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문석과 김종훈 동지를 기억하며

류보선(문학평론가,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운영위원)

아마도 저를 모르시는 분은 저 사람 누구지 하실 것이고, 혹여 저를 아시는 분들은 저 사람이 왜 저기에 있지 하실 듯합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자리에 서 있습니다. 오늘만 두 번째입니다. 마침 그때 읽고 있었던 데리다 책의 어떤 한 구절 때문일 겁니다. 제가 이 예기치 않은 자리에 선 것은요. 그 책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습니다. 용서하지 못할 것을 용서하는 것이 진정한 용서다라는 말. 오늘 이 행사의 주인공이었어야 할 두 동지, 권문석 형과 김종훈 형을 기억하고 추억해 달라는 말을 들었을 때, 처음에는 고민할 것도 없었습니다. 기억이나 추억은 기억할 것이 있는 사람들이 해야 하는 것이니 옷깃도 스친 적이 없는 저는 두 동지를 추억하기에 적당한 사람이 전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는 답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돌아서는 순간 망할, 데리다의 그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용서하지 못할 것을 용서하는 것이 진정한 용서라면, 추억할 것이 없는 사람이 추억하는 것이 진정한 추억 아닐까, 내가 비록 이순신이나 세종대왕, 그리고 임화와 이상과 옷깃을 스친 적은 없지만 나름 추억할 수 있는 것처럼 이 두 동지에 대해서도 나름 애도하고 추억할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터무니없는 망상에 사로잡혔습니다. 그 다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물론 그 중간에는 여러 분이 알고 계시는 그 일이 있었습니다. 혈압약을 거르고, 평소보다 엄청 과속을 하고, 과격하게 움직이고…. 등등.

올해로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가 만들어진 지 10년이 됩니다. 많은 변화가 있었고 큰 발전이 있었습니다. 그 덕분에 저 같은 문외한도 이 자리에 와서 이렇게 기웃거리고 있는 셈이겠지요. 이런 많은 변화와 큰 발전에는 물론 기본소득이라는 이념을 우리 현실에 안착시키고 정착시키기 위한 이론가들의 역할도 큰 몫을 차지했겠지만, 그들 못지않게, 아니 그들보다 더 절실하게 그 이념을 그 정책을 대중의 머리와 가슴에 옮겨주고 그 아이디어가 구체적인 정책으로 입안될 때 대중들이 그것을 적극 환대하도록 하게 하는 활동가들이 필요합니다. 권문석 형과 김종훈 형은 바로 그런 이들이었습니다. 1등만 혹은 1%만 기억하는 더러운 신자유주의 세상을 바꿔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그들은 그야말로 목숨을 건 투쟁을 한 이들입니다.

권문석 형이 가고자 했던 일차적인 목적지는 ‘최저임금 1만원’과 ‘조건 없는 기본소득’이었습니다. 그 일차적인 목적지를 찾기까지의 과정 또한 치열했고, 그 일차적인 목적지를 찾고 나서의 삶은 더욱 가열찼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기본소득’에 꽂혀 기본소득네트워크에서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를 만들기까지, 그리고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를 본궤도에 올려놓기까지 권문석 형의 헌신은 제가 상상의 범위를 넘어서는 숭고함이 느껴지는 그것이었습니다. 덕분에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는 유쾌하기는 하나 전혀 현실성 없는 상상이었던, 아니 현실성이 너무 없어서 아무 부담 없이 농담처럼 받아들일 수 있었던 몽상을 내놓는 단체에서 한국 사회의 가장 구체적이면서 보편적인, 가장 이상적이면서도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단체로 발돋움했습니다. 이런 헌신성 외에 권문석 형은 뜻밖의 면도 지닌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추모집인 ‘알바생’이 아니고 ‘알바노동자’입니다를 읽다가 추모집의 그 엄숙함에 젖어 있으면서도 나도 모르게 웃음을 머금은 대목이 둘 있습니다. 하나는 병역 특례 요원 시절 퇴근하고 돌아와 인터넷 축구 게임에 심취했고 게임 전적을 노트 여러 권에 걸쳐 꼼꼼히 기록했다는 대목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는 현재의 자리로 올려놓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 2010년 기본소득국제학술대회와 관련된 에피소드. 입국이 불가능할지 모른다는 이유 때문에 발표자의 이름철자를 일부러 틀리게 하는 대목도 인상적이었지만, 대회 전날 참석자를 환영하는 만찬 자리에 식사 메뉴로 ‘홍어회’로 했다는 장면에선 웃음을 참기 힘들었습니다.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고 그 활동이 어느 정도 현실화되는 바로 그 시기에 그렇게 갑작스레 운명을 달리하지 않고 이 자리에 있었다면, 저는 이 자리에 서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면 저 구석에서 권문석 형과 구시렁구시렁 이런저런 푸념과 농담을 신나게 주고받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권문석 형이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의 중앙을 건설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면 김종훈 동지는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의 피를 돌게 하는 지부를 건설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이입니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의 가족들이 엄마가 실종된 이후 비로소 엄마의 실재 혹은 존재자로서의 엄마를 알아가고 깨달아가듯, 저는 안타깝게도 김종훈 형을 그가 세상을 달리한 그 순간 알게 되었습니다. 2019년 9월 하순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운영위원회 텔방에 김종훈 형이 운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이 올라왔었더랬습니다. 무심코 넘기다가 소식과 함께 올라온 사진에 눈길에 잠시 머물렀고 그 사진에 이끌려 일면식도 없던 김종훈 형의 장례식장엘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김종훈 형과 뒤늦은, 그러나 운명적인 조우를 하게 되었습니다. 장례식장은 한평생 운동에 헌신하다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이를 보내는 자리가 그러하듯 침울했고 어두웠습니다. 속으로 수고하셨다, 이젠 좀 쉬시라라는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순간 저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형이 못 이룬 꿈 내가 이어가겠다며 주먹을 불끈 쥐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김종훈 형에게서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중요한 디딤돌인 기본소득 운동의 이념을 넘겨받는 착시 같은 경험을 한 셈이지요. 저는 그 착시 같은 경험이 저를 이 자리에 서게 했다고 말한다면, 그건 너무 과장일까요? 하여튼 김종훈 형은 그날 그렇게 제 삶 안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았습니다.

사실 저는 사진을 통해 본 김종훈 형에 대한 단편적인 인상과 그 사진 속에 뿜어져 나오던 아우라에 잠시 멈칫, 했던 기억만 있을 뿐 김종훈 형이 살아온 삶의 이력을 잘 모릅니다. 전혀 정보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것도 이 자리에 서기 위해 김종훈 형의 친우인 김용기 동지에게 급하게 전해들은 형의 몇몇 이력일 뿐입니다. 그에 근거하여 김종훈 형의 살아온 이력을 밝히자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형은 1970년생입니다. 1992년부터 2000년까지 직장생활을 했고, 2000년 청년진보당(사회당) 입당하며 충남 지역 진보정당(청년진보당, 사회당, 노동당)의 전위로 중요한 활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2001년부터 2003년까지 사회당 충남도당에 상근 활동을 했고, 2010년부터는 충남 비정규직 지원센터 운영위원으로 분주하게 움직였습니다. 2014년에는 지방선거 충남도의회 도의원선거에 노동당 소속으로 출마했고, 하늘도 섧게 울던 2019년 9월 23일 운명을 달리하는 순간까지 충남지역 청소년노동인권지킴이 활동을 계속 이어나갔습니다. 전해들은 바에 따르면 김종훈 형은 말수고 적고 조용한 성격이며, 자신을 절대 내세우는 법이 없이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자신이 해야 할 일만 묵묵히 하는 사람이며, 빛나는 일, 궂은 일 마다하지 않고 필요한 일은 무조건 앞장서는 성격을 지닌 이입니다. 늘 경제적으로 쪼들렸으나 한 푼이라도 여윳돈이 생기면 후배들 먼저 챙겨주고 밥 사주고 술 사주는 넉넉한 마음의 소유자이기도 했습니다. 일하는 청소년들의 노동인권 보장과 보호를 위한 다양한 활동(교육, 상담, 권리찾기 지원 등)을 한 시도 놓은 적이 없고, 충남지역 진보정당(청년진보당, 사회당, 노동당)운동에서 늘 전위적인 역할을 맡아온 것은 물론 싸움이 끝나고 난 뒷자리에 끝까지 남아 그것을 갈무리하던 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당의 상황이 어려워지면 당장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나와 거의 무급으로 상근 활동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직장 생활도 꼭 교대근무가 가능한 곳만 찾았습니다. 하루는 일하고, 하루는 활동해야 한다며. 쉬는 날에는 정말 피곤할 텐데도 일인시위나, 투쟁사업장, 홍보활동 캠페인 등에 거의 빠진 적이 없었습니다. 세월호 투쟁 때는 거의 한나절을 혼자서 1인 시위를 하기도 했었습니다. 일하는 날 함께 못한 거 쉬는 날 채워서 해야 한다고.

또한 김종훈 형은 누구보다도 기본소득에 대한 열렬한 지지자이자 자신의 전 존재를 건 활동가였습니다. 본인 스스로가 기본소득이 절실한 불안정 노동자였기에 이론적 각성에 의하기보다는 삶에서 우러나오는 바로 그것에 기반해 기본소득을 열렬하게 지지했고, 그런 만큼 국민들에게 이토록 의미 있는 대안인 기본소득을 널리 알려 현실적인 제도로 정착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똘똘 뭉친 활동가였습니다. 각종 행사에는 반드시 참가하였고, 지역에도 기본소득을 확산시켜야 한다며 기본소득충남네트워크 준비위원회를 제안하고 활동해 왔습니다. 물론 아쉽게도 기본소득충남네트워크(준)은 여러 사정으로 인해 설립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온국민기본소득운동본부, 기본소득충남행동 등에서 멈춤 없이, 오히려 이전보다 더 치열하게 기본소득 운동을 진행해 왔습니다.

김용기 형이 제게 전해 준 일화 중 슬그머니 눈길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던 대목이 있었습니다. 사망하기 두 달 전쯤, 내년 2020년에 김용기 동지와 그의 처가 결혼한 지 20주년이 되는 해이고 세 사람이 만나서 활동한 지도 20년이 되는 해라고 해외여행 한 번 가자고 제안하며 무척 즐거워했었다는 장면이었습니다. 부디, 그곳에선 실질적인 자유를 얻어 자유롭게 자유롭게 사시기를…..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가 만들어진 10년이 되는 이 즐거운 자리에 마침 우리 곁에 없는 이들이 권문석 형과 김종훈 형이라는 점이 너무 아쉬운 것은 저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가 이 자리에 오기까지 가장 열정적인 활동을 했고, 또 그 활동 덕분에 오늘날의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가 탄탄한 초석을 잡았는데 말이죠. 제가 좋아하는 시 중에 정호승의 「부치지 않은 편지」라는 시가 있습니다. 김광석이 곡을 붙여 유명해진 이 시에서 제가 자주자주 읊조리는 구절이 있습니다. ‘꽃피기는 쉬워도 아름답긴 어려워라’ 하는 부분입니다. 권문석 형, 김종훈 형, 두 분은 모두 ‘아름다운 꽃’이었습니다.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가 10년의 대장정을 완수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대장정 후에 더 힘찬 출발을 다지는 것도, 형들이 만들어놓은 아름다운 정원 덕분입니다.

이제 두 동지를 위해 잠시 묵념의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권문석 동지’를 호명 하면 손을 모아 주시고 ‘김종훈 동지’를 부르면 손을 바로 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권문석 동지여!

김종훈 동지여!

정말 수고들하셨습니다. 두 손 모아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