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본소득’ 개념을 구성하는 지표들
기본소득(Basic Income)이란 무엇인가? 이는 개념에 관한 질문이다. 명료한 개념 정의는 첫째, 현행 복지체계의 공적이전소득에 대한 기본소득의 차별성을 드러내며, 둘째, 기본소득과 유사한 제도들, 예를 들어 사회적 지분급여나 참여소득 등과의 부분적 유사성과 차별성을 아울러 드러낸다.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는 기본소득을 “자산 심사나 노동에 대한 요구 없이 무조건적으로 모두에게 개별적으로 주어지는 정기적인 현금 이전”(BIEN, 2016)으로 정의한다. 여기에서 기본소득 개념은 무조건성, 보편성, 개별성, 정기성, 현금이전의 다섯 지표로 구성된다. 다섯 지표는 기본소득인가 아닌가를 준별할 수 있게 해 준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의 개념 정의는 다른 제도와 비교할 때의 유형적 차이만을 드러내 줄 뿐이다. 다섯 지표에 의해 기본소득을 정의할 때 매우 중요한 문제가 생략된다. 즉 기본소득의 원천은 무엇이며, 지급수준은 어느 정도이어야 하며, 지급주체와 수령권자는 누구인가라는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는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의 기본소득 정의에 드러나지 않는다. 물론 누락된 문제들 중에서 어떤 것은 대단히 생산적인 공백일 수 있다. 하지만 어떤 것은 반드시 개념 정의에 들어가야 할 요소일 수 있다. 또한 그 중 어떤 것은 설령 독자적인 개념지표로 볼 수 없더라도 반드시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어야 할 요소일 수 있다. 아래에서는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의 정의에 등장하는 다섯 지표 및 누락된 지표들에 대해 검토하고 이 중에서 기본소득을 정의할 때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요소는 무엇인지를 살핀다.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는 정관 제2조에서 기본소득을 “공유부에 대한 모든 사회구성원의 권리에 기초한 몫으로서 모두에게, 무조건적으로, 개별적으로, 정기적으로, 현금으로 지급되는 소득”으로 정의한다. 기본소득지구네크워크의 정의와 비교해 보면 기본소득의 원천이 공유부임을 명확하게 한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점이다. 정관 제2조의 기본소득 정의에 대해 풍부한 설명을 제공하는 일이야말로 2020년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쟁점토론회의 과제이다.
2. 무조건성, 보편성, 개별성, 정기성, 현금이전의 다섯 지표에 대한 검토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의 기본소득 정의는 다른 유형의 복지제도에 대한 기본소득의 준별성을 드러내 준다는 장점이 있다. 무조건성, 보편성, 정기성, 현금이전의 다섯 지표는 기본소득을 현존하는 제도들 또는 기본소득 이외의 다른 제안들과 비교하고 유형화할 수 있게 해 준다. 앞서 언급한 세 가지 누락지점을 살피기 이전에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가 제시한 기본소득 지표들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
1) 현금 이전
‘현금 이전’(cash payment)은 기본소득을 교육, 의료 등의 현물서비스와 구분하는 지표이다. 그런데 기본소득은 ‘현금 이전’이라는 종차(differentia specifica)에 의해 현물서비스를 구분되지만, ‘현금 이전’에도 다양한 유형이 있을 수 있으므로 단지 이 지표만으로 기본소득이 정의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기본소득은 특정한 방식의 ‘현금 이전’이고, 어떤 식으로 특정한지는 추가적인 지표에 의해 한정되어야 한다. ‘현금 이전’은 기본소득이 속한 류(Genus)라고 볼 수 있지만, 다양한 ‘현금 이전’ 중에서 기본소득의 종차를 드러내어야 정의는 완결된다. 기본소득 정의를 완결하기 위하여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가 제시하는 지표는 정기성, 무조건성, 보편성, 개별성의 네 가지이다.
2) 정기성
기본소득은 ‘정기적인 현금 이전’이다. 정기성에 의하여 기본소득은 성년에 도달할 때 일회적인 종자돈의 형태로 지급되는 ‘사회적 지분급여’(stakeholder grants)와 구분된다. 하지만 기본소득만이 ‘정기적인 현금 이전’의 유일한 형태인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현대 복지국가가 등장하기 이전부터 이미 존재했던 공공부조도 ‘정기적인 현금 이전’이다. 따라서 기본소득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나머지 세 가지 지표, 곧 무조건성, 보편성, 개별성이 준별 지표로 등장해야 한다. 현존하는 복지제도와의 준별이라는 점에서는 무조건성, 보편성, 개별성이야말로 기본소득 정의를 이루는 가장 핵심적인 지표라고 말할 수 있다. 세 지표는 현존 복지국가의 공적 이전소득(public transfer income)과 기본소득의 차별성을 보여준다.
3) 무조건성, 보편성, 개별성: 내용과 준별 기능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지표는 무조건성이다. 20세기 복지국가의 이전지출은 ‘기여의 원리’에 따른 사회보험(social insurance)을 한 축으로 하고 ‘필요의 원리’에 따른 공공부조(public assistance)를 다른 한 축으로 하며, 가계를 단위로 지급되었다. 무조건성 지표는 ‘기여의 원리’나 ‘필요의 원리’와 다른 원리인 ‘모두에게 모두의 몫을 주라’는 공유부 분배정의를 담고 있다. 공유부는 모두의 몫이므로 공유부 분배에서는 조건을 달아 선별할 수 없다. 이 문제는 아래에서 다시 다룰 것이다. 무조건성 지표는 보편성 지표로 이어진다. 자산 심사나 일자리 여부, 노동 의사를 따지지 않는다면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지급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는 무조건성을 노동의무나 노동의사에 대한 심사가 없는 것으로 설명하며, 보편성은 자산 심사가 없어서 모두에게 지급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https://basicincome.org/about-basic-income/). 이런 방식의 설명은 혼동을 일으킨다. 기본소득은 일자리 여부나 노동 의사의 확인이 없고 자산 심사가 없다는 두 가지 특징으로 인하여 오랫동안 ‘무조건적 기본소득’(Unconditional Basic Incoem)으로 불렸다. 자산 심사나 일자리 여부는 둘로 나눌 수 있는 기준이 아니다. 사상사적 맥락에서도 빈민에 대한 조건적인 지원으로부터 무조건적인 배당으로의 이행은 18세기 말 토마스 페인과 토마스 스펜스의 지적 혁명의 핵심이었다. 따라서 무조건성을 일자리 여부와 노동 의사에 대한 심사와 연관시키고 보편성을 자산 심사와 연관시킨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의 설명 방식은 혼동을 낳는다.
아울러 개념 지표는 다른 제도와의 종차를 드러내어야 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무조건성과 보편성을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의 정의처럼 구분하는 것은 이 점에서 아무런 실익이 없다. 노동 의사를 확인하지만 자산은 심사하지 않는 제도나 자산은 심사하지만 노동 의사는 확인하지 않는 제도가 있다면, 완화된 조건성 또는 제한적인 무조건성으로서 이해하면 된다. 그와 같은 매우 완화된 조건성은 본래적인 무조건성이 아닌 것으로서 충분히 구분할 수 있다.
나아가, 보편성 지표는 권리주체의 보편성이라는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즉 인간, 거주자 개념으로서 사회구성원, 국민, 지역주민 등은 수령권자의 보편성의 크기를 보여준다. 글로벌 기본소득은 모든 인류, 국민국가 단위의 기본소득은 국민 또는 사회구성원, 지방차원의 기본소득은 지역주민 모두에게 지급된다. 수령권자의 보편성은 기본소득 지급주체에 따라 달라지지만, 해당 공동체 안에서는 모두에게 지급된다면 보편성 기준을 충족한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 하나의 예외가 등장할 수 있다. 한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들에서는 예를 들어 0에서 7세 또는 65세 이상 등 특정 연령에게만 무조건적, 개별적, 정기적 현금 이전이 제도화 되고 있다. 이를 흔히 ‘범주형 기본소득’(Categorical Basic Income)이라고 부른다(Van Parijs and Vanderborght, 2017: 158-162), ‘범주형 기본소득’은 범주 내부에 대해서는 보편성을 충족시키지만 범주 외부에는 보편성을 충족시키지 않는다. 당연하게도, 기본소득이라고 부르려면 범주형 기본소득도 범주 내부에 대하여 보편성뿐만 아니라 무조건성과 개별성도 충족해야 한다.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의 보편성 지표는 “자산 심사 없이 모두에게 지급된다”는 것인데, ‘범주형 기본소득’의 경우에는 비록 자산 심사는 없지만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지급되지 않는다. 이처럼 ‘범주형 기본소득’의 예는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의 보편성 지표가 준별 기능이 매우 약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보편성 지표를 수령권자의 보편성으로 이해할 경우에만 모든 인류에게 지급되는 글로벌 기본소득부터 특정 연령에 한정된 ‘범주형 기본소득’까지 보편성 범위의 편차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무조건성 지표는 자산 심사 및 일자리 여부, 또는 노동 의사에 대한 확인이 없다는 것으로 확대하여 정의하고, 보편성 지표는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홈페이지에 등장하는 자산 심사를 빼고 ‘모두에게 지급된다’만을 내용으로 삼는 것이 낫다.
가구 단위가 아니라 개별적으로 지급된다는 특징도 기본소득의 정의를 구성하는 종차이다. 현존하는 복지 국가의 공공부조가 가구 단위로 지급되기 때문에 개별성은 확실한 준별 기능을 가진다. 개별성 지표로 인하여 앞으로 무조건적 보편적 정기적 현금 이전이 등장하더라도 가구 단위로 지급되는 것은 기본소득과 유사한 제도이지만 본격적인 기본소득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4) 무조건성, 보편성, 개별성 지표의 독립성과 상호의존성
무조건성, 보편성, 개별성 지표를 이해함에 있어서 중요한 점은 세 지표를 분석적으로 나누어야 하지만 또한 통합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개별성 지표는 보편성 지표를 권리주체의 보편성으로 이해해야 할 근거를 제공한다. 기본소득 지표로서 보편성은 공공서비스의 특징인 보편적 접근가능성과 달리 개별화될 수 있는 현금 할당이 모든 사람에게 부여되는 것이다. 즉 개별성 지표의 내용은 보편성 지표의 내용과 상호 규정적이다. 마찬가지로, 무조건성 지표도 복지국가 전체의 특성으로서 보편복지 개념과 달리 기본소득이라는 단일 제도의 특성으로서 보편성에 대해 실마리를 제공한다. 기본소득의 보편성 지표는 사회구성원 모두가 이런저런 조건에 따라 이런저런 복지제도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무조건적 소득이 부여된다는 것이다.
3.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의 정의에 누락된 요소들에 대한 검토
1) 기본소득의 원천으로서 공유부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의 정의에는 몇 가지 요소가 생략되어 있다. 첫 번째로 누락된 요소는 기본소득의 원천에 관한 문제, 즉 정기적으로 이전되는 현금의 성격에 관한 문제이다. 이 문제는 분배정의의 차원과 연결된다. 무조건적, 보편적, 개별적으로, 또한 정기적인 현금 형태로 이전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왜 그러한 방식으로 이전되어야 하는가라는 문제, 곧 기본소득이라는 특유한 분배방식의 정당성 문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진다.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BIKN)는 기본소득의 원천을 공유부(공통부/공동부)로 밝힘으로써, 기본소득은 공유부의 무조건적, 보편적, 개별적, 정기적 배당으로서 현금 형태로 이루어진다고 정의한다. 무조건성, 보편성, 개별성 지표는 현존하는 복지체계의 현금 이전과 기본소득의 준별성을 분명히 보여주지만, 왜 그러한 방식으로 현금 이전이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아래 4에서는 기본소득 개념에 원천을 정확하게 표시할 경우의 장점과 의의를 다룬다.
2) 지급수준
누락된 두 번째 요소는 충분성이다. 독일,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스위스 기본소득네트워크와 UBIE(Unconditional Basic Income Europe)는 인간다운 삶과 존엄,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참여에 충분한 액수를 기본소득의 개념적 지표로 삼고 있다. 하지만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의 정의에는 기본소득 지급수준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고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가 기본소득 지급수준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16년 서울대회에서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는 충분성을 기본소득 개념에 포함시키지는 않았지만 별도의 정책목표로서 다루었다. 생계에 충분하며 문화적 정치적 참여가 가능한 지급수준이 정책 목표라는 점을 밝히고, 또한 기본소득의 도입으로 현존하는 복지혜택이 축소되는 계층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유보조항을 단다(https://basicincome.org/news/2016/10/bien-report-general-assembly/).
기본소득의 유형을 생계수준을 기준으로 그 이상의 액수를 지급하는 충분기본소득(Full Basic Income: FBI)과 그 이하의 액수를 지급하는 부분기본소득(Partial Basic Income: PBI)으로 구분하기도 한다(Fitzpatrick, 1999; 36). 이러한 구분은 최소생계비를 지급하는 생계수준 기본소득(subsistence-level basic income)을 기준점으로 한 구분이다. 하지만 지급수준이 어떠하든지 모두 무조건적(Unconditional), 보편적(Universal) 개별적(Individual), 정기적(Periodic) 현금 지급(Cash Payment)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충분기본소득과 부분기본소득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면,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의 정책 결의는 충분기본소득을 목표로 하며 부분기본소득이 도입되는 경우에도 이로 인하여 현재의 복지혜택보다 더 나쁜 처지로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는 정관 제2조에서 기본소득을 정의하고 있다. 정관 2조는 기본소득의 원천이 공유부임을 밝히고 있지만 충분성을 개념 지표로 삼고 있지 않다. 공유부를 기본소득의 원천으로 밝히는 것과 충분성을 개념 지표로 삼는 것은 별개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공유부 범위가 지급수준의 충분성을 충족할 만큼 넓다면 충분성을 개념 지표로 삼을 실익은 사라진다. 이 문제는 아래에서 자세히 다룬다.
3) 지급의무자와 수령권자
마지막으로,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의 기본소득 정의는 기본소득의 지급의무자는 누구이며 수령권자는 누구인가에 대하여 침묵한다. 이는 두 가지 점에서 대단히 생산적인 공백일 수 있다. 첫째, 지급의무자는 지방, 국민국가, 글로벌 차원의 정치공동체일 수 있다. 따라서 지급주체를 국가로 특정할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꼭 국가로 특정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지급주체를 정치공동체로 특정할 수는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급주체를 정치공동체로 특정할 필요도 없는데, 이는 기본소득 유형을 조세형이나 공공소유형이 아닌 다른 방식에 대해 열어둔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재원을 조세로 조달하는 방식 이외에도 사회구성원 모두의 공동소유(common ownership)에 기초하여 모두에게 무조건적, 개별적, 정기적으로 현금을 배당하는 방식도 기본소득 유형이 될 수 있다. 여기에서 공동소유란 정치공동체의 소유인 공공소유(public ownership)와 달리 사회구성원 모두의 소유라는 뜻이다. 공공소유의 수익 배분이 소유자인 국가 또는 여타 정치체의 처분에 맡겨지지만 공동소유의 수익은 전액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무조건적, 개별적으로 배당되어야 한다. 아울러 전적으로 공동소유가 아니라 하더라도 사회구성원 모두가 일정 부분에 지분을 가지는 공유지분권 모델도 기본소득의 재원이 될 수 있다.
‘정치공동체’라는 표현을 회피함으로써 얻게 되는 효과는 매우 분명하다. 기본소득을 전체에서 개별로의 현금 이전이라고 할 때, 현금이전의 의무를 지고 있는 전체의 사회적 형태, 구체적으로는 소유형태에 대해 열어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급의무자의 사회적 형태는 공적소유(public ownership) 형태일 수도 있으며 공동소유(common ownership)일 수도 있고,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지만 과세권을 가진 조세국가일 수도 있다. 국가가 공공소유 형태로 가지고 있지만 사회배당 형태로 ‘무조건적, 보편적, 개별적, 정기적인 현금 이전’을 할 수도 있으며(예컨대 J. Meade의 모델), 공공소유가 아닌 일종의 공동소유(common ownership)로 공통부기금이 지급의무를 질 수도 있다.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의 기본소득 정의는 이 점에서 대단히 생산적인 공백을 남기고 있다.
4. 공유부(공통부/공동부)를 기본소득의 원천으로서 밝히는 기본소득 정의의 장점
1) 무조건성, 보편성, 개별성 지표와 공유부 개념은 논리적 대응관계
기본소득은 특유한 방식의 현금 이전이며, 곧 총소득의 특유한 분배방식이다. 개별성, 보편성 무조건성은 그러한 특유함의 지표이다. 공유부 개념은 이러한 특성을 가장 간명하게 정당화한다. 공유부 수익이란, 예를 들자면 원래 모든 사람에게 속한 자연적 공유자산의 수익이나 또는 지식, 정보, 빅데이터 등과 같은 인공적 공유자산의 수익처럼 누가 얼마만큼 기여했는지를 따질 수 없고 어떤 특정인의 성과로 귀속시킬 수 없는 수익이다. 즉 발생한 수익은 어떤 특정인의 몫이 아니라 모두의 몫이라는 점이야말로 공유부의 개념적 특징이다. 이러한 개념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공유부의 분배에 조건을 달고 수령권자를 선별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게 된다. 누구의 몫으로도 귀속시킬 수 없는 한에서 공유부는 무조건적, 보편적, 개별적으로 모두에게 동등한 몫으로 분배될 수밖에 없고, 오직 그럴 경우에만 정의로운 분배가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점에서 무조건성, 보편성, 개별성이라는 핵심 지표와 공유부 개념은 논리적 대응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2) 소유형태에 대한 중립성 및 공유부 배당의 다양한 실현형태들
공유부 개념은 한편으로 기본소득이란 원천적 공동소유자로서 몫을 배당받을 권리라는 점을 밝혀주지만, 다른 한편으로 구체적인 소유형태에 대해서는 중립적이다. 즉 공유부는 공동소유만이 아니라 사적 소유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 물론 사회 전체의 공동소유의 경우에는 사회구성원 모두가 공동소유자이기에 수익을 모두에게 동등하게 배당한다는 것은 매우 당연한 결과이다. 하지만 사유재산권에 입각한 수익이라도 그 성격상 특정 개인이나 기업의 성과로 볼 수 없고 사회적 공통자본에 의한 외부효과(external effect)에 의해 발생한 것이라면 공유부로 보아야 한다. 20세기 복지국가가 물려준 조세제도는 사유재산권이 지배적인 상태에서도 공유부 수익을 원천적인 공유자(commoner)에게 되돌려 줄 가능성을 부여한다. 사유재산제도의 법적 형식에 기대어 사적으로 전유되고 있는 공유부 수익을 정치공동체가 조세로 환수하여 구성원 모두에게 동등하게 분배한다면, 사유재산제도의 틀을 유지하면서도 공유부 수익의 동등한 배당이 가능해진다. 조세형 기본소득에서 조세는 공유부의 환수 수단이며, 무조건적, 보편적, 개별적 현금이전, 곧 기본소득은 환수된 공유부를 분배하는 유일하게 정당한 방식이다. 정리하자면, 공유부란 소유형태와 독립적으로 공동의 몫으로 되돌려야 할 수익을 뜻하며, 설령 사적 소유의 수익이더라도 모두에게 되돌려야 할 몫을 뜻한다.
당연하게도, 조세형 기본소득만이 공유부 배당을 실현하는 유일한 방법인 것은 아니다. 조세를 매개로 하지 않는 직접적인 공유부 배당 방식이 있을 수 있다. 즉 기본소득의 원천인 공유부의 법률적 소유권 형태가 사회구성원 모두의 공동소유(common property)인 경우도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이때 공동소유란 국가 등 정치공동체의 소유인 공적 소유(public property)와 달리 개별적 사회구성원 모두가 공동소유자인 소유형태를 뜻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공적 소유와 사회구성원 모두의 공동소유의 구별을 강조할 필요성은 공동소유의 수익은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무조건적, 보편적, 개별적으로 평등하게 배당되어야 하지만, 공적 소유의 수익이 반드시 이렇게 배당되어야 할 논리적 필연성은 없다는 점과 관련된다. 공적 소유의 이익에 대한 처분권은 국가나 정치공동체가 가지며 이를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조건 없이 평등하게 배당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국가나 정치공동체의 결정에 따르게 된다. 오히려 역사적 경험과 사회적 현실은 공적 소유와 기본소득이 연동되지 않는다는 정반대의 사실을 보여준다. 자본주의 사회의 공기업은 이익을 시민들에게 균등하게 배당하지 않으며, 20세기의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국가소유의 수익은 국민들에게 기본소득으로 배당되지 않았다. 사회구성원 모두의 소유로서 공동소유는 현실에 존재하는 공적 소유와 다르다.
조세형 기본소득이나 공동소유형 기본소득만이 공유부 배당의 실현방식인 것은 아니다. 공동소유와 사적 소유의 혼합형태도 공유부 배당을 위한 법률적 소유형태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일찍이 제임스 미드(Meade, 1989: 38, 40)가 제안했듯이 모든 주식회사의 지분 일부를 사회구성원 모두가 보유하고 이로부터 사회구성원 모두가 동등한 배당을 받는 방식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소유형태는 공유지분권 모델이라고 부를 수 있다. 공동소유형 기본소득이든, 공유지분권 모델이든, 또는 조세형 기본소득이든 모든 유형의 기본소득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분배 원칙은 공유부의 평등한 배당(equal share from common wealth)이다. 일차적으로 이 원리는 소유권에 대해 중립적인 소득분배의 규제 원칙(regulative principle of income distribution)으로 이해될 수 있다. 어떠한 유형이든 기본소득은 공유부 분배정의(distributive justice of common wealth)를 실현한다.
3) 공유부 개념과 기본소득 지급수준
공유부 배당원리를 정의에 분명히 한다는 것은 공유부 수익이 GDP의 25%라면 25%를, 90%라면 90%를 무조건적, 보편적, 개별적으로 분배하라는 말이다. 지급수준은 공유부 수익의 크기에 연동될 것이기에 공유부의 GDP 비중이 미미하다면 매우 미미한 기본소득이 돌아올 뿐이다. 하지만 우리가 기본소득이라고 부를 때 기본(basic)이란 기초적인 필요를 충족시킨다는 뜻이고 충분성 지표를 떠올리게 만든다. 엄밀히 말하자면, 기본소득에서 ‘기본’(basic)의 의미는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주어지는 선차적 소득이라는 것이며 여기에 추가적으로 다른 종류의 소득이 덧붙여질 수 있다는 뜻이지만(Van Parijs, 1995: 30), 그럼에도 ‘기본’은 인간의 기본욕구를 충족시키는 절대량처럼 이해되기도 한다(van der Veen and Van Parijs, 2006: 6). 현재의 자본주의 경제에서 공유부로 분배해야 할 몫이 사회구성원 모두의 기본적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을 만큼 충분할 것이라는 가정 아래에서는 기본소득 정의에 충분성 지표를 포함시키지 않더라도 기본소득의 원천이 공유부라는 점을 밝히는 것만으로도 지급수준에 대해 명시하는 효과를 가진다. 다른 한편, 모든 소득의 90%는 이전 세대에 의해서 축적된 지식의 외부효과라고 말할 수 있으며(Simon, 2000), 디지털 전환과 함께 자본주의 생산의 변화는 공유부의 크기가 이미 모두의 기초적 필요를 충족시킬 만큼 크다고 생각에 객관적 근거를 부여한다. 공유부가 모두의 필요를 충족시킬 만큼 크다는 전제 하에서는 굳이 지급수준에 관한 지표를 기본소득의 정의에 포함시킬 필요가 없다. 하지만 현실에서 무엇이 공유부이며 어느 정도가 공유부 수익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단순히 경제학의 몫이 아닐 수 있다. 얼마만큼이 공유부인지를 정하는 문제는 정치의 문제이다(Varoufakis, 2016). 그런데 이 문제가 본질적으로 정치의 문제이고, 모두의 몫을 모두에게 되돌리는 분배정의의 정치적 실현의 문제라면, 충분성 지표는 개념 지표가 아니라 정책 목표로 이해하는 것이 더 낫다. 기본소득 정의에 충분성 지표를 포함시키지 않고 그 대신에 정치적 목표 또는 정책 효과로 서술하더라도, 정의에 공유부 개념이 포함되는 것만으로도 충분성이라는 정책 목표를 개념 정의가 뒷받침하는 효과가 얻어진다.
4) 미성년자에게 차등지급은 가능한가? 추가적인 특별수당은 어떻게 볼 것인가?
공유부의 배당은 무조건적, 보편적, 개별적일 수밖에 없다. 어느 누구의 기여로 특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차등지급은 공유부 분배원리에 어긋난다. 공유부 분배는 평등한 몫을 분배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미성년자에게 성년에게 지급되는 기본소득의 절반을 지급한다든지 특정 범주의 인구집단에게 추가적인 특별수당을 지급한다든지 등의 예외적인 제도 설계가 제안되고 있다. 이러한 예외는 공유부 분배원리로부터 원리적으로 벗어나지만 공유부 분배원리의 핵심인 무조건적, 보편적, 개별적 배당을 훼손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정책적으로 선택 가능한 문제로 볼 수 있다.
5. 공유부 배당으로서 기본소득의 재원은?
1) 자연적 공유부 배당: 토지보유세와 토지배당의 연동, 탄소세와 생태배당의 연동
자연적 공유부인 토지, 생태환경 사용에 대한 배당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토지보유세와 토지배당의 연동모델, 탄소세와 탄소배당의 연동모델이다. 자세한 설명은 이 논의의 범위를 벗어나기에 생략한다. 하지만 ‘과세와 배당의 연동’이라는 기본소득의 재정원칙은 공유부가 기본소득 원천이라는 점을 명백히 할 때에만 분명하게 이해될 것이라는 점은 다시 한 번 강조할 필요가 있다. 과세는 사적으로 점유된 공유부 수익을 모두에게 무조건적 개별적으로 되돌려 주기 위한 수단이며, 국가는 과세추출과 소득이전의 기능만을 담당할 뿐이다. 이처럼 국고에 충용되는 일반재정 수입과 기본소득 재원의 차별성은 모두의 몫인 공유부 개념을 명확히 할 때에만 간명하게 이해될 수 있다(금민, 2020: 5장).
2) 빅데이터 배당의 실현형태들
자연적 공유부의 배당에는 조세형 기본소득 모델을 활용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하지만 인공적 공유부에 대해서는 조세형 기본소득 모델뿐만 아니라 제임스 미드의 공유지분권 모델이나 공동소유형 배당모델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빅데이터는 모두의 공동소유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면 기업의 데이터 활용에 의한 수익을 모두에게 되돌려 주는 방식은 디지털세 또는 데이터세와 같은 새로운 조세뿐만 아니라 빅데이터 공동소유권에 근거하여 플랫폼 기업에 공유지분권을 설정하는 방식이라든지, 협동적 또는 공공적인 방식으로 데이터 경제를 구축하되 수익은 모두에게 무조건적 개별적으로 배당하는 방식도 생각해 볼 수 있다(금민, 2020: 3장). 데이터 경제에 대한 공유지분권 모델의 장점은 글로벌 플랫폼 기업에 대한 과세 난점을 피할 수 있다는 점이다. 토지공유부와 비교할 때 빅데이터 공유부의 배당 방식의 소유형태적 다양성은 토지인클로져는 토지에 대한 사유재산권은 이미 확고한 사회적 사실인 반면에 데이터 소유권 논의는 이제 막 시작되는 단계라는 점과 관련된다.
3) 인공적 공유부 배당과 기술혁신
빅데이터 배당은 인공적 공유부 배당이다. 반면에 로봇세는 공유부 배당으로 볼 수 없다. 설령 로봇세의 약점인 과세대상 특정이 문제가 해결되고 과세 목적을 자동화의 과실의 사회 환원에서 찾는다 하더라도, 로봇세의 논의 배경에는 일자리 보호가 놓여 있다는 점도 엄연한 사실이다. 그런데 자동화 그 자체는 일자리를 축소하는 재앙이 아니라 전 사회적인 노동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자동화의 과실은 전 사회적인 노동시간 단축으로 이어져야 하며 노동시간단축을 가능하게 해주는 재정적 조건은 기본소득 도입이다. 기본소득의 재원이 로봇세일 필요는 전혀 없으며, 특히 기계적 자동화가 아니라 디지털 전환에 의해 자동화가 추진되는 오늘날의 자본주의 현실은 빅데이터 배당에 대한 논의가 중요하게 된다. 빅데이터 배당은 자동화나 인공지능 혁명을 발생시키는 부정적 외부성을 줄이기 위한 피구세(Pigouvian tax)가 아니라 빅데이터에 의존하여 생산되는 긍정적 외부성을 모두에게 되돌려주는 것이다. 빅데이터 배당은 자동화에 적대적이지 않지만 로봇세는 자동화에 대해 적대적이다. 빅데이터 배당과 로봇세의 비교는 인공적 공유부 배당과 기술변화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지식이나 빅데이터와 같은 인공적 공유부를 모두에게 무조건적 개별적으로 분배하는 것은 기술진보를 저해하는 일이 아니라 촉진하는 일이다.
4) 지식공유부 배당은 외부재원(external funding)만이 아니라 개인소득세와 같은 내부재원(internal funding)도 포괄한다
공유부가 기본소득 재원이라는 설명은 자칫 재원에 개인소득세와 같은 내부재원이 포함되지 않으며 법인이 부담하는 외부재원이나 공유지분권 수익 또는 공동소유의 배당만이 재원이라는 식으로 오해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소득에는 공유부가 포함되어 있다. 모든 소득은 지식의 외부효과에 의존한다(Simon, 2000). 지식은 인류 공통의 유산이며, 모든 지식생산은 이와 같은 공통유산에 의존한다. “현재의 생산력은 현재의 노력과 사회적 유산의 공동결과(a joint result)”이며 “모든 시민은 이러한 공통유산(common heritage)의 수익을 공유해야 한다”(Cole, 1944: 144).
따라서 조세형 기본소득 모델을 채택할 때 공우부가 재원이라는 말은 빅데이터세와 같은 새로운 세목만이 아니라 개인소득세도 세원이 된다는 뜻이다. 개인소득세에 의해 공유부 수익을 거둬들이는 경우 거둬들인 세수는 모두 기본소득으로 배당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과세와 배당의 연동은 공유부 분배정의를 표현하며 개인소득에 포함된 공유부의 분배에서도 이 원칙은 지켜져야 한다. 따라서 기본소득 재정 마련을 위해 개인소득에 과세할 경우에도 특별회계로 처리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는 재정환상을 제거한다는 이점도 가진다.
5) 지금까지 기본소득 재원으로 제안된 모든 것은 공유부 배당의 재원으로 볼 수 있다
신용을 인공적 공유부로 본다면, 주권화폐(sovereign money)로의 전환에 의한 화폐배당도 기본소득 재원이 된다(Huber, 1998; 2016). 사실상 지금까지 제안된 모든 종류의 기본소득 재원은 동시에 공유부 배당의 재원이다. 토지, 생태환경의 사용, 지식, 빅데이터, 인공지능, 화폐 등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공유부라는 점 때문에 무조건적, 보편적, 개별적, 정기적인 현금이전, 곧 기본소득으로 분배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