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기획 토론회 (1) 기본소득의 정의와 기본소득 논쟁, “토론 3. 금민, 기본소득의 정의 / 백승호, 기본소득 논쟁의 쟁점과 과제” 토론문 다운로드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연속기획 토론회 “기본소득 쟁점과 설계”
연속기획 토론회 (1) 기본소득의 정의와 기본소득 논쟁

[토론 3]

금민, 기본소득의 정의 / 백승호, 기본소득 논쟁의 쟁점과 과제

이다혜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강사, 고용복지법센터 연구위원)
kerith@snu.ac.kr
두 발표의 의미와 중요성

– 금민의 발표(발표 1)는 기본소득의 개념요소 중 가장 본질적인 요소로서 보편성의 근거를 ‘공유부’에서 도출하고 있고, 이는 기본소득이 일시적 프로그램이 아닌 하나의 권리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정의론 차원에서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볼 수 있음(자세한 논의는 금민, 「모두의 몫을 모두에게」, 동아시아, 2020).

– 백승호의 발표(발표 2)는 최근 우리 사회에서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시행된 긴급재난지원금을 계기로 촉발된 논쟁들을 쟁점별로 정리하고, 특히 기본소득에 대한 무지, 오해 또는 편견에 기반해 잘못 설정된 논쟁구도들을 바로잡고 있음.

– 두 발표를 종합하면, 발표 1은 기본소득의 권리적 측면을 이야기하고 있고, 발표 2는 우리 사회가 기본소득에 대해 “더 나은 논쟁을 할 권리”의 필요성을 제시해주고 있음. (cf. 김은실 외, “더 나은 논쟁을 할 권리: 페미니스트 크리틱”, 2018)

질문 1. 기본소득은 권리인가
(권리라면 어떤 측면이 규명 내지 구체화되어야 하는가)

기본소득은 단순히 4차 산업혁명시대 고용이 감소해서 근로소득을 얻기 힘드니 암울한 미래에 대비하는 차선책이 아님. 소위 “일자리 종말론”은 학술적으로 검증되지 않았고, 역사적으로 근거가 없음. (D. Autor, 2015; 이철수 외, 2018; 이다혜, 2019 등),

– 또한 기본소득을 저성장 시대 경기부양책으로만 바라볼 수도 없음. 기본소득을 고용감소 대처 프로그램, 경기부양책 정도로만 이해하면(물론 그러한 효과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경제 상황,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기본소득의 정당성이 좌지우지될 수 있으므로 지속가능하지 못할 것임.

– 기본소득이 장기적인 정당성을 확보하려면 본질적으로 분배정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바람직하며, 이러한 관점이 권리로서의 기본소득의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임(이다혜, 2019).

기본소득이 자연법상 사상적 근거 뿐만 아니라 장차 국제인권, 헌법상 기본권 및 실정법상 이행 가능한 권리로 자리매김하려면:

– 권리의 내용(기본소득) / 권리의 근거 / 권리의 주체 / 권리에 상응하는 의무의 수범자가 규명되어야 하며, 이 각각의 요소가 정당성을 확보해야 현실사회에서 설득력을 얻고 실행 가능할 것임.

1) 권리의 근거 측면

– 발표 1에서 중점적으로 논의하는 ‘공유부’는 토지, 천연자원(자연적 공유부), 데이터 (인공적 공유부) 등 기본소득의 재원이 될 수 있는 대상이므로 권리의 근거 차원에서 바라볼 수 있음.

– 분배정의에 대한 논의는 크게 두 갈래로 전개되어 왔는데, 하나는 노동가치설을 전제로 한 ‘노동수익권’이며, 다른 하나가 발표1에서 말하는 ‘공유부(에 대한 권리)’임.

노동의 가치에 대한 권리 (“노동수익권”, the right to the whole produce of labour)

– 노동수익권은 법학자 안톤 멩거(Anton Menger)가 사회주의에서의 핵심 주장을 법으로 실현가능하게 하기 위한 일환으로 제시한 이론임(노동가치설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법조사회주의”로 평가되기도 함). 노동을 수행한 사람이 스스로 창출한 모든 가치를 소유할 권리(Anton Menger, 1899, 이철수 ‧ 이다혜, 2012, 이다혜, 2019 참조)

– 노동수익권이 구현되는 사회를 상정할 경우, 근로자는 시장의 수요/공급 법칙에 의해 결정되는 임금(근로소득) 이상의 소득을 확보할 수 있으나, 노동 능력 없는 사람(아동, 노인, 장애인 등)의 권리를 설명할 수 없다는 점, 노동수익권을 문자 그대로 구현할 때 자본가의 사유재산이 부정되는 귀결로 이어져 현행 재산법 체계와 양립하지 못하는 점에서 한계를 갖는다고 멩거 스스로 논증함. 다만 멩거는 노동수익권을 하나의 이상(ideal)으로 보고, 19세기 불평등 해소를 위해 법적으로 실행 가능한 생존권(right to subsistence), 근로권(right to work)를 제시하고 이는 독일 바이마르 헌법(1919)을 필두로, 오늘날 사회적 기본권의 토대가 되었음(이다혜, 2019 참조). 한국의 경우 지금은 없어졌지만 1948년 제헌헌법에 있던 “이익균점권” 조항, 현행 헌법의 노동권과 사회보장권(헌법 제32, 33, 34조), 경제민주화 조항(헌법 제119조)이 이 맥락을 계승한다고 볼 수 있음.

– 노동가치설, 고용 문제 등을 중심으로 한 분배정의 구현 시도가 계속 실패하는 이유는 ① 자본소득의 증식은 항상 근로소득을 추월한다는 점(피케티, 21세기 자본, 2014) ② GDP에서 근로소득이 차지하는 비율이 계속 줄어들고 있다는 점, ③ 과거 노동생산이 가치창출의 주요 원천이었던 산업사회를 중심적 노동 개념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

공유부에 대한 권리 (금민, 2020)

– 토지, 천연자원 등 누구의 소유도 아닌 것에 대한 모든 사회구성원의 지분권, 배당권. 토지나 천연자원 등은 인간의 노동으로 창출되는 것이 아니므로, 기본소득의 근거를 공유부에서 찾는 것은 기본소득을 노동으로부터 단절/독립시키는 근본적인 의미를 가짐. (단, 데이터 공유부의 경우 ‘인공적 공유부’로 보고 있음)

– 종래 분배정의 관련 이론에서 노동가치설만큼 많이 논의되지는 못했지만, 기본소득을 계기로 공유부 개념이 재조명되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임. 분배정의를 공유부 개념을 통해 바라볼 때 노동가치설의 한계를 극복할 잠재력이 있고(특히 토지정의 문제를 정면으로 언급한다는 점에서 그러함), 기술혁신과 변화하는 노동 개념, 생태적 관점에 좀더 부합하는 점에서 의미가 있음.

– 남는 문제: 인공적 공유부, 즉 데이터에 대해서는 관점이 갈릴 수 있음. 만일 데이터 창출도 일종의 ‘노동’으로 볼 수 있다면(젊은 세대는 유튜브와 SNS를 비롯한 각종 플랫폼 활동을 ‘노동’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함), 공유부에 대한 권리도 여전히 노동가치설의 연장선상에 있지 않을까? 토지나 천연자원과는 달리, 데이터 창출의 경우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여기에 기여한다는 명제가 항상 사실일지 반론의 여지가 있지 않을까? ‘데이터 창출’이라는 행위의 성격을 어떻게 규명/정립하면 좋을까

2) 권리와 의무의 주체 측면

– 기본소득 권리의 주체, 즉 기본소득을 수령하는 사람들이 ‘국민’이고,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의무의 주체가 ‘국가’(중앙정부 및 지자체 등)라면 가장 큰 걸림돌 또는 문제의 원인은 바로 주권국가가 될 수도 있음.

권리의 주체: 기본소득 수령 주체가 ‘국민’이라면, 이 땅에 거주하고 생활하는 외국인도 기본소득을 받을 수 있느냐는 문제가 발생함. 기본소득을 실제로 시행한다면 외국인 중에서도 ‘deserving aliens’, 즉 어디까지가 기본소득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외국인인지 선별하는 문제 발생(외국인의 납세 여부, 거주 기간 등) 이미 존재하는 외국인의 차별, 2등시민화 문제가 심화될 우려 있음.

의무의 주체: 기본소득 지급 주체가 ‘국가’라면, 글로벌 사회에서 어떤 국가는 지급하고 어떤 국가는 지급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현존하는 국가간 격차를 더 가시화해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국가와 그렇지 않은 국가,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차이를 심화시켜 이주노동과 난민 문제를 심화시킬 수 있음.

– 기본소득이 글로벌 불평등을 완화하는 것이 아니라 심화하는 기제로 작동하지 않으려면, 전 지구적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가 반드시 필요함(피케티, 2020). 단, 선진국이 더 기본소득 친화적이며 기본소득을 먼저 도입할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가질 필요는 없을 듯. 글로벌 차원에서 일종의 ‘점진적 글로벌 기본소득’을 도입할 경우, 상대적으로 GDP가 낮은 나라부터 시행된다면 글로벌 불평등과 분배정의 문제 해결에 더욱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있을 것임.

질문 2. 기본소득, ‘더 나은 논쟁을 할 권리’의 필요성
(현재의 논쟁구도)

기본소득 v 사회보장

– 기본소득보다 사회보장이 중요하다는 주장. 기본소득은 “뺄셈과 나눗셈이 아닌 더하기(layering)”로(백승호), 기본소득이 사회보장을 대체한다는 것은 기본소득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뿐만 아니라 기존에 형성된 사회보장 제도를 폐지하는 것은 정치적으로도 실현 불가능한 것이므로, 전제가 잘못된 논쟁. 기본소득은 사회보장과 상보적으로 운영될 수 있음.

– 욕구(또는 필요, ‘Need’) v 권리: 복지가 ‘욕구의 원리’에 기반해 있다며 ‘더 필요한 사람, 더 힘든 사람부터 지원하는 것이 옳다’는 주장.

– 그러나 사회보장에는 종류에 따라 그 대상이 선별적인 복지가 있고(ex. 기초생활보장법), 보편적인 복지가 있을 뿐(ex. 건강보험) 기본권에 근거하여 시행되는 모든 사회보장제도는 그 자체로 보편적 권리, 헌법상 기본권임(헌법 제34조 인간다운 생활권, 국가의 사회보장 증진의무).

– 권리는 하나의 가능태이며, 현재 직접 적용받지 않고 있더라도 여전히 권리임(예컨대 ‘현재’ 직장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어도 추후 업무상 재해를 당하면 산재보험수급권이 발생함. 또한 ‘현재’ 빈곤하지 않아도 불의한 상황이 발생하고 요건을 충족한다면 기초생활수급권이 생기는 것임). 따라서 사회보장이 보편적 권리라는 점을 간과하고, 욕구 중심의 체제로만 보면서 이를 기본소득과 대조하는 것은 잘못된 관점임. 사회보장, 기본소득 모두 보편적 권리성을 가짐.

경제 정책 v 복지 정책

– 기본소득의 성격에 대해 ‘복지정책 v 경제정책’ 논란이 전개되고 있는데, 원래 모든 사회보장 정책은 그 자체로 경제적 효과도 동반하기 때문에 양자를 반드시 이분법적으로 보거나, 복지 대 경제의 불필요한 이념 논쟁 구도로 끌고 갈 필요는 없음.

– 예컨대 미국 1930년대 대공황(Great Depression): 이 시기 경기부양을 위해 국가 차원 공공사업을 진행했을 뿐 아니라, 중요하게는 법적으로 사회보장법(Social Security Act) 및 연방노동관계법(National Labor Relations Act) 제정하여 국민들의 사회보장권과 합법적으로 노동조합 활동을 할 수 있는 근로3권을 법제화했음. 국민의 노동, 복지 권리를 보장하여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보장해야 소비도 증대하고 경제 활성화가 이루어질 것으로 보았기 때문.

기본소득 v 노동 의무

– 기본소득이 근로유인을 감소시키고, 기본소득 시행할 경우 사람들이 일하지 않거나 노동의 가치가 저하될 것이라는 주장.

– 현실적 차원의 반박: 적은 액수로 시작하는 기본소득은 근로유인을 감소시키지 못함. 설령 소득대체율 100% 기본소득 사회를 가정하더라도 인간은 자발적 노동, 새로운 노동을 찾아나서게 될 것임.

– 규범적 차원의 반박: 현대 국제인권법, 헌법상 기본권 및 노동관계법령은 ‘노동의 의무’를 지지하지 않음, 헌법 제32조의 근로 의무 조항은 사회에서 노동의 가치를 선언적으로 확인한 것일 뿐 법적 의미가 없다고 보는 것이 다수설(권영성, 전광석 등). 만일 법제도적으로 노동 의무가 시행된다면 강제노동, 노예제의 부활이 될 것이며 이는 ILO 국제노동기준에 정면으로 위배(ILO C29, Forced Labour Convention: 노동의 모든 영역에서 강제노동 철폐는 국제노동기준의 핵심적 내용이며, 그러므로 노동의무를 근거로 기본소득을 반대하는 것은 의미가 없음.

기본소득 v 재원 마련

– 예산적 한계에 근거한 기본소득 반대론. 예산 편성에 대해 신중하고 정교한 논의가 꼭 필요하지만, 본질적으로 예산은 결국 국민의 정치적 합의를 통래 편성되고 법제도적 선택을 통해 집행되므로 현재의 예산 구조만을 근거로 기본소득 도입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할 수 없음.

– 이미 우리 사회의 근거를 이루고 있는 기존의 각종 권리를 집행하기 위해 많은 예산과 비용을 지출하고 있으며(차별금지, 집회와 결사의 자유, 교육권, 근로3권 및 현존하는 사회보장권 등), 모든 권리는 처음 시행될 때 예산을 근거로 한 저항에 항상 부딪혔으나, 권리가 가져오는 ‘가치’에 대해 사회적 합의가 형성되면 더 이상 예산을 근거로 권리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음. 기본소득을 권리의 연장선상에서 본다면 같은 논의가 가능함(이다혜, 2020).

질문 3. 더 나은 논쟁 –기본소득을 통해 물어야 할 질문: 노동의 의미와 가치
(어떤 사회를 만들어 갈 것인가? 어떤 노동을 원하는가?)

디지털 기술혁신과 노동의 개념 변화

– 기본소득은 앞서 말한 “노동 종말론”, 즉 대량실업에 대비한 원조금이 아니라, 오히려 노동의 질적 변화에 대응하는 효과적인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음.

– 디지털 전환 등 기술혁신은 일시적으로 일부 직종 일자리를 대체할 수도 있지만, 현재 그보다는 새로운 형태의 노동이 부상하고 있는 것이 문제임(디지털 플랫폼 노동, 크라우드워크 등). 이들은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 등을 통해 하나가 아닌 다수 기업으로부터 일거리를 찾고 소득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일하므로, 기존 근로계약이 상정하는 사용자와 근로자의 1:1 관계로 규명하기 어려워 기존의 노동법(근로기준법, 노동조합법, 산재보험법 등)이 갖고 있는 근로자 개념에서 벗어나 있음. 즉 디지털 노동자들은 노동법 및 사회보장의 보호에서 배제되어 있음(이다혜, 2017).

– 플랫폼 노동자들은 기존 노동법의 협소한 근로자 개념에 들어맞지 않는 지점이 많기 때문에, 노동법 자체가 플랫폼 노동을 포섭하기 위해 까다로운 “사용종속관계” 기준에서 탈피하고 있는 법적 변화도 시도되고 있음. 대표적인 예로 플랫폼 노동자의 근로자성 인정 기준을 획기적으로 바꾼 2018년 미국 캘리포니아 Dynamex판결과 이를 법제화한 AB5 법안(이다혜, 2019 참조).

– 근로자의 범위 문제에 대해 세계적으로 많은 논의가 있지만, 현존하는 노동법의 판단 기준들을 단번에 개정하는 것이 법리적으로 쉽지는 않음. 현재 디지털 특수고용자들에 대해 산재보험이나 고용보험으로의 편입 등, 제도적 논의가 진행되고 있지만 이는 부분적이며, 장기적 해결책이 되지는 못함. 디지털 플랫폼 노동자들은 대부분 장시간 노동에도 불구하고 소득수준이 매우 낮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는데(Berg, 2016; 한국고용정보원 조사, 2019), 기본소득이 시행된다면 갈수록 증가하고 있는 이러한 플랫폼 노동자들은 근로소득 + 기본소득을 더해 즉각적인 소득보장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음(이다혜, 2019 참조).

기본소득을 통한 돌봄노동의 정의로운 재구성

– 기본소득을 통해 의미있는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또다른 영역은 여성 노동의 해방적 측면임. 여성에게 전통적으로 기대되는 성역할로 인해 여성은 일터에서의 임금노동(wage work), 가정에서의 돌봄노동(care work) 모두를 수행하여 만성적 ‘시간 빈곤“(time poverty), 돌봄불이익(care penalty)상태에 놓여 있음.

– 이로 인해 여성의 노동은 3가지 측면에서 불평등에 노출되어 있음 ① 일터 임금노동에서의 불리함과 불평등, ② 가정에서 돌봄노동 수행을 떠맡는 불평등, ③ 직업으로 돌봄노동을 수행하는 유급 돌봄노동자(paid care workers)의 경우 돌봄노동이 사회적으로 저평가되고, 공식 노동으로 제도적 보호를 받지 못해 만성적 저임금과 열악한 근로조건에 시달리는 문제(이 범주에 대해 이다혜, 2019 참조).

– 여성 노동문제 대응을 위한 정책은 지금까지 주로 여성의 취업률 향상, 즉 여성을 노동시장으로 내보내는 방식에 초점이 맞춰져 있음(「남녀고용평등법」 제1조: 여성 고용 촉진을 목적으로 함, 자녀양육 등의 주체를 여성으로 상정하고 여성에 대한 차별금지 위주로 제도를 설계함). 그러나 인간의 노동은 다른 재화처럼 저장될 수 없고 반드시 휴식, 재생산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임금노동과 돌봄노동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기존의 법제도는 남성 생계부양자-여성 전업주부 모델을 기초로 남성 근로자의 임금노동만을 보상하는 방식으로 설계되어 있음. 즉 여성의 노동은 필수적이면서도 법의 시야에서 벗어난 ‘그림자 노동’(shadow work)으로 취급.

– 임금노동 영역에서의 차별 시정만으로는 이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고, 돌봄노동을 남녀 모두 평등하게 재분배하는 것이 필요함. 보편적 기본소득은 가정을 단위로 하지 않고 모든 ’개인‘에게 주어져 여성 노동에 지지대의 역할을 하며 원치 않는 돌봄노동을 거부할 권리로 이어질 수 있고, 또한 남성으로서는 기본소득을 통해 과도한 임금노동 시간을 거부하고 가정으로 돌아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줄 수 있음. 이러한 효과는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고려할 때, 경제적으로만 산정될 수 없는 중요한 가치임.

노동의 인격권, 시간주권, 근로선택권의 강화

– 기본소득은 노동의 실질적 자유를 증진할 수 있으며, 특히 ‘시간주권’을 확보할 계기를 제공할 수 있음. 과거 고도 경제성장기에는 장시간 노동을 감수하고서라도 높은 임금을 확보하려는 경향이 비교적 강했지만, 현재의 청년 세대는 인격적 존중과 일과 삶 양립(work-life balance)이 가능한 직업을 갖는 것이 중요한 가치로 부상하고 있다 (cf. 2018년 근로기준법에 직장 내 괴롭힘 처벌제도 도입). 특히 한국 노동시간은 OECD 국가들 중 계속적으로 상위권 유지하고 있음(2018년 주 52시간제 도입 이후 약간 감소함).

– 기본소득이 도입된다면 근로 여부와 연동되지 않은 별도의 수입원이 확보되므로 근로자 입장에서는 초과근무를 줄일 수 있는 여유 내지 교섭력이 확보됨. 근로자가 본인의 시간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확보하는 것은 양질의 노동(decent work)에 기여함은 물론이지만, 일과 삶의 조화를 증진시킴으로 인해 일터뿐 아니라 삶 전반에서의 인간다운 생활권을 향유하는 것과 직결됨. 독일 연방노동사회부 「노동 4.0」 녹서 및 백서에서는 이를 “시간주권”(zeitsouveränität)이라는 개념으로 설명. 기본소득은 ‘소득에 대한 권리’뿐 아니라, ‘시간에 대한 권리’도 확보할 수 있는 계기를 줌.

– 기본소득은 또한 원치 않는 종류의 노동이라 할지라도 단지 생계유지를 위해 억지로 감내하지 않고, 근로자가 양질의 노동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를 ‘근로선택권’으로 명명할 수도 있음. 헌법에서는 이미 직업선택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으나(헌법 제15조), 임금노동이 아닌 다른 방편으로의 생계유지 수단이 없는 현실에서 직업선택의 자유는 제한적이고 소극적인 의미만을 가짐. 기본소득을 통해 새로이 보장되는 근로선택권은 단순히 국가가 개인이 직업을 선택할 자유를 방해하지 않는다는 소극적인 권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본소득이라는 물질적, 경제적인 토대를 바탕으로 각 개인이 양질의 노동이 아닌 ‘나쁜 노동’을 거부하고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로 그 의미와 범위가 확장될 수 있음(이다혜, 2019 참조).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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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연방노동사회부, 노동 4.0 녹서(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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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혜, “4차 산업혁명과 여성의 노동: 디지털 전환이 돌봄노동에 미치는 영향을 중심으로”,「법과사회」 제60호, 법과사회이론학회,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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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케티, 자본과 이데올로기, 문학동네, 2020.
Menger, A., The Right to the Whole Produce of Labour: The Origin And Development Of The Theory Of Labor’s Claim To The Whole Product Of Industry, McMillan Press (18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