체’라는 표현은 빠졌다. 물론 ‘정치공동체’에는 지자체나 국민국가만이 아니라 유럽연합이나 글로벌 기본소득의 주체가 될 유엔 등도 포함시킬 수 있기 때문에, 로컬, 내셔널, 글로벌 차원에 대해 열어두기 위하여 ‘정치공동체’라는 표현을 피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정치공동체’라는 표현을 회피함으로써 얻게 되는 효과는 기본소득을 전체에서 개별로의 현금 이전이라고 할 때 바로 그 전체의 사회적 형태, 구체적으로는 소유형태에 대해 열어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전체는 공적소유(public ownership) 형태일 수도 있으며 공동소유(common ownership)일 수도 있다. 국가가 공공소유 형태로 가지고 있지만 사회배당 형태로 ‘무조건적, 보편적, 개별적, 정기적인 현금 이전’을 할 수도 있으며(예컨대 J. Meade의 모델), 공공소유 방식을 아예 취하지 않으며 일종의 공동소유(common ownership)로 공통부기금이 지급주체가 될 수도 있다. BIEN이 제시한 기본소득 정의는 이 점에서 대단히 생산적인 공백을 남기고 있다. 공적 소유자로서의 국가가 아니라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더라도 조세로 재원을 조달할 수 있는 조세국가가 지급주체가 되는 조세형 기본소득도 당연히 이러한 정의에 부합된다.
– 반면에 재원의 성격을 밝히지 않는 점은 기본소득의 정당화를 효과에 의한 결과론적 정당화(consequentialist justification)으로 좁혀 버리는 난점을 가진다. 무조건성, 보편성, 개별성은 현존하는 복지체계의 현금 이전과 기본소득의 준별성을 분명히 보여줄 수 있지만 왜 이와 같은 이전방식이 정당한가를 설명해 주지 못한다. 따라서 이와 같은 이전 방식이 변화된 현실에 적합하며 사회 전체에 이익이 되고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에 효과적이라는 논증이 필요하게 된다. 물론 기본소득론은 이와 같은 논증을 우회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러한 논증은 무조건적, 보편적, 개별적 현금 이전방식의 본래적인 정당성을 설명해 주지 못한다. 본래적인 정당성은 오직 기본소득의 원천이 공통부 수익이라는 점을 확인함으로써 부여된다.
III. 공통부(공유부/공동부) 개념과 기본소득 정의
1) 기본소득 정의를 이루는 지표로서 무조건성, 보편성, 개별성과 공통부 개념의 논리적 대응관계
기본소득을 특유한 현금 이전방식, 곧 소득의 특유한 분배방식으로 본다면 개별성, 보편성 무조건성은 그러한 특유함의 지표이다. 공통부 개념은 이러한 지표를 가장 간명하게 정당화한다. 공통부 수익이란, 예를 들자면 원래 모든 사람에게 속한 자연적 공유자산의 수익 또는 지식공유자산을 비롯한 인공적 공유자산의 수익처럼 누가 얼마만큼 기여했는지를 따질 수 없고 어떤 특정인의 성과로 귀속시킬 수 없는 수익이다. 즉 발생하는 수익이 어떤 특정인의 몫이 아니라 모두의 몫이라는 점이야말로 공통부의 개념적 특징이다. 이러한 개념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공통부의 분배에 조건을 달고 선별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게 된다. 누구의 몫으로도 귀속시킬 수 없는 한에서 공통부는 무조건적, 보편적, 개별적으로 모두에게 동등한 몫으로 분배될 수밖에 없고, 오직 그럴 경우에만 정의로운 분배가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점에서 무조건성, 보편성, 개별성이라는 핵심 지표와 공통부 개념은 논리적 대응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2) 소유형태에 대한 중립성
– 공통부 개념은 소유형태에 대해 중립적이다. 공유부는 공동소유만이 아니라 사적 소유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 물론 사회 전체의 공동소유의 경우에는 사회구성원 모두가 공동소유자이기에 수익을 모두에게 동등하게 배당한다는 것은 매우 당연한 결과이다. 하지만 사유재산권에 입각한 수익이라도 그 성격상 특정 개인이나 기업의 성과로 볼 수 없고 사회적 공통자본에 의한 외부효과(external effect)에 의해 발생한 것이라면 공통부로 보아야 한다. 20세기 복지국가가 물려준 조세제도는 사유재산권이 지배적인 상태에서도 공통부 수익을 원천적인 공유자(commoner)에게 되돌려 줄 가능성을 부여한다. 사유재산제도의 법적 형식에 기대어 사적으로 전유되고 있는 공통부 수익을 정치공동체가 조세로 환수하여 구성원 모두에게 동등하게 분배한다면, 사유재산제도의 틀을 유지하면서도 공통부 수익의 동등한 배당이 가능할 수 있다. 조세형 기본소득에서 조세는 공통부의 환수 수단이며, 무조건적, 보편적, 개별적 현금이전, 곧 기본소득은 환수된 공통부를 분배하는 가장 정당한 방식이다. 정리하자면, 공통부란 소유형태와 독립적으로 공동의 몫으로 되돌려야 할 수익을 뜻하며, 설령 사적 소유의 수익이더라도 모두에게 되돌려야 할 몫을 뜻한다.
당연하게도, 조세형 기본소득만이 공통부 배당을 실현하는 유일한 방법인 것은 아니다. 조세를 매개로 하지 않는 직접적인 공통부 배당 방식이 있을 수 있다. 즉 기본소득의 원천인 공통부의 법률적 소유권 형태가 사회구성원 모두의 공동소유(common property)인 경우도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이때 공동소유란 국가 등 정치공동체의 소유인 공적 소유(public property)와 달리 개별적 사회구성원 모두가 공동소유자인 소유형태를 뜻한다. 여기에서 공적 소유와 사회구성원 모두의 공동소유의 구별을 강조하는 이유는 공동소유의 수익은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무조건적, 보편적, 개별적으로 평등하게 배당되어야 하지만, 공적 소유의 수익이 반드시 이렇게 배당되어야 할 논리적 필연성은 없기 때문이다. 공적 소유의 이익에 대한 처분권은 국가나 정치공동체가 가지며 이를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조건 없이 평등하게 배당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국가나 정치공동체의 결정에 따르게 된다. 오히려 역사적 경험과 사회적 현실은 공적 소유와 기본소득이 연동되지 않는다는 정반대의 사실을 보여준다. 지금도 자본주의 사회의 공기업은 이익을 시민들에게 균등하게 배당하지 않으며, 20세기의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국가소유의 수익은 국민들에게 기본소득으로 배당되지 않았다. 사회구성원 모두의 소유로서 공동소유는 현실에 존재하는 공적 소유와 다르다. 조세형 기본소득이나 공동소유형 기본소득만이 공유부 배당의 실현방식인 것은 아니다. 공동소유와 사적 소유의 혼합형태도 공유부 배당을 위한 법률적 소유형태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일찍이 제임스 미드(Meade, 1989: 38, 40)가 제안했듯이 모든 주식회사의 지분 일부를 사회구성원 모두가 보유하고 이로부터 사회구성원 모두가 동등한 배당을 받는 방식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소유형태는 공유지분권 모델이라고 부를 수 있다. 공동소유형 기본소득이든, 공유지분권 모델이든, 또는 조세형 기본소득이든 모든 유형의 기본소득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분배 원칙은 공유부의 평등한 배당(equal share from common wealth)이다. 일차적으로 이 원리는 소유권에 대해 중립적인 소득분배의 규제 원칙(regulative principle of income distribution)으로 이해될 수 있다. 어떠한 유형이든 기본소득은 공유부 분배정의(distributive justice of common wealth)를 실현한다.
3) 공통부 개념은 지급수준에 관한 논란의 해법
공통부 개념은 기본소득 정의에서 지급수준 문제를 제외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공통부 수익이 GDP의 25%라면 25%를, 10%라면 10%를, 90%라면 90%를 무조건적, 보편적, 개별적으로 분배하면 된다. 지급수준은 공통부 수익의 크기에 연동된다. 굳이 지급수준에 관한 지표를 기본소득의 정의에 포함시킬 필요가 없다. 이는 논리적으로 명확한 것이지만, 현실에서 무엇이 공통부이며 어느 정도가 공통부 수익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단순히 과학의 몫이 아닐 수 있다. 그것은 바루파키스(Yanis Varoufakis)가 강조하듯 정치의 문제일 수 있고, 따라서 지급수준은 기본소득 정의의 구성 요소가 아니라 정책 목표로 간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