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 온라인매체 <프레시안>에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릴레이 기고”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기고를 통해,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이사와 운영위원을 비롯한 여러 회원들이 다양한 시각에서 기본소득 옹호론을 펼칠 예정입니다. 아래 글은 2020년 8월 28일, 안효상 상임이사의 여섯 번째 릴레이 기고문입니다.

재난지원금 ‘선별 지급’ 논의에 대하여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릴레이 기고] 선별의 효과는 과연 있는가?

안효상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상임이사)

바흐의 교회 칸타타 “통곡하며, 슬퍼하며, 걱정하고, 두려워함”이 떠오르는 시절이다. 가까운 사람을 바이러스로 잃은 사람들은 통곡하며, 슬퍼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있다.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이 어떻게 될지.

불확실한 것만이 유일하게 확실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그만큼 확실한 것은 팬데믹이 언젠가는 끝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불확실한 것은 팬데믹 이후에 우리는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인가이다.

그저 우연만은 아니겠지만 코로나바이러스의 재확산과 제2차 재난지원금 논의가 겹치고 있다. 지금 상황이 당장 경제 활동이 활발해지기 어려운 상황일 뿐만 아니라 몇 달 전에 시작된 경제적 충격이 더 심하게 느껴지는 시기이기 때문에 재난지원금의 필요성은 누구나 당연시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 당연시되지 않던 것이 당연시되는 시절이다.

실제로 지난 제1차 재난지원금이 모두에게 지급된 것은 누구나 인정하듯이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보건의료 위기 그리고 이로 인해 발생한 경제 위기라는 사태의 충격과 긴급성 때문이었다. 물론 이런 식의 충격, 즉 팬데믹이 올 수 있다는 경고는 최소한 10년 전부터 있었다. 새로운 병원체의 기원과 전파의 패턴을 연구한 과학자들의 조심스러운 표현을 쓰자면 이런 질병은 주로 인간이 일으킨 변화, 즉 농업, 여행 경로, 무역의 확대, 토지 이용의 변화에 의해 추동되었다(Morse, 2012). 좀 더 급진적인 사회과학적 분석과 정치적 판결을 사용하자면 바이러스의 독성이 강화되고 다양해진 것은 이윤 추구를 위한 이른바 ‘축산 혁명’에서 비롯되었으며, 특히 신자유주의 하에서 노동 차액 거래와 토지 차액 거래를 추구하기 위해 생산 지역이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로 이동한 것과 관련이 있다.

물론 글로벌 사우스에서 생산된 상품은 글로벌 노스(global north)에서 소비될 뿐만 아니라 이 과정에서 생겨난 이윤도 글로벌 노스에서의 자본 축적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런 상품과 가치의 연쇄는 물리적 고갈과 생태적 파괴를 낳았고, 이것이 다시 경제적 가치의 흐름을 중단시키는 효과를 낳았다(월러스 2020; Foster and Suwandi, 2020). 이런 위기에 맞서고자 하는 흐름은 녹색 자본주의와 녹색 뉴딜에서 탈성장론 혹은 포스트성장론까지 여러 가지가 있다. 이때 공통의 인식 기반은 ‘생태적 한계’이지만 그 한계가 어디인지, 인간의 기술과 조직이 이 한계를 제대로 다룰 수 있는지를 둘러싼 쟁점이 그 사이에 있다. 그리고 코로나바이러스 위기는 그 한계를 좀 더 뚜렷하게 만드는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바이러스 위기 동안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이후, ‘포스트코로나’ 시대에도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인식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뉴노멀’을 말하는 것이 노멀이 되었다. 재난지원금이 모두에게 지급된 것은 이런 상황 속에서였다. 물론 여기에는 최근 십 년 동안 벌어진 복지 운동과 복지에 대한 인식의 변화, 몇몇 신심어린 정치가와 정책가들의 노력도 있었다. 그리고 총선도 빼놓을 수 없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럼에도 코로나바이러스 자체가 의식 없는 주체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의식 없는 주체이기에 바이러스가 인간 사회를 어떻게 바꾸겠다는 목적이 없다는 것도 분명하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자연재해와 인재를 구분하긴 하지만 모든 재해는 인재를 포함한다. 예를 들어 과거에 수많은 사람들의 아사로 이어진 가뭄은 특정 지역의 연평균 강수량이 감소한 것으로 정의되는 기상학적 가뭄과 어떤 방식으로든 농작물을 살릴 수 있는 만큼 충분한 수량을 확보하지 못할 때 발생하는 수문학적 가뭄으로 나눌 수 있다. 수문학적 가뭄은 인공 관개 시설에 해당 사회가 얼마나 투자하고 관심을 기울였는지 그리고 자연적 물 비축 능력의 경우 인간이 환경을 얼마나 파괴했는지 아니면 보존했는지에 영향을 받는다.

더 나아가 가뭄으로 인한 기근이 발생했을 때 그 사회가 어떤 패러다임과 메커니즘 속에서 운영되고 있는지가 구제에 영향을 미친다. 빅토리아 후기 인도를 비롯한 중국, 브라질 등지에서 발생한 가뭄과 대기근으로 인해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아사한 것은 엘니뇨라는 자연 현상에 더해 식민지를 자유시장과 자유주의와 공리주의의 실험장으로 만든 제국주의가 빚어낸 또 다른 홀로코스트였다는 주장은 이런 점에서 설득력이 있다(데이비스, 2008).

코로나바이러스 위기는 두 가지 점에서 인재라 할 수 있다. 하나는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위기가 인간의 활동이 낳은 환경 파괴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자연의 복수’). 다른 하나는 이런 위기가 발생했을 때 적절하게 대처할 수 없게 만든 지금 사회의 구조와 운영 방식 때문이다.

특히 후자는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지난 몇 십 년 사이에 진행된 사태의 결과이다. 나라와 지역마다 차이는 있지만 저스트인타임(Just-In-Time)과 글로벌 공급 사슬이라는 말로 대표되는 취약한 경제 네트워크, 영시간 계약과 대기(on-call) 노동으로 상징되는 불안정한 노동, 공공 의료 및 돌봄 체계의 취약성, 코로나바이러스 위기 같은 위험에는 대처하기 어려운 사회보험 체제 등등.

만약 여기에 또 다른 인재가 덧붙여진다면 코로나바이러스 위기는 과거에 겪었던 가뭄과 기근과 아사에 맞먹는 재앙을 불러올 수도 있다. 그 재앙은 ‘이 위기에 어떻게 대처하는가’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코로나바이러스 위기에 대한 대처가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아직 결정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제2차 재난지원금 논의를 보면 우리는 여전히 바이러스 이전(ante-virus)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여러 보도에 따르면 정부는 재난지원금을 ‘선별 지급’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재정 여력이 없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앞의 이유의 연장선에서 이른바 취약계층에 집중하는 게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재정 여력이라는 담론의 문제점은 이미 최근 몇 달 간 ‘기본소득 논쟁’에서 지겹게 다룬 바 있다. 우선 지출만 말하고 수입 측면은 말하지 않는 것이 재정 여력 담론의 첫 번째 문제이다. 사회 전체가 함께 만들어낸 부를 어떻게 적절하게 모으고 배분할 것인지라는 틀에서 재정 여력이 이야기되어야 하며, 따라서 조세 개혁은 피할 수 없는 과제이다. 다음으로 특정 시점에서 부채를 져야 한다면 국가가 지는 공적 부채가 사람들의 삶을 살리고 사회를 안정시킬 수 있는 방법이다. 물론 우리는 지난 수십 년 간 신자유주의라는 이름 하에 소수 부유층과 권력자들에게는 세금을 깎아주고, 다수는 저임금과 불안정한 노동 조건에 몰아넣어 사적인 부채에 의존하게 만드는 상황을 목격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무엇이었는지도 알고 있다. 이제 이런 상황은 바뀌어야 한다. 끝으로 재난지원금은 버리는 돈이 아니라 소비에서 시작해서 경제의 흐름 속에 놓이는 돈이다. 이런 이유로 재난지원금은 구제 정책이 아니라 경제 정책이라는 주장을 할 수 있다.

다음으로 한정된 자원을 모두에게 주는 것보다 취약계층에게만 몰아주는 게 더 효과적이라는 주장을 살펴보자. 이 문제는 앞의 재정 여력이라는 문제를 해결하면 절반쯤은 해결된다. 한정된 자원이라는 전제가 성립하지 않으면 결론도 달라질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따져볼 문제는 남는다. 그것은 선별의 효과이다. 지난 번 제1차 재난지원금 실시 때도 나왔던 것이지만 50퍼센트, 70퍼센트 같은 식의 수치를 정해놓고 사람들을 선별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낭비적이다. 게다가 낙인 효과가 발생할 것이고, 사회적 갈등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재난지원금이 일시적인 것이고 우리가 다시 ‘정상’이라고 말하는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면, 여러 문제가 있어도 선별 지급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하지만 앞서도 말한 것처럼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처럼 사태는 그렇지 않을 것 같다.

재앙의 영어 단어인 catastrophe는 ‘뒤집어지다’라는 뜻에서 왔다.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 재앙은 두 가지 점에서 뒤집어지고, 뒤집어지기를 요구하고 있다. 우선 앞서 말한 것처럼 정밀한 분석에서는 차이가 있겠지만 팬데믹이 지금까지 ‘정상적’이라고 생각했던 인간 활동의 효과라고 본다면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삶을 뒤집은 셈이다. 그리고 다시 과거의 정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 ‘뉴노멀’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삶을 제대로 뒤집어야 한다.

재난지원금을 얼마나, 누구에게, 어떤 목적으로 지급할 것인지를 둘러싼 논의도 이런 사정(portée) 속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때 논의를 둘러싼 가장 큰 배경은 전염병 역사를 연구한 윌리엄 맥닐이 말하는 것처럼 “창의력과 지식, 조직이 아무리 진보했다 해도 기생생물의 침입에 인류는 확실히 취약한 존재이며…전염병은 앞으로도 인류와 운명을 함께할 것”이라는 점이다(맥닐, 2005). 하지만 덧붙여야 할 것은 생태적 한계는 우리에게 그 자체로 나타나지 않고 갈등 속에 움직이는 사회적 그물망을 통해 굴절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재난지원금 논의가 통과한 그물망의 한쪽에는 이렇게 쓰여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은 존엄하며, 모두에게 생존의 권리가 있으며, 모두는 민주적인 정치공동체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

재난지원금을 기본소득 방식으로, 즉 모두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개별적으로 지급해야 한다는 우리의 주장은 이를 겨냥한 것이다. 바흐의 교회 칸타타는 이렇게 끝난다. “신이 하신 일은 모두 이루어졌다네.” 과연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어떻게 끝날 것인가?

참고문헌

데이비스, 마이크 (2008). <엘니뇨와 제국주의로 본 빈곤의 역사>. 서울: 이후.

맥닐, 윌리엄 (2005). <전염병의 세계사>. 서울: 이산.

월러스, 롭 (2020). <팬데믹의 현재적 기원>. 서울: 너머북스.

Foster John Bellamy and Intan Suwandi (2020). “Covid-19 and Catastrope Capitalism.” Monthly Review.

Morse, Stephen S et al. (2012). “Prediction and prevention of the next pandemic zoonosis.” Lancet, 380: 9857, 1956-19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