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불쌍한 사람’만 지원하자는 사람들에게
전국민고용보험 vs. 기본소득 논쟁은 허구다
박정훈 라이더유니온 위원장
박원순 서울시장의 잘못된 정치적 프레임으로 탄생한 기본소득 vs. 전국민고용보험 논쟁이 뜨겁다. 사실 전국민고용보험이란 말은 거짓이다. 전국민고용보험은 모든 국민이 아니라 경제활동을 하는 근로자, 자영업자, 특고노동자들이 폐업 실업, 소득감소로 경제적 위기를 맞았을 때 실업급여 등으로 보호하자는 ‘보험’이다. 잘못된 구도 때문에 전국민에게 무조건적인 소득을 보장하는 기본소득과 전국민고용보험이 양립할 수 없는 제도처럼 여겨진다.
논쟁의 와중에 양재진 연세대 교수는 연금, 실업급여, 육아휴직급여 등 한국의 모든 현금 복지지출 73조 4천억 원을 없애고 11만 7천 원씩 전 국민에게 나눠주는 것을 기본소득인 것처럼 얘기하면서 취약계층에게 더 불리해진다고 악의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 기초생활보장제도를 통폐합해서 안심소득제를 지급하자고 주장하는 박기성 성신여대 교수나 오세훈씨 같은 우파들과 증세 없이 기본소득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일부 기본소득론자들을 제외하고 기존복지를 축소해서 기본소득을 하자는 사람은 없다.
논쟁은 가난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교수들과 정치인들이 벌이는데, 이들이 내세우는 싸움의 명분은 ‘진짜 불쌍한 사람’이다. 진짜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기본소득보다는 선별적 복지가 낫다는 것이다.
‘진짜 불쌍한 사람’들을 위한 복지의 현실
현재 시행되고 있는 복지제도를 살펴보자. 2020년 1인 가구 기초생활수급권자는 생계급여로 52만 7158원을 받는다. 이 돈을 다 주는 게 아니다. 기초생활수급권자가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일을 해서 돈을 벌면 생계급여는 삭감된다. 만약 일용직 알바로 10만 원의 수익을 얻으면, 근로소득 공제 30%를 제외하고 7만 원의 소득을 벌었다고 계산한다. 이때 생계급여도 7만 원 삭감된다.
4인 가구라면 142만 4752원을 생계급여로 받는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최저임금 일자리에서 취직이라도 하면, 받을 수 있는 생계급여는 16만 원 정도다. 근로를 해서 얻은 월 최저임금 179만 5310원에서 공제액 30% 53만 8593원을 빼면, 125만 6717원을 벌었다고 계산되고 그만큼 생계급여가 삭감되기 때문이다. 함정은, 근로능력이 있다고 판단되면 기초생활수급권 자체가 박탈될 수 있다는 것이다.
기초생활수급권자가 되기 위해서는 근로능력평가를 받아야 한다. 병원에서 일반질환은 2개월, 정신질환은 3개월의 진료기록지를 받아서 주민센터에 제출해야 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를 국민연금공단이 판정해서 통보한다. 서류상 근로능력이 없다는 확실한 점수를 받으면 끝이지만, 근로능력이 있다고 의심되는 애매한 점수를 받으면, 국민연금공단 직원이 직접 집으로 찾아온다. 신청자에게 앉았다 일어났다를 시키거나, 정말 일을 할 수 없는지 이것저것 물어본다. 국민들은 자신이 얼마나 불쌍하고 능력이 없는지를 끊임없이 설명해야 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목돈을 모으려고 저축을 하다가 500만 원을 넘으면 초과금액에 대해 월 6.26%를 곱해서 월 소득으로 환산해 버린다. 장사라도 하려고 차라도 사면 보험금의 100%를 곱해서 월 소득으로 환산한다. 집이 있다면 더 복잡해진다. 집가격 1억 2천만 원 이하(대도시 기준)까지는 6900만 원을 뺀 다음 1.04를 곱해서 월소득으로 환산하고, 1억 2천만 원을 초과한 금액에 대해서는 4.17%를 곱해 월 소득으로 환산한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자산을 모으면, 지원금을 줄이거나, 기초생활수급권 자체를 박탈하는 것이다.
소득과 자산만 없다고 선별적 복지를 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부양의무자가 있으면(1촌 직계혈족 및 그 배우자) 탈락이다. 2011년 60대 남성이 30년 전 부인과 이혼해 연락을 끊은 자식이 연봉 2천짜리 직장을 구하자 수급중단 통보를 받고 자살했다. 2014년에는 송파 세모녀, 2019년에는 서울 중랑구 모녀, 강서구의 가족살해 및 자살, 성북구 네모녀 죽음 등 셀 수 없이 많은 죽음들이 있었다. 2018년에만 생활고로 3390명이 자살했다.
소득도 자산도 가족도 근로능력이 없어도 기초생활수급권자가 될 수 없다. 마지막 관문 신청이 남았다. 생계급여를 받기 위해 제출해야 할 서류는 9종류다. 지금 바로 ‘복지로’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우리가 받을 수 있는 360여 가지의 선별적 복지가 안내되어 있다. 이중에서 내가 받을 수 있는 복지제도를 찾는 것부터가 일이다.
코로나19 국면에서 모든 국민에게 선별절차 없이 진행한 재난지원금의 경우 99%의 신청률을 기록했지만, 각종 서류들과 심사가 필요했던 대구시, 전주시, 서울시의 재난긴급생활비, 지금 진행하고 있는 특고생활비 지원은 각종 사건사고에 휘말리고 있다. 대구의 경우 정작 시민들은 수령하지 못한 사람이 많았는데, 정보를 잘 아는 공무원들과 공기업 직원들이 긴급재난비를 수령하는 비리까지 터졌다. 애꿎은 현장 공무원들은 어려운 용어의 서류를 떼오라고 했다가 민원인들의 거센 항의를 받아야 했고, 여러 공공기관을 전전하며 서류를 떼는 시민들은 짜증과 피곤함에 화가 나 있다. 스캐너, 프린트, 팩스, 인터넷에 접근하기 힘든 국민들은 어렵고 복잡하다며 신청자체를 포기한다.
KBS 보도에 따르면 특고 프리랜서 노동자들을 위해 지원되는 긴급고용안정지원금을 타기 위해서는 노무 미제공확인서를 제출해야 하는데, 사용자가 특정되지 않는 특고노동자들은 이 듣도 보도 못한 확인서를 발급받기 힘들 뿐만 아니라 회사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발급을 거부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게다가 25% 소득이 감소한 사람을 지원한다는데, 24%는 왜 안되는지에 대한 객관적, 과학적 근거도 없다. 3개월 동안 30일 이상, 매달 5일 이상 무급휴직하면 받을 수 있는데, 29일을 무급휴직하면 받을 수 없다.
서울시 특고지원금에 필요한 서류는 무려 10가지다. 건강보험료 기준으로 중위소득 100% 이하에, 고용보험에 가입하지 않았으며, 2월 23일 이후 20일 이상 일을 하지 못했거나, 올해 3~4월 평균수입이 1~2월 또는 전년도 월평균 소득과 비교해 30% 이상 감소해야 한다. 이렇게 신청해서 받을 수 있는 돈은 월 50만 원이다.
문제는 복지가 필요한 국민을 바라보는 시선
기본소득이 모두에게 똑같이 나눠주는 제도이므로 소득재분배 효과가 없다는 주장도 틀렸다. 간단한 사고실험을 해보자. 100만 원 버는 사람과 500만 원 버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세금을 10%를 걷으면, 100만 원 번 사람은 10만 원을, 500만 원 버는 사람은 50만 원을 낸다. 60만 원의 세금을 두 명에게 나눠주면 30만 원씩 나눠주므로, 100만 원 번 사람은 20만 원 이득, 500만원 번 사람은 20만 원 손해다. 누진적 소득세를 도입하면, 소득재분배 효과는 더 크다.
선별적 복지론자들은 60만 원을 100만 원 버는 사람에게만 주자고 하는 건데, 500만 원 버는 사람이 동의하기 힘들 뿐만 아니라, 100만 원이나 버는데 왜 돈을 주느냐고 항의할 수 있다. 설사 지원에 동의한다 하더라도 100만 원 버는 사람이 신청을 하지 않거나 위에서 살펴본 수많은 심사를 통과하지 못하면 복지예산 60만 원은 쓰이지 않고 남게 된다.
지금 복지제도의 핵심적 문제는 가난한 사람들을 바라보는 태도에 있다. 말도 안 되는 지원금을 받고 가난하게 계속 살든가, 지원금을 포기하고 일을 하라는 선택지만 있다. 그런데 이들을 위해 진행하는 취업교육이라는 것은 대부분 저임금 일자리들이다. 아프면 쉬라는 정부의 방역지침에도 불구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물류센터로 콜센터로 출근하고, 하루에 6명씩 일하다 죽는 산업현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저임금 일자리나 위험한 일자리를 거부할 권리는 ‘불쌍한 사람들’에겐 없을 뿐만 아니라 배부른 소리로 취급받기 쉽다.
주권자들의 자존감을 훼손하는 것이야말로 가난한 사람들만 도와주자는 주장의 문제다. 사회의 짐이라는 부채의식, 나도 모르는 사이 부정수급자가 될 수 있다는 불안감, 신청결과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불확실성은 인간의 영혼을 갉아 먹는다. 우리 사회는 가난한 사람들의 감정과 존엄을 계산하지도 고려하지도 않은 채, 그들을 어쩔 수 없이 떠안아야 할 사회적 비용으로, 기껏해야 도와줘야 할 시혜적 존재로 분류할 뿐이다.
4차 산업혁명 때문에 일자리가 없어지기 때문에 기본소득이 필요하다는 최근의 기본소득론담론의 문제 역시 여기에 있다. 노동자들을 주체적 인간이 아니라 기술에 따라 밀려나는 수동적인 피해자이자 구제의 대상으로만 그린다. 기본소득운동이 등장한 배경은 모든 주권자가 존엄할 권리가 있으며, 생존 때문에 정치에 참여할 수 없는 국민들을 방치해서는 실질적인 민주주의를 이룰 수 없다는 문제인식 때문이었는데, 행정비용을 줄이거나 경제성장정책으로만 기본소득이 설명되면서 본래의 정신들이 훼손되고 있다.
기재부와 국회, 정부를 움직일 사회운동이 필요하다
가짜로 불쌍한 사람들은 열악한 일터로 몰아내서 돈을 아끼고, 진짜 가난한 사람들을 잘 선별해서 찔끔 지원하거나 행정비용을 줄여서 기본소득을 준다고 하면, 기존 예산을 잘 쓰면 되기 때문에 증세문제가 주요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2020년 보건복지부의 사회복지예산 약 82조 가운데 기초생활보장과 취약계층 지원 예산은 약 13조밖에 안 된다. 명목 GDP 1900조의 나라에서 1%도 안 되는 돈으로 가난한 국민들을 지원하고 있는데, 한가한 논쟁만 벌어지고 있다. 선별적 복지의 문제해결을 위한 적극적 움직임이나 운동도 보이지 않는다. 상상 속에서 불쌍한 사람을 위한 추상적 논쟁은 벌어지지만, 책임 있고 구체적인 재원마련을 위한 정치와 집행은 보이지 않는다.
<세금수업>의 저자 장제우 선생님은 강연에서 스웨덴의 높은 조세부담률과 높은 복지제도는 1972년 여성들의 대중운동을 통해서 탄생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스웨덴 여성들은 ‘좀더 많은 그리고 좀더 질 높은 어린이집’을 요구했고, 1972년 ‘3.8 세계여성대회’를 비롯한 모든 행사와 시위에서 ‘모두를 위한 어린이집’이라는 구호가 등장했다고 설명한다. 사회에 책임을 묻는 대중운동에 국가가 증세를 통한 지원으로 답했고, 이것은 국민들의 복지경험을 통해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냈다.
지금 논쟁에서 가장 큰 문제는 복지국가를 만들기 위한 전통적 사회운동도 기본소득을 달라는 급진적 대중운동도 존재하지 않는 데 있다. 고용보험도 기본소득도 모든 걸 걸고 투쟁해도 될까 말까한 일인데 이를 요구하는 운동은 없고, 허망한 말들만 어지러이 널려 있다. 복지국가를 막는 것은 기본소득이 아니다. 기재부와 정부 국회, 여당을 쥐고 흔들 수 있는 운동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코로나19로 드러난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비전을 모색할 좋은 기회다. 긴급재난지원금으로 국민들은 전에 없던 복지경험과 공동체의 효능을 느끼고 있다.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복지국가론자와 좌파적 기본소득론자가 연대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