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당 기관지 <미래에서 온 편지> 제25호(2015년 11월호)에서 ‘기본소득, 단순하지만 강력한 아이디어’라는 제목으로 기본소득 기획특집을 다뤘다. 기획특집은 총 2편의 글로 구성됐고, 그중에서 이 글은 안효상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이사가 기본소득의 쟁점과 위치에 대해 쓴 글이다.

기본소득이란 무엇인가?

기본소득을 간단하게 정의하면 “모든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자산 심사나 노동 요구 없이 무조건적으로 지급되는 소득”이다. 이때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것은 보통 정치공동체 혹은 국가이다.

쟁점

이렇게 간단하기 때문에 사실은 다양한 쟁점이 만들어진다. 모든 사람에게 지급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무상급식 논쟁에서도 나왔듯이 “왜 부자들에게까지 돈을 주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나온다. 무조건적으로 지급한다는 것으로부터는 “왜 일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른바 베짱이에게 돈을 주어야 하는가?”라는 항의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개별적으로 지급하는 것과 관련해서는 직접적인 문제제기가 나오지는 않지만, 일부 사람들은 개인의 독립성 강화가 ‘가족의 해체’를 낳을 수도 있다는 우려를 드러낸다.

더 나아가 기본소득은 현금(화폐)으로 지급되는 것이므로 장래 사회와 관련해서 일부 좌파는 “시장의 존속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보통 쓰이는 의미에서 개량적이라고 비판한다. 또한 현재 사회와 관련해서는 기본소득을 지급할 경우 기업이 그만큼 임금을 덜 주어도 생활할 수 있기 때문에 사실상 기업에 보조금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비판도 있다.

다음으로 기본소득의 재원과 관련해서는 가장 중요한 쟁점 가운데 하나이지만 크게 의미 있는 문제제기가 나오지는 않고 있는 실정인데, 그래도 논의해야 할 쟁점은 지속가능성의 문제이다. 예컨대 일정한 액수 이상의 기본소득을 지급하기 위해서는 소득이나 자산에 상당한 세금을 부과해야 한다. (한국과 같이 조세부담률이 낮은 경우에는 특히 그러하다.) 그럴 경우 (보통 우파가 많이 주장하는 방식이긴 하지만) 경제 활동 자체가 위축되거나 세원 자체가 소멸할 수 있고, 따라서 기본소득을 계속해서 지급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 외에 다양한 입장에서 감각적인 비판이 있다. 생태 사회로의 전환을 위해서는 물질적 소비를 줄여야 하는데, 기본소득을 지급하면 소비를 늘릴 수 있다거나, 국가가 기본소득을 지급하기 때문에 국가가 강화될 수 있고, 이는 자율주의나 무정부주의, 혹은 국가 소멸의 전망에서는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이런 쟁점들을 염두에 둘 때 기본소득 옹호자들, 특히 왼쪽에서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우선적으로 두 가지 문제를 해명해야 한다. 하나는 이른바 노동 윤리의 문제인데, 이는 인간 생존에서 노동의 의미와 사회구성원의 생존에 대한 사회적 책임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선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어느 정도는 노동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기본소득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노동은 인간의 활동 가운데 일부인 임금 노동으로 한정된다. 하지만 가사노동 논쟁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임금을 받지 못하는 인간의 여러 노동 혹은 활동은 생존을 위해서도 필요하고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을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은 뭔가 활동을 하고 있고, 따라서 ‘놀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노동 윤리에서 나오는 비판에서 이어지는 것이 기본소득을 지급하면 일하던 사람들도 일을 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예측이 있다. 하지만 이는 개인의 자율성과 사회의 연대성에 대해 너무 과소하게 평가하거나 현존 사회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도리어 적극적으로 생각해서 지금처럼 생존을 위한 강제 속에서 임금 노동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구성원이 개별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다양한 활동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볼 수도 있다.

두 번째로 미국식의 ‘거친 개인주의’가 아니라면 어떤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사회가 사회구성원의 생존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에서 출발할 수 있다.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어느 정도로 보장하느냐이다. 지금까지 사회구성원의 생존을 가장 강하게 보장한 체제라 할 수 있는 사회민주주의적 복지국가의 경우, 경제 활동이 가능한 사회층의 생존을 완전 고용의 추구를 통해 보장하고 나머지 생애 주기 및 질병 등에 대해서는 보편적이고 적극적인 사회 정책을 통해 보장하는 것으로 한다. 이는 기본적으로 앞서 말한 노동 윤리 및 사회구성원의 기여를 전제로 한 구성물이다. 이에 반해 기본소득은 노동 여부와 상관없이 사회구성원 모두가 생존을 위한 물질적 기초를 보장받아야 한다고 본다. 마치 정치적 권리가 아무런 기여 없이 주어지는 것, 더 정확히 말하면 다른 의무와 직접적으로 연동되지 않고 주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것이 좌파 공화주의 혹은 사회적 공화주의의 기본적인 태도이며, 이때 국가 혹은 정치공동체는 말 그대로 구성원의 삶을 직접적으로 책임지는 위치에 있게 된다.

상황

기본소득이라는 아이디어는 꽤나 오래된 것이지만 오늘날과 같은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은 1980년대 중반 기본소득유럽네트워크가 만들어지면서부터이다. 이때 기본소득이 재발견된 이유 가운데 하나가 기존 복지국가의 한계와 문제점에 대한 인식이었다. 우선 한계란 복지국가가 전제한 완전 고용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인식이다. 문제점으로는 복지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방대한 관료체계 및 수급자 선별로 인한 낙인 효과이다. 기본소득은 아무런 조건 없이 모두에게 지급하는 소득이므로 선별을 위한 관리 체계 및 이로 인한 낙인 효과가 당연히 없다.

기존 복지국가의 토대이자 목표인 완전 고용과 관련해서 보자면 이미 1970년대 초반부터 신자유주의적 정책, 산업 구조의 변화, 기술 변화 등으로 인해 임계점이 다가오고 있거나 이미 넘어갔다는 인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정규직 산업 노동자 및 이들에 의한 강력한 노동조합이 존재하던 시절이 끝나고, 다양한 비정규불안정 노동자가 노동력의 다수를 차지할 뿐만 아니라 거시적으로 일자리가 경향적으로 줄어드는 상황이 도래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고용이라는 형태로 사회구성원의 삶을 제대로 보장하는 것은 불가능해졌고, 다른 방도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 기본소득의 정세적 문제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관습의 힘은 무서운 것이라 이런 변화를 빨리 받아들이고 새로운 방도를 찾기보다는 기존의 지위를 유지하려는 것이 기존 정치 세력과 노동자 운동의 기본 전략이었고, 이 속에서 기존 복지국가는 계속해서 침해당하고 후퇴했다. 그렇지만 2008년 경제 위기는 글로벌 자본주의 전체를 빠져나오기 힘든 위기로 몰아넣었고, 이에 따라 이를 추동해 온 신자유주의적 방책 자체도 한계에 빠졌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 사실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사회를 먹여살리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부담이 되고 있다. 다만 계급 관계로 인해 상층이 그 수혜자가 될 뿐이다. 여기에 더해 자동화와 인공지능(AI)의 발전은 한편으로 인간을 힘들고 지루한 노동에서 해방시킬 가능성을 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일자리를 빼앗는 위협이 되고 있고, 이는 날로 더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상황이 기본소득이 아이디어를 넘어 정치적 의제로 제출되고, 구체적인 실험으로 구상되도록 했다. 한편에서는 일자리의 부족과 소득 불평등의 해결 방안으로 이름은 다양하지만 사회구성원에게 일정한 소득을 보장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차 힘을 얻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자동화와 인공지능의 발전을 긍정적인 효과가 나는 방향으로 가져가기 위해서 마찬가지로 소득을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이 퍼지고 있다. 특히 후자는 기술의 발전은 사실상 모든 사회구성원의 직간접적인 기여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누구나 ‘일정한 몫’이 있다는 공유의 관점까지 내포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생태적 위기를 넘어서는 고리로서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입장이 있다. 생태적 전환을 위해서는 어떻게 말하든 물질적 생산과 소비를 줄이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물질적 생산을 위한 노동 자체를 줄이고, 그 시간을 다른 인간 활동에 할당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할 경우 사람들의 소득이 줄어든다는 것이며, 이때 필요한 것이 기본소득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얻은 소득을 더 많은 물질적 소비에 쓴다면 문제가 될 것이다. 하지만 앞서도 말했듯이 물질적 족쇄에서 해방될 경우 사람들은 아마도 ‘본연의’ 인간적 활동에 더 많은 관심과 시간을 쏟을 것이다.

위치

기존 좌파 쪽에서 기본소득을 비판할 때 “생산수단의 소유 관계를 변화시키지 않기 때문에” 문제라는 주장이 있다. 그 자체로는 틀린 말이 아니다. 기본소득은 생산수단의 소유 관계의 변화를 직접적인 사정(射程)으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기본소득은 그 자체로 곧바로 사회 전체의 변화를 가져오는, 이른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염두에 둘 때 기본소득은 두 가지 위치를 지닌다. 하나는 당면한 여러 과제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결합 정책으로서의 위치이다. 대표적인 것인 지금 노동당에서 제출한 노동 사회 재구성 전략이다. 지금 박근혜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이른바 노동 개혁은 어떻게 해서든 노동 비용을 낮추면서도 일자리 자체를 늘리기 위해 임금 피크제라든가 비정규직 제한의 완화 등을 구체적인 방책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는 결국 대부분의 일자리의 저임금화와 불안정화를 가져올 것이기에 절대 다수가 반대하고 있다. 이에 반해 노동당의 제안은 노동 시간 단축에 따른 일자리 증대, 최저임금 인상을 통한 임금 소득 향상, 그래도 부족한 부분에 대한 기본소득 지급 등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패키지 계획이다. 따라서 제안대로 이루어질 경우, 일자리 증대와 소득 향상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최소한 영국 정도의 조세 부담률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재분배 효과가 있는 조세 개혁이 필요하다.

다른 하나의 위치와 기능은 사회구성원, 즉 시민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물질적 기초를 제공함으로써 이들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긍정적인 에너지를 발휘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기존 사회민주주의와 과거의 공산주의 체제 모두 사회구성원의 삶에 과도하게 개입했다고 할 수 있고, 이것이 부동(不動)의 사회를 만들어낸 이유이다. 20세기의 대중 민주주의와 참여 민주주의의 경험과 요구를 거친 오늘날 더 나은 사회는 사회구성원 다수의 자발적인 구상과 참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할 때 정치의 과제는 그런 조건을 만들어내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때 기본소득이 유력한 정책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문제의식은 공화주의의 정신을 이어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공화주의의 이상에서 국가 혹은 정치공동체는 시민들의 편안한 삶을 보장하기 위해 있는 것이며, 여기서 시민들은 타인을 착취하지도 않고, 착취당하지도 않으며, 정신적으로도 독립적인 사람들이다. 이를 위해서는 물질적 독립적인 시민이 필요한데, 과거에는 자기 토지를 소유한 자영농이나 자기 작업장이 있는 장인이 바로 그들이었다. 하지만 현대 자본주의에서 이는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물질적 독립성을 보장할 수 있는 다른 수단이 필요하다. 이것이 기본소득이라 할 수 있다.

기본소득이 오래된 유산이긴 하지만 오늘날 주목받고 있는 이유는 20세기 사회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적극적인 검토, 글로벌 자본주의의 위기와 현대 사회의 특정한 기술적 경향, 생태적 위기 등에 해결할 수 있는 적절한 수단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또한 기본소득이 많은 사람의 이상이라 할 수 있는, 연대적, 공동체적 삶 속에서도 개인의 독립성과 자유를 보장할 수 있는 기초가 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기본소득은 현실과 이상 사이를 연결하는 적절한 다리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