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전히 중요한 질문
다중활동을 하는 인간의 사람답게 살 권리는 어떻게 보장될 수 있을까?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산업자본주의에서 신자유주의의 금융자본주의를 거쳐 디지털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로 진화해가고 있다. 하지만 변화하는 자본주의의 모습에서 여전히 ‘변함없이’ 주목해야 할 것은 노동의 착취구조와 가격매김으로 인한 노동하는 인간의 길들여짐이다.
인간이 소득보장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하는 노력들이, 반드시 타인의 ‘인정’과 ‘가격매김’에 의해서만 충족될 수 있는 상태에서, ‘가격매김’이 되는 노동의 총량자체가 줄어들거나 가격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매겨지는지 계속 모호해지는 지금의 디지털 자본주의의 시대에, 즉자적 인간의 소득에 대한 욕구는 어떻게 충족될 수 있을까? 다중활동을 하는 인간의 사람답게 살 권리는 어떻게 보장될 수 있을까? 인간의 사람답게 살 권리를 향한 기본적인 협상력이 있는가?
복지자본주의에서 근로소득에 의존해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개인들이 전제된 상태에서, 우리는 인간이 ‘다중활동’을 하는 데 있어 과연 외부적 유인이라는 것이 필요한가에 대해 반문해볼 필요가 있다. 삶의 영위를 위한 다양한 인간의 활동들이 그 자체로 평가될 때는 ‘노동, 일, 또는 활동’은 근본적 인간의 욕구이자, 필수적인 사회 유대, 미덕 및 타인에 대한 존중감의 근원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 것이다.
시장소득이 아닌 이러한 기본적 수준의 ‘사회적 소득’은 개인으로 하여금 비인간적인 노동조건을 거부할 수 있도록 하는데, 이는 개인이 단위당 시간의 ‘이용가치’와 시장에서의 ‘교환가치’를 선택하고 판단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다. 조건 없이 지급되는 이러한 보편적인 급여는 복지국가에 개인이 의존하게 되는 공공부조나 기타 사회보호와는 다르며, ‘자기 스스로 결정하는 활동’(self-activity)을 장려하고 자유롭게 다중활동을 하는 인간의 본연의 모습을 찾을 수 있게 돕는다. 기본소득의 개념은, 특히 임금노동의 정의가 모호해지고 ‘가격매김 (또는 높은 가격매김)’이 될 수 있는 노동의 필요가 총량적 측면에서 점차 줄어드는 디지털자본주의 시대에서 ‘현실적인’ 논점을 제시한다. 변화하는 노동시장과 복지국가의 정합성 논의에 있어 기본소득제는 단계적으로, 그러나 실현가능한 대안으로 검토될 수 있는 것이다.
2. 지금 당장 필요한 기본소득 VS 이상적 기본소득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가지고, 이제 기본소득 논쟁의 다음 장은 어디를 향해야 할 것인가? 지금까지 기본소득과 다른 사회보장제도의 ‘정합성’을 신중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주장되어 왔다. 하지만, 이제 기본소득제가 구체적인 정책 설계 및 정치적 차원에서 논쟁이 되고 있어, 지금부터는 완전기본소득과 그 외의 것들을 구분하여 논의를 진행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다. 그리고 기존 사회보장제도와의 정합성을 논할 때 그 작업의 전제로 ‘어떤’ 기본소득을 추구하는지에 대한 입장도 명확하게 표명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기본소득, 복지국가, 이에 더해 최근 ‘전국민 고용보험’까지 많은 전문가들의 의견이 이미 넘치고 있다. 기본소득제가 복지정책이냐, 경제정책이냐에 대한 논쟁, 무엇이 먼저이고, 양립이 가능한지 아닌지의 논쟁에서 좀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 모든 정책은 여러 기능이 있는데, 예를 들어, 실업보험은 실업자의 소득을 보전해주는 복지정책이자 경기불황과 호황 시 유효수요를 조정해주는 자동stabilizer, 즉 경제정책이기도 하다. 기본소득도 여러 기능이 있겠고, 그래서 이 한 가지로 완성된 복지정책이나 경제정책이 될 수 없기 때문에, 기존의 사회보장제도의 정합성을 논하며 궁극적으로 하나의 제도가 더 추가되는 단계에서 어떤 기본소득을 논하는지 명확히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어, 다차원적인 배제의 문제가 중첩되어 있는 빈곤층과 장애인이 경험하는 여러 어려움은 기본소득제로 해결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빈곤층 대상과 저소득 장애인단체에서 기본소득에 대한 반대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빈곤정책’은 여전히 고민해야 할 중요한 문제이며, 지금 논의되는 기본소득으로 빈곤층이 없어진다는 것은 논리가 약하다. 때문에, 기본소득 정책설계자는 빈곤층 대상 복지정책, 장애인 대상 복지정책과 기본소득제의 정책조합의 구체적인 모형부터 설계해야 할 필요가 있는지 않을지 고민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이제 이상적 모형의 기본소득을 넘어, 그리고 로드맵을 넘어, 단기적으로 당장 실현 가능한 기본소득제에 대한 고민, 그리고 그 기본소득제도가 현존하는 정책과 어떻게 조응할 수 있는지 구체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한국에서 현재 근로연령층 대상의 권리 기반의 소득보장 정책은 부재하다. 노동의 개념범위가 확장될 필요가 있듯, 근로연령대의 소득보장제도는 다양한 일을 하는 사람들의 노동을 인정하고, 보다 권리기반의 소득보장제도를 도입하여 (대체가 아닌 layered) 다층체계를 구상해볼 필요가 있다. 즉, 권리기반의 1층과 소득비례형의 2층 소득보장제도를 제안해볼 수 있다.
3. Seize the Crisis : 위기에서 보인 연대감
기존의 사회보험 중심의 사회보장 제도는 전통적 표준고용관계, 그리고 임금노동자를 전제로 설계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고용관계에서 이탈하여 액화되는 모습을 보이는 노동은 기존의 사회보장제도에 포괄되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 일의 원자화로 인해 노동시간과 임금도 작은 단위로 쪼개져 다수에게 분배되는 플랫폼노동에 주목해서 살펴본다면, 노동의 원자화는 ‘일’ 또는 ‘근로’의 정의, 임금 수준 및 노동시간 관련 제도와 사회보장제도 전반에 걸쳐 여러 부분에서 부정합성을 보인다.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이미 취업과 실직의 개념은 모호해졌는데 이에 더해, 이제는 경제활동인구와 비경제활동인구의 구분도 모호해졌다. 실직자의 소득보장 욕구를 충족시킬 제도가 고용보험이었다면, 이제 ‘욕구’와 자격충족 여부를 확인하기 점점 더 어려워져 사각지대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 특히, 변화하는 노동과 오래된 복지제도 부정합이 어떻게 일하는 사람들의 불안정성 확대에 기여하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더해, 최근 코로나전염병의 확산으로 한국의 사회안전망의 사각지대가 전면적으로 드러나며,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3주년 연설에서 “전 국민 고용보험 시대의 기초”를 놓겠다는 발표를 하였다. 우리 사회가 코로나 전염병의 확산이라는 재난을 경험하면서 특히 표준적 고용관계에서 벗어나 일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실업안전망의 한계가 드러난 것이다. ‘전국민 고용보험’의 제안은 임금노동자의 범위를 넘어 ‘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소득보장을 해줄 사회안전망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에 그 배경이 있다. 또한 현재 ‘전국민 고용보험제’뿐만 아니라 기본소득 논의가 활성화되고 있는 것은, 재난을 겪으며 모두가 불안정해질 수 있기 때문에 모두가 서로를 책임지자라는 연대의식이 발현되고 있는 것이라고 희망해볼 수 있다. 이 공감대의 확대를 어떻게 해석하고 긍정적인 권력자원으로 동원시킬 것인가?
4. 최근의 “복지국가 vs 기본소득“ 프레임 생산의 근원적 이유를 물어야
복지국가 대 기본소득, ‘전국민 고용보험’ 대 기본소득, 사회서비스 대 기본소득의 대립 프레임이 지속되고 있다. 기본소득론자들은 이것이 서로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라고 설명하지만, 전혀 먹혀들고 있지 않다. 이 현상을 적극적으로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오해의 프레임 생산의 근원적 이유가 무엇일까?
추측해볼 수 있는 것이 몇 가지 있다. 먼저, 예산 제약과 재정 건정성 프레임이다. 두 번째, 욕구과 권리가 복지국가에서 같이 갈 수 없다는 프레임이다. 이 두 가지는 한국의 복지국가 발달 역사를 살펴보면, 경로 의존성이 있어 경로 이탈의 전략이 필요하다. 하지만 세 번째로, 기본소득 원리의 간결성은 뒤집어 말하면 관련한 설명이 불친절하다는 측면이 있다. 많은 사람들의 오해는 기본소득 지급은 너무 쉽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것을 쉽게 대체한다는 것이다. 이 프레임을 어떻게 바꿀지에 대한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의 전략 고민이 필요하다.
5. 누구나 주인이 될 수 있는 기본소득, 오히려 주인 없는 기본소득제가 될 수 있다: 사회운동, 노동운동과의 연대는 어떻게 이루어낼 것인가?
현재의 디지털 자본주의에서 보여지고 있는 분배구조에 대한 적극적 개입을 늦출 수가 없고, 프리케리어트는 유럽복지국가의 황금기시대의 표준적 고용형태의 노동자들과 질적으로 다른 모습으로 확대되고 있어, 우리가 사민주의를 추구하더라도 이제 새로운 경로를 모색해야 한다.
한국 불안정노동시장의 모습은, 불안정한 삶 속으로 노동자들을 내몰고 있다는 것 자체보다 더 장기적인 측면에서 우려되는 지점이 있다.
이중노동시장의 고착화로 인해, 외부노동시장에 머물며 불안정한 삶을 경험하고 있는 불안정노동자들이, 제도적 구조적 환경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전면적인 개혁을 요구할 수 있는 환경적 필요조건들이 갖추어졌는지가 더 중요한 질문일 수 있다. 즉, 변화하는 노동시장에서 다양한 고용형태로 일하고 있는 청년, 플랫폼노동자, 불안정노동자들이 복지국가 지체로 인해 충분히 복지제도에 포괄되지 못한 상황에서, 실질적인 ‘복지국가 경험’이 상대적으로 적은 노동자들은 복지국가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으며, 기본소득이든 복지국가이든, 복지동맹은 어떠한 과정을 통해 형성될 수 있는가. 노동시장구조 개선과 사회권 확대를 위한 동원(mobilize)에 있어, 그리고 탈상품화와 가격매김에 대한 저항으로, 누가 주체가 되어 동맹을 이끌어 낼 수 있을까. 불안정노동시대의 가장 부정적 함의는, 즉, 불안정노동자의 증가와 복지국가 지체에 맞서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낼 주체(agency)가 누구인가에 대한 불확실성에 있는 것이다. 기본소득이 자본주의의 길들여짐에 대한 저항, 인간의 다중활동에 대한 권리 보장이 되기 위해서는 숙의과정과 주체화 과정이 사회운동이 함께 이루어져야 하는데, 누구나 주인이 될 수 있는 기본소득은 오히려 주인 없는 기본소득제가 될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