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 바람이 일고 있다, 점점 더 크게
2015년 세계 기본소득운동에 대해
2013년 스위스에서 기본소득 실시 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치기 위한 ‘기본소득 국민발의’가 성공한 이후, 기본소득운동은 점점 더 힘을 얻어가고 있다. 올 한해만을 돌아봐도, 적지 않은 변화와 성과가 눈에 띈다. 이 변화와 성과는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asic Income Earth Network, 약칭 BIEN)에 속해 있는 23개국 네트워크들의 노력에서 비롯된 것도 있고, 각자의 자리에서 현실의 문제에 대한 대안을 찾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만나 형성된 것도 있다. 세상의 변화가 늘 그렇듯이.
2015년에는 특히, 전 세계에서 기본소득의 실현을 위한 정치적 노력이 눈에 띄게 커지고 있다. 여러 정당들이 선거공약으로 기본소득을 채택했고, OECD 가입국들에서 기본소득을 부분적으로 실시하려는 구체적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다.
이러한 정치적 노력의 바탕에는 몇 가지 문제의식이 있는데, ‘인간의 존엄함을 지키는 빈곤 퇴치’, ‘생태적 전환’, ‘자동화 시대의 안전망’ 등이 그것이다. 즉 신자유주의 시대의 경제 사회적 불평등과 빈곤 문제에 대한 해법으로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흐름, 화석연료 고갈과 기후변화 문제를 보통사람들의 희생 없이 극복할 수 있는 매개체로서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흐름, 현대 기술변화의 핵심인 ‘자동화’로 인한 삶의 변화에 대응하는 제도로서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흐름이 날로 커지고 있다.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새로운 인권운동
기본소득 지지자들이 우리 모두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존엄함을 강조하는 것은 사실 최근 현상이 아니다. 기본소득론의 개념 자체가 개별 인격을 존중하는 사회제도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특히 유럽에서) 사민주의 정부들이 삶의 안전망으로 실시해온 생활보장제도가 유효하지도, 적합하지도 않다는 비판이 깔려 있다.
오늘날, 빈곤선 아래의 사람들이 정치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하려는 취지로 실시돼온 사민주의적 생활보장제도는 모욕과 낙인효과라는 근원적 문제와 포괄성 부족이라는 효력 문제를 모두 갖고 있다. 생활보장제도의 구제 대상임을 확인하는 심사과정에서 개별 인격에게 가해지는 모욕과 낙인효과는 끊임없이 구성원의 일부를 존엄한 시민 자격이 박탈된 사람들로 만들고 있다.
더욱이, 20 대 80 사회에서, 구성원의 다수가 빈곤 위협에 처해 있는 사회에서, 임금노동으로 소득을 얻을 기회조차 갖기 어려운 사회에서, 임금노동이 아닌 노동과 활동이 사회적 경제적으로 공동체에 크게 기여하고 있지만 폄훼되는 사회에서, 이런 선별적 생활보장제도는, 대다수의 구성원을 수혜대상으로 정하지 않는 한, 실효성이 의심된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캐나다 앨버타 주의 두 대도시, 캘거리와 에드먼턴에서 기본소득으로 모든 구성원의 기본적 생활을 보장하는 정책을 실시하려 하고 있고, 핀란드 중앙정부와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시에서 기본소득 시범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생태사회로 전환하는 의미 있는 매개체
화석연료 시대의 종말과 기후변화는 재앙이지만, 모두에게 재앙인 것은 아니다. 직접적 피해는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에게 가장 심하게,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들에게 가장 약하게 가해지는 불평등한 재앙이다. 이러한 생태 문제와 생태적 불평등 문제를 동시에 풀어나갈 매개로 기본소득이 부상하고 있고, 미국 오레곤 주의 법안은 대표적 사례이다.
2015년 4월, 미국 오레곤 주의회에서 생태문제 개선을 위한 기본소득 법안이 통과됐다. ‘상한제와 배당(Cap and Dividend)’을 위한 2개의 법안이 통과된 것인데, 환경오염 발생 측에게 탄소배출권을 판매하고 그 수익금을 모든 오레곤 주 사람들에게 나눠주되, 매년 탄소 배출 허가량을 줄이는 정책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직접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매년 발생하는 모든 거주민들의 수익금으로 오레곤 주의 자연자원에 투자하는 것을 내용으로 담고 있다.
또한, 여러 나라의 녹색당들이 이런 문제의식에서 기본소득을 지지했고, 나아가 기본소득을 사회적 불평등과 빈곤 문제에 대한 대안으로 받아들이면서 총선 공약으로 채택했다. 2015년에 총선을 치른 영국 잉글랜드웨일스녹색당, 포르투갈 PAN(사람-동물-자연을 뜻하는 Pessoas-Animais-Natureza가 정식명칭)이 공약으로 내세웠고(각각 1명이 당선됐다), 2016년 총선을 앞두고 캐나다녹색당, 한국녹색당 등이 공약으로 채택했음을 공표했다.
자동화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안전망
“농업생산에서 말[馬]의 역할이 트랙터의 도입으로 처음에는 줄어들다가 나중엔 완전히 없어진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생산의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서의 인간의 역할은 줄어들게 돼 있다.” _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바실리 레온티예프
자동화 시대의 삶, 자동화가 노동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고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기본소득이 점점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기본소득 지지자들의 직접적 영향보다는 ‘접속’, ‘공유’ 등의 개념에 주목하는 IT기술혁명 관계자들 사이에서 자연스레 형성된 동기가 더 큰 흐름이 바로 이런 기본소득 지지이다.
대표적인 일화는 2015년 9월 29일, 세계기술네트워크 주최로 열린 ‘기술적 실업에 관한 세계정상회의’에서 저명인사들이 기본소득을 지지한 것이었다. 클린턴 정부 시절에 노동장관을 지낸 로버트 라이시(현재 미국 민주당 샌더스 대통령후보의 선거캠프에 결합해 있다), 노벨상 수상자이자 컬럼비아대학교 경제학자인 조지프 스티클리츠, 전기자동차로 유명한 테슬라모터스(Tesla Motors)의 수석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인 제럴드 허프 등이 이날 지지를 표명했다.
기대하지 않은 일이었다. 이 회의의 주요 주제는 자동화가 노동시장에 미치는 효과였는데, 자동화에 대한 정책 대응을 논하는 동안, 거의 모든 참석자들이 기본소득을 지지한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생계를 일자리에 의존하고 있는 세상에서, 자동화는 영구적인 저임금 또는 영구적인 실업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 다소 극단화하자면 소수의 고용인(자본가), 소수의 피고용인(정규 노동자), 다수의 실업자로 삼분된다는 미래 전망이 참가자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그리고 기술혁명이 낳은 부작용은 기술혁명이 낳은 혜택으로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기술혁명 덕분에 생겨난 부와 수익의 원천을 공유재산으로 만들어서 그 수익금을 모든 사람의 기본적 생활소득으로 보장함으로써, 모든 사람이 자동화의 혜택을 공유하게 하자는 것이다. 예를 들어 로버트 라이시는 특허권과 상표권을 공유재산으로 삼는 방법을 제안했고(다소 미국에만 해당하는 방법일 수는 있다), 일찍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이자 기본소득 지지자인 허버트 사이몬은 지식과 경제활동을 통해 버는 소득의 90%는 공유재인 지식을 활용한 대가임을 역설하면서 기본소득 재원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전 세계가 똑같이 전면적 자동화를 겪진 않을 것이고, 노동자들의 힘이 약해 저임금 구조가 가능한 지역과 나라, 분야에서는 기계보다는 노동력을 동력으로 삼으려 할 것이다. 그래서 자동화 현상은 불균등할 수 있다. 하지만 자동화로 인한 일자리 감소는 이미 급물살을 타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기본소득을 대응책으로서 주목하는 추세는 늘어날 듯하다.
기본소득 실험들의 다양한 모습
앞에서 말했듯이 최근 들어, 나미비아, 인도의 빈민지역에서 실시된 이전의 기본소득 시범사업과 달리, OECD 가입국 정부들이 기본소득 정책을 실시하려고 나섰다. 2015년 핀란드 중앙정부,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시 등 30개 도시, 캐나다 앨버타 주 에드먼턴과 캘거리, 한국 성남시, 미국 오레곤 주 등이 그런 정부들이고, 2013년에 국민발의된 스위스의 기본소득은 2016년 국민투표를 앞두고 있다.
이 기본소득 정책들은 모두 기본소득 논의의 진전을 가져다줄 것이지만, 우리나라의 성남시,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시, 핀란드 정부 등이 실시하려는 정책은 특히 더 주목할 만한 정책이 될 듯하다.
언론을 통해 이미 소개됐듯, 성남시의 청년배당 정책은 기본소득 개념(무조건성, 보편성, 개별성)을 구현하는 청년정책이다. 성남시에서 3년 이상 거주한 19~24세 청년 모두에게 조건 없이 연 100만원을 지급하는 이 정책이 만약 실시된다면, 조건 없는 보편적 소득 보장이 공동체와 개인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볼 수 있는 첫 기회가 될 것이다. 다만, 매우 적은 소득 보장이기 때문에, 지자체 한 곳에 한정된 정책이어서 지역의 상황과 조건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여러 평가와 해석의 충돌을 낳을 여지는 있다.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시에서 준비 중인 기본소득 정책은 정확히는, 기존 사회보장제도인 국민최저소득제도의 대안을 찾기 위한 비교연구실험이다. 현재 국민최저소득제도는 자격 심사가 있고 구직 노력을 조건으로 하고 있으며, 개인 단위로 지급되지 않고, 가구 단위로 사정 평가한다. 이번 사업은 국민최저소득제도와 새로운 사회보장모델들을 일정 기간 동안 병행해서 실시한 후에 상대적 우위를 비교하는 실험이고, 기본소득이 거기에 포함되는 것이다. 이 사업이 의미 있게 진행된다면, ‘노동 의욕 저하’와 ‘경제 악영향’이라는 기본소득 비판론과 관련하여 좀 더 진전된 논의를 할 수 있는 자료를 얻게 될 것이다.
핀란드에서 준비 중인 기본소득 시범사업은 여러 가지로 주목된다.
우선, 핀란드의 기본소득 지지층은 좌파에서 우파까지 기존 정치스펙트럼으로 설명할 수 없게 널리 분포해 있고, 이는 전 세계의 압축판 같은 모양새이다. 오른쪽의 중앙당, 핀란드인당(Finns)에서부터 왼쪽의 녹색동맹(Green League), 좌파연합(Left Alliance)까지 기본소득 지지 의원이 분포돼 있고, 가운데의 사회민주당은 기본소득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가 최근에 조금씩 변화를 보이고 있다.
물론 핀란드에서 그동안 조건 없는 기본소득을 적극 지지하고 구체적인 연구와 실행방안을 내놓은 정당은 정치스펙트럼의 왼쪽에 있는 녹색동맹과 좌파연합이었다. 그에 반해 중도우파인 중앙당은 1990년대 이후로 기본소득 지지 입장이었지만 두루뭉술했고 오랫동안 기본소득 이슈에 침묵해왔다. 심지어 적지 않은 중앙당 의원들은 기본소득을 선별적 소득 보장으로 잘못 이해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중앙당은 2015년 4월에 기본소득을 공약으로 내걸고 총선을 치러 다수당이 됐다(참고로, 이번 총선에서 당선된 전체 의원 중 52.5%가 기본소득을 지지했다). 핀란드인당 등과 우파 연합정부를 구성한 중앙당은 지난 9월에 기본소득 시범사업 연구팀을 설치해서 기본소득 공약을 이행할 준비에 들어갔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핀란드 공공부문 예산을 20~30억 유로로 삭감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자세한 삭감 계획을 알 수 없어서 속단하긴 이르지만, 기본소득으로 사회복지 전체를 대체하고 사실상 공공부문을 축소하는 효과를 겨냥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게 한다.
그래서 현재 기본소득핀란드네트워크는 이 시범사업이 본래의 기본소득 개념을 구현하는 사업이 되도록 가능한 한 협력하는 한편, 공공부문 예산 삭감에 대한 비판의 날을 세우고 있다. 이번 핀란드 정부의 기본소득 시범사업이 기본소득 지지층 내부의 균열을 가져올지는 두고볼 일이다.
기본소득독일네트워크 창립자인 카티야 키핑 의원이 대표로 있는 독일 좌파당(독일 내 제3당)은 2016년 총선 공약으로 기본소득을 적극 검토하기로 했다. 창당 후 첫 선거인 2014년 유럽의회 선거에서 기본소득을 공약으로 채택한 스페인 포데모스는 이 선거 이후 대안정당으로 급부상했고, 다음 총선에서 기본소득을 공약으로 채택할지를 두고 활발한 논의가 진행 중이다. 우리 당 또한 지난 당대회에서 기본소득을 2016년 총선 기본계획에 포함했고, 구체적 공약화 논의가 시작됐다. 2015년 세계 기본소득운동의 정치적 노력이 2016년에 더욱 진전을 보이길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