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 온라인매체 <프레시안>에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릴레이 기고”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기고를 통해,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이사와 운영위원을 비롯한 여러 회원들이 다양한 시각에서 기본소득 옹호론을 펼칠 예정입니다. 아래 글은 2021년 2월 6일, 안효상 상임이사의 릴레이 기고문입니다.


기본소득을 알래스카만 한다?…so what?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릴레이 기고]

안효상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상임이사)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맴돌긴 하지만, 가슴 속에 어떤 마음이 있긴 하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언어가 얼마나 희박한지를 느낀다. 하지만 한 마디 말 속에서 너무나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때 우리는 언어의 과잉을 느낀다.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4월 2일 교섭단체 대표 연설 뒤에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기본소득에 대해 “알래스카를 빼고 그것을 하는 곳이 없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바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짧은 말 속에 다른 어떤 의미가 또 있을까?

사실 표면적인 의미는 아주 간단하다. 기본소득이라고 뭔가 대단한 것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 어디에도 이런 제도를 실시하는 곳이 없다, 알래스카를 제외하고, 그러니 이건 할 만 한 어떤 것이 아니다. 기본소득은 안 된다는 것을 말하는 간단한 입증 방식이다. 알래스카만이 기본소득을 하고 있다는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점은 나중에 다루기로 하자. 이 말의 저 밑바닥에는 좀 더 착잡한 마음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보인다. 지난 백 년 이상 이 땅을 떠돌고 있는 유령인 식민지적 심성 말이다.

1876년 강화도 조약부터 1997년 외환위기까지 백 년 이상 이 땅에서는 (민중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삶에서 나오는 저항을 제외하고) ‘우리 것’은 뒤떨어진 것이고, 발전한 것 그리고 좋은 것은 서쪽에 있다는 의식이 지배했다. 물론 한국만 그런 것은 아니다. (반)식민지를 경험한 모든 지역이 동일하게 착잡한 경험을 했다. 19세기 라틴아메리카 시인들은 다락방이라도 파리에서 시를 쓸 수 있다면 한이 없겠다는 생각으로 창작 활동을 했다. 아시아의 유일한 제국주의 나라로 등장한 일본의 국민작가 나쓰메 소세키조차 2년 동안의 런던 유학 시절 일본과 서양의 격차를 느끼며 고통스러워했다고 한다. 그리고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라는 김수영의 노래를 곧이곧대로 들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물론 우리 것이 언제나 물러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어떤 정통성도 그 어떤 방향성도 없는 이 땅의 지배 엘리트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것을 불러내는 주술을 부렸다. 박정희의 민족적 민주주의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젊은 학생들은 1964년 5월 20일 ‘민족적 민주주의의 장례식’으로 여기에 응답했다.

콤플렉스라는 식민지적 심성은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이후 냉전 속에서 근대화의 추격발전이라는 방향성을 가지게 되었다. 이 지면이 한국 현대사를 어떻게 산업화와 민주화의 성공이라는 틀로 설명할 수 있는지 그 동력은 무엇인지를 따지는 자리는 아니기 때문에 다른 기회에 다른 사람에게 미루어야겠다. 어쨌든 그 콤플렉스를 승화시켜 우리는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했다!

하지만 산업화와 민주화의 한 순환이 끝난 지도 시간이 꽤 흐른 지금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여기서 우리를 괴롭히지만 냉담하게 다가오는 숫자를 나열할 생각은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우리 사회가 쪼개져 있다는 것, 심각한 안팎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것이다. 이때 위기는 그저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위기는 뭔가를 결정하는 시점이라는 점에서 기회라고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결정의 어떤 방향성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진정한 위기가 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람시의 말을 제대로 인용해보자면, 낡은 것은 사라졌는데, 새로운 것은 나타나지 않았다는 데 진정한 위기가 있다. 하지만 우리가 겪고 있는 위기는 낡은 것이 사라지지 않고 새로운 것이 나타나는 것을 막고 있다는 것에도 있다. 이유가 뭘까? 왜 지금 여기의 문제를 보지 못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찾지 못하고 도리어 해결책이 문제가 되는 것일까?

그것은 북극성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콤플렉스를 승화시켜 추격해야 할 별이 이지러졌다. 누가 지금 자유, 민주주의, 번영이라는 자신의 약속도 지키지 못하는 미국을 쳐다보겠는가, 새로운 야만인의 침입 속에 안팎에 새로운 장벽을 세우는 유럽이 그 자리를 대신하겠는가? 그렇다고 중국이! 물론 현재의 위기 속에서 각자가 가진 전통과 원칙 속에서 새로운 방향을 찾으려 하는 이들의 노력을 폄훼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런 전통도 원칙도 없는 우리가 문제일 뿐이다. 그러니 새로운 문제를 두고 과거의 황금시대, 그것도 저들의 황금시대를 떠올리는 게 유일하게 우리에게 가능한 일이라는 사실에 가슴이 아플 뿐이다.

과거의 황금시대가 너무 빛나서인지, 새로운 길을 찾으려는 작은 별들이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석유가 기본소득의 연료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는 알래스카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기본소득 실험과 정책이 펼쳐졌고, 지금도 시행되고 있다. 또한 새로운 제안들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체로키 부족이 하고 있는 현금 배당은 1996년에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마카우도 영주권자에게 매년 현금 배당을 하고 있다. 브라질의 작은 도시 마리카는 연대 경제 실현을 목표로 전체 주민의 1/4에 해당하는 42,000명에게 ‘시민 기본소득’을 지역화폐로 지급하고 있다. 또한 미국 캘리포니아 주 스톡턴 시는 ‘경제적 역량 강화’를 위한 보장소득 실험을 하고 있으며, 독일은 기존의 ‘나의 기본소득’을 확대하여 앞으로 3년 간 실험을 할 예정이다.

과거 1970년대 미국과 캐나다에서 시작해서 21세기 들어 나미비아, 인도, 핀란드, 케냐까지 이어진 여러 기본소득 실험은 일일이 열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다만 꼭 언급해야 할 것은 스위스의 ‘탄소부담금-탄소배당’이다. 탄소배당은 그 자체로 기본소득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기후위기에 맞서 탄소중립을 달성하기 위해 기본소득 방식을 도입한 것으로 탈탄소화에 가장 효과적인 방책이다(정원호, “탄소중립 하려면 스위스를 보라,” 프레시안 2021. 01. 12).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면 이낙연 대표의 논증방식의 거울상이 될 것 같다. 게다가 예들이 지배적인 것도 주류적인 것도 아니니 이낙연 대표에게 그다지 설득력이 있을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이런 예들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이들이 길을 찾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는 것이다.

안으로 눈을 돌리면 2016년의 성남시 청년배당, 2019년 경기도 청년기본소득이 있다. 안타깝게도 지방자치단체의 권한과 예산 제약 속에서 시행되고 있기 때문에 매우 제한적이라 할 수 있지만, 수급자들의 의식 변화, 지역화폐로 지급되었기 때문에 나타난 지역 경제 활성화 효과 등은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 더해 좀 더 의미 있는 수준의 기본소득을 지급하고, 여러 다른 정책과 결합하여 지역 주민의 삶의 향상과 농촌 살리기를 목표로 하는 농촌기본소득 실험이 예정되어 있다. 이는 위기의 시대에 아도르노적 의미에서 시도(essai)이다.

이런 시도인 기본소득은 이낙연 대표의 말처럼 복지제도의 대체재가 아니라 새로운 복지 모델의 방향이자 원칙이다. 기본소득은 (남성) 노동자의 전일제 노동과 사회보험에 주로 의존했던 체제에서 벗어나 누구나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물질적 토대를 제공하자는 것이다. 이에 따라 성장의 강박에서 벗어나 생태적 사회로 전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 수 있다. 사회적 부가 모두의 존재와 활동에 기초해 있다는 것을 인정해서 모두에게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 기본소득의 원칙이다. 누누이 말하지만 기본소득에 반대할 경우 자연적, 인공적 공유부를 특정 소수가 독점해도 좋다는 것을 입증하면 좋겠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기본소득에 대한 공격과 폄훼가 순수하게 아이디어와 정책만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하긴 브레히트가 말했듯이 이성의 승리는 이성적인 사람들의 승리이니 말이다. 하지만 의아한 것은 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정치적인 것’의 적대를 절대시하는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적대가 정치의 조건이긴 하지만 정치는 인간의 공존을 조직하기 위해 특정한 질서를 수립하려는 인간 활동의 여러 차원을 가리킨다. 물론 이런 활동은 경합적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경합의 틀을 만들고 윤리를 확보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이해할 생각조차 없이 무조건적으로 여성주의 담론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상황에 맞서는 <더 나은 논쟁을 할 권리>(김은실 외, 휴머니스트)를 차용해 법학자 이다혜는 “기본소득에 대한 ‘더 나은 논쟁을 할 권리’”을 말한다(긱셀렉트, 2020. 09. 16). 경합(agonistics)이라는 고통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 말뜻의 하나인 모이는 일이 필요하기 때문인데, 이를 위해서는 자기 것을 드러내고, 상대방의 것을 알려는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에만 “대립은 진정한 우정”이라는 블레이크의 말이 가능할 것이다. 이낙연 대표가 제시하는 ‘신복지제도’가 그런 우정의 초대장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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