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성남시의회에서 국민의힘 의원들을 중심으로 “청년 기본소득 조례 폐지” 조례를 제정하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는 적절치 못한 이유를 들어 “청년 기본소득 조례”를 폐지하려는 이런 시도에 대해 비판적 입장입니다. 아래 글은 2022년 11월 14일, 온라인매체 <프레시안>에 기고한 안효상 이사장의 기고문입니다.


[프레시안 기고] “성남시의원들은 청년 기본소득 조례 폐지 시도를 멈추어야 한다”

안효상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이사장)

지금이야 어둠이 짙고, 어리석음이 판치는 시절이라 섣부른 바람일 수 있지만 언젠가 보편적 기본소득이 실시된다면 경기도 청년 기본소득은 중요한 문턱을 넘은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될 가능성이 크다. 예산의 제약 속에서 많은 액수도 아니고 24세에 해당하는 사람에게 1년 동안만 지급하는 것이지만 경기도 청년 기본소득은 아무런 조건 없이 지급함으로써 기본소득이 권리이며, 개인의 결정권을 강화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이런 점에서 청년 기본소득은 나중에 보편적 기본소득으로 개화될 싹을 담고 있다.

하지만 성남시의회 국민의당 김종환 의원 등이 발의한 ‘성남시 청년기본소득 지급 조례 폐지 조례안’에 따라 경기도 기본소득의 탄생지인 성남에서 기본소득이 사라질 운명에 처했다. 이들이 말하는 폐지 이유는 다음과 같다.

성남시 청년기본소득 지급 조례는 청년들의 복지 향상과 취업역량 강화를 목적으로 도입되었으나 문화․여가, 사회활동 등에 주로 사용되어 취업역량 강화 효과는 미비하였고, 특정 나이를 대상으로 지급되는 점에서 개개인의 활용성 및 필요성을 고려하지 않은 한계가 드러남.

모든 사람을 강제로 듣기 평가에 응시하게 한 일이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제 언어 영역의 시험을 보게 하는 글이다. 우선 청년 기본소득이 “문화 여가, 사회활동 등에 주로 사용”되었다는 점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 “청년들의 복지 향상”에 기여했다는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는지 “취업역량 강화 효과는 미비”하였다는 것이 첫 번째 폐지 이유이다. 먼저 어떤 정책의 여러 목표 가운데 어느 하나가 달성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 정책을 폐지할 사유가 되는지 물을 수 있다. 다음으로 “폐지 이유”는 “취업역량”을 좁게 해석하고 있다. 취업역량은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전반적인 능력과 인성의 표현일 수밖에 없다고 할 때 그 사람의 복지가 향상되는 것이 취업역량의 강화와 무관하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협소한 이해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인간에 대한 협소한 이해가 무지에서 나온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성남시 청년기본소득 지급 조례”에 따르면 청년 기본소득은 “성남시 청년의 복지향상과 취업역량 강화를 도모하는 동시에 성남시 지역경제 활성화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폐지 이유”는 지역 화폐로 지급되는 청년 기본소득이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한 사실을 슬쩍 빼버리고 있다. 그 이유는 여기서 꼭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첫 번째 이유와 중첩되어 있는 두 번째 이유는 좀 더 심각하다. 한마디로, 주는 사람이 보기에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주는 정책 이외에는 불필요한 정책이라는 말이다. 이런 의미라는 것은 성남시의회 국민의힘이 “미취업 청년들에게 자격증 시험 응시료와 수강료를 지원하는 조례”를 추진하겠다고 한 것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이들이 기본소득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점은 입이 아프지만 말해야겠다. 기본소득은 모두의 권리이며, 기본소득을 어디에 어떤 방식으로 쓰는가는 각자에게 달려 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모두의 권리가 실현될 뿐만 아니라 모두가 경제적 기반을 갖춤으로써 좀 더 평등하고 민주적이고 생태적인 사회가 되는 것이다.

물론 이들의 뿌리 깊은 편견, 즉 복지는 선별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이미 복지국가가 진전하면서 낡은 생각이 되었다는 점도 지적해야겠다. 무상급식 논쟁에서 촉발되었고, 재난 기본소득 논쟁에서 다시금 확인한 것처럼 선별의 어려움과 행정 비용, 낙인 효과, 가부장적 태도 및 관료제의 함정 등으로 인해 선별적 복지는 정말로 필요한 경우에 한정하는 게 낫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그럼에도 이제 겨우 시작된 보편적 복지국가로의 길을 가로막고자 하는 것은 낡은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아집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역사에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의 깊이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일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런 사람들에 대해 나사렛의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물론 그는 이 사람들의 용서를 빌면서 그런 말을 한 것이다. 하지만 역사도 그렇게 할지는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