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도 실패했다는데… 그래도 기본소득이다?
[해설] 고용 증대란 목표부터 제한적이었던 실험… 기본소득의 진짜 목표는 이거다
안효상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상임이사)
지난 8일(현지 시각), 최초로 국가 단위의 기본소득 실험 결과가 나왔다. 국내외 언론은 거의 예외 없이 ‘고용을 늘리지는 못했지만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만들었다’는 식으로 핀란드 기본소득 실험 예비 결과를 다뤘다. 하지만 얼핏 보기에 간단해 보이는 이 결론 아래에는 우리가 생각할 문제가 여전히 많이 놓여 있다.
기본소득은 모두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개별적으로 지급하는 소득을 말한다. 그렇기에 낯선 생각이다. ‘돈은 자기가 일을 해서 벌어야 하고, 복지 서비스는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특히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니 그런 기본소득이 최근 몇 년 사이에 국내외적으로 관심을 끄는 상황 자체가 기이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기본소득이 관심을 끄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실리콘밸리의 일부 유명인사들은 ‘일자리 없는 미래’에 대한 대안으로 기본소득을 말하며 여기에 몇몇 경제학자들도 가세한다. 빈곤을 퇴치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주장이 나온 지도 꽤 오래된 일이다.
사회복지학계와 일부 정책입안자들은 완전고용과 사회보험에 기초한 기존의 복지국가가 한계에 부딪혔다는 점에 주목한다. 스위스 국민투표 발의자들이 주장했고, 한국의 국가인권위에서 만든 개헌안에 담긴 것처럼 기본소득을 권리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핀란드 기본소득 실험은 이처럼 기본소득을 둘러싼 다양한 논의가 분출하는 시점에서 실시되었다.
핀란드 기본소득 실험 들여다보기
2016년 말에 최종 계획이 확정되어 2017년 1월부터 2년간 실시된 핀란드 기본소득 실험은 온전한 의미의 기본소득을 실험한 것은 아니었다. 핀란드 정부는 노동의 변화에 대응하고, 노동유인을 좀 더 강화하며, 복잡한 기존 사회보장 체계를 바꾸는 포괄적인 사회보장 개혁을 추진하고자 했고, 이번 기본소득 실험도 이런 맥락에서 추진된 것이었다.
기본소득 실험 설계를 맡은 Kela(핀란드 사회보험 기관)는 조건 없는 완전 기본소득, 부분 기본소득, 음의 소득세(negative income tax) 등 다양한 모델을 정부에 제안했는데, 최종적으로 결정된 것이 실업자를 대상으로 하는 부분 기본소득이었다.
주된 실험 목표는 기본소득이 고용과 소득에 미치는 영향이었지만, 기본소득이 수급자 삶의 질에 미치는 효과도 살펴보기로 했다. 이를 위해 핀란드 정부는 25~58세 실업자 가운데 전국에서 무작위로 2천 명을 선별, 월 560유로(약 72만 원으로 대략 실업급여와 같은 금액)를 2년 간 주는 실험을 실시했다.
기본소득 대상자들은 이 기간 일자리를 얻어도 기본소득을 계속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여느 실업자들과 다른 점이었다. 정부는 또 실험의 효과를 따져보기 위해 기본소득이 아닌 실업급여를 받는 통제집단을 설정했다. 또 행정등록 데이터 이용과 설문조사, 두 가지 방식을 이용해 기본소득의 효과를 측정했다.
이번에 ‘예비 결과’가 나온 것은 행정등록 데이터가 2017년 기준이고, 설문조사 일부만 분석됐기 때문이다. 오는 4월에는 설문조사 전반을, 내년에는 실험기간 전체를 분석한 결과가 나올 예정이다.
기본소득의 진짜 목표
지난 2월 8일 핀란드가 공개한 기본소득 실험 예비 결과
이번 예비 결과에 따르면, 기본소득 수급자는 실업급여를 받는 이들과 비교할 때 고용 상태가 더 낫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실험의 주된 물음인 ‘기본소득이 실업을 해결할 수 있는가’에는 ‘그렇지 않다’는 답이 나온 셈이다. 반면 ‘기본소득이 노동 유인을 떨어뜨리지 않는다’는 증거가 나왔다고도 할 수 있다.
‘웰빙’이라는 점에서도 긍정적 효과가 나타났다. 기본소득을 받는 사람들은 통제 집단에 비해 건강 및 스트레스와 관련된 문제가 분명히 적었고, 어떤 일에 집중하는 능력도 더 나았다. 또한 자신의 장래에 대한 확신이나 사회적 쟁점에 대해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믿음도 크다는 결과가 나왔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기본소득이 당장 고용 상태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지만, 수급자들은 장래에 일자리를 구할 가능성을 더 크게 본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일각에선 핀란드 기본소득 실험 예비 결과를 두고 고용 효과가 없으니 ‘실험이 실패했다’고 평가했다. 고용 증대라는 실험 목표에 비추어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기본소득의 목표는 노동 유인을 높이고 그 결과 고용을 늘리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18세기말 토머스 페인과 토머스 스펜스에 의해 원형적인 기본소득 아이디어가 제출된 이래 기본소득은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이유에서 지지해 왔다. 그러나 그 기본 의미는 사회 정의를 실현하고, 모든 사람들이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다.
오늘날 미국의 알래스카주에서는 영구 기금을 통해 얻은 수익의 일부를 모든 주민에게 분배하고 있다. 기금의 재원인 석유라는 자원이 알래스카주의 모든 사람들에게 속하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또한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삶의 물질적 기반을 제공함으로써 경제적 공포로부터 해방시킬 때 비로소 자유를 향한 걸음을 뗄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
이런 기본소득의 의미를 생각할 때 고용 효과를 주된 목표로 한 핀란드 기본소득 실험은 적절한 방향성을 갖지 못한 매우 제한적인 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도리어 이번 실험을 계기로 현대 사회에서 고용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지, 사람들이 하는 다양한 일과 활동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등에 대해 새롭게 질문을 던져야 할 것이다.
이 질문은 이번 핀란드 기본소득 실험에서는 제기되지도, 조사되지도 않은 것이지만, 오늘날 우리에게는 중요한 질문이다.
인간의 창의성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지는 한편, 기술 변화로 인해 고용 노동은 축소될 전망이고 인간 상호 간의 돌봄은 그 중요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그럼에도 삶의 의미를 고용 노동으로 축소하는 것은 실효성도 없고, 정당성도 떨어진다. 기본소득이 모두에게 일정한 물질적 기반을 제공하고, 이로써 삶의 불안을 줄여준다면 삶의 의미는 더욱 풍부해지고, 사회적 관계 또한 좀 더 긍정적이고 의미 있는 것으로 바뀔 가능성이 커질 것이다.
핀란드 기본소득 실험이 매우 제한적이긴 하지만, 예비 결과에서 나온 것처럼 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였다고 한다면, 이는 기본소득이 삶의 불안을 줄이고 사람들이 자기 삶에 대한 주도성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정치적 관점을 갖고 있든 반대하기 어렵지 않을까.
사실 기본소득은 인간과 시민의 권리다. 이는 실험할 수도 실험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아무도 노예제 폐지를 실험하자고 하지 않았고, 그 누구도 참정권 부여를 실험하자고 하지 않았으며, 여성의 동등한 권리를 실험을 통해 부여하자고 하지 않았다. 그러한 권리는 점진적이건 급진적이건 성취되어 왔을 뿐이다.
기본소득 실험은 현재에도 다양한 지역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실험을 사회적 변화를 추구하는 집단 지성의 힘을 발휘하는 계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 앞에 놓인 과제를 해결해가는 정치적, 사회적 과정의 일부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핀란드 기본소득 실험도 그러한 과정의 하나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이번 예비 결과에서 눈에 띄는 점은 기본소득 수급자가 통제 집단에 비해 기본소득에 대한 지지도가 더 높다는 점이다. 이는 한국에서 흔히 말하는 ‘복지 경험’의 효과일 텐데, 실험이 앞으로도 이어진다면 이런 의미를 가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