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의 역사

이 글은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asicincome.org)에서 소개한 ‘기본소득의 역사’를 한국어로 옮긴 것입니다. 야닉 판더보르트(Yannick Vanderborght)와 필립 판 파레이스(Philippe Van Parijs)가 2005년에 쓴 책 <보편적 수당(L’allocation universelle)>의 1장에 기초해서, 사이먼 번바움(Simon Birnbaum)과 칼 와이더키스트(Karl Widerquist)가 편집하고 요약한 글이며, 한국어 옮긴이는 최광은 전 사회당 대표입니다.

 

조건 없는 기본소득이라는 아이디어는 세 가지의 역사적 기원이 있다. 최소소득이라는 아이디어는 16세기 초에 최초로 등장했다. 조건 없는 일회적 급부이라는 아이디어는 18세기 말에 최초로 등장했다. 그리고 이 둘은 19세기 중엽에 조건 없는 기본소득이라는 아이디어가 형성되면서 최초로 결합됐다.

1. 최소소득: 인문주의자 모어(1516년)와 비베스(1526년)

도둑질에 대한 라파엘의 해법

특정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정부가 보장하는 최소소득이라는 아이디어는 조건 없는 기본소득이라는 더 명확하고 급진적인 아이디어보다 매우 오래된 것이다. 르네상스가 도래하면서, 빈민들의 복지를 살피는 임무는 교회의 독점적인 보호나 자비로운 개인들의 일로 치부되지 않게 되었다. 소위 인문주의자들로 불리는 몇몇은 공공부조 형태의 최소소득이라는 아이디어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1516년 루뱅에서 출판된 토마스 모어(1478~1535년)의 <유토피아>에서 안트베르펜 시의 중앙광장을 지나가던 포르투갈의 여행자 라파엘 논센소는 자신이 캔터베리 대주교인 존 모튼과 나눴다는 대화를 소개한다. 그는 살인율을 높이는 불쾌한 부작용이 있는 사형선고를 도둑들에게 내리는 것보다 이러한 계획이 도둑질과 싸우는 더 현명한 방법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추기경과 저녁식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어떤 영국 법률가가 있었다. 어떻게 그것이 화제가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도둑들을 막기 위해 당시에 적용되고 있었던 엄격한 법률들에 관해 매우 열정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는 “우리는 도처에서 그들을 교수형에 처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저는 어느 교수대에서 20명가량의 죄수들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매우 이상한 점이 있어요. 그들 중에서 교수형을 면하는 사람이 아주 적은데, 왜 우리는 여전히 그토록 많은 도둑들에게 시달리고 있을까요?” 나는 추기경 앞에서 자유롭게 말하는 것을 전혀 망설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게 뭐가 이상하죠?” 하고 물었다. “도둑들에 대처하는 이 같은 방법은 정당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처벌이라고 하기엔 너무 가혹하고, 억제책으로서도 너무 비효율적입니다. 가벼운 절도죄가 죽음이란 형벌을 받을 만큼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음식을 구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이 훔치는 것밖에 없다면, 이를 막을 수 있는 형벌이란 세상에 없을 겁니다. 그런 점에서 영국인들은, 대부분의 다른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보다 체벌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무능한 교사들이 제 머릿속에 떠오르게 합니다. 이러한 끔찍한 처벌을 가하는 대신에, 모든 사람에게 약간의 생계수단을 제공하는 것이 훨씬 더 적절합니다. 처음엔 도둑이 되고 나중엔 시체가 되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궁핍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하려면 말이죠.”[주 1]

 

공공부조를 위한 실용적이고 신학적인 탄원 

그렇지만 최소소득 보장이라는 아이디어의 진정한 아버지로 간주되는 이는 토마스 모어의 절친한 친구이자 동료 인문주의자인 요하네스 루도비쿠스 비베스(1492~1540년)였다. 그는 이론적이고 실용적인 고찰을 바탕으로 이 문제에 관해 상세한 계획을 세우고 포괄적인 토론을 전개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비베스는 발렌시아의 개종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1509년 종교재판을 피해 스페인을 떠나 프랑스 소르본대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는 당시 파리에서 지배적이던 보수적인 스콜라철학에 곧 물들었지만, 1512년에 벨기에 브뤼허로, 1517년에는 인문주의 운동의 주요 중심지 가운데 하나인 벨기에 루뱅으로 이주했다. 1520년 그는 루뱅대학교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는 옥스퍼드대학교 코퍼스크리스티칼리지에서 잠시 학생들을 가르쳤지만, 성년 이후 대부분의 시간은 브뤼허 시에서 보냈다. 이곳 주요 운하들 중 하나의 둑에는 아직까지 그의 동상이 남아 있다. 1526년 브뤼허 시장에게 보낸 “빈민 원조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보고서에서 그는 정의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도덕적으로 요청되는 구호활동을 더욱 효과적으로 펼치기 위해서 지방정부가 모든 거주자들의 최소 생계를 보장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러한 부조계획은 빈민들에게 딱 맞춰진 것이었다. 공무원들이 빈민 구제를 담당해야 하는 이유는 더 효율적으로 빈민들에 맞춰 진행할 수 있는 그들의 능력 때문이다. 빈민 구제의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구제를 받아야 할 만큼 가난해야 한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은 일할 의지를 증명함으로써 도움을 받아 마땅한 자격을 얻어야 한다.

 

“심지어 내기, 매춘, 과도한 사치, 폭음과 도박 등의 타락한 생활로 재산을 탕진한 사람들에게도 음식을 줘야 한다. 어느 누구도 굶어죽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될 수 있도록 더 적은 배급과 더 많은 지루한 일을 그들에게 주어야 한다. … 그들이 굶어죽어서는 안 되지만, 그 고통은 반드시 느껴야 한다.” 가난의 원천이 무엇이건 간에 사람들은 빈민들이 일을 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노인이나 우둔한 사람에게도 구멍을 파고, 물을 긷거나 물건을 짊어지고 나르는 일과 같이 며칠 내로 배울 수 있는 일을 주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이 계획의 수혜자에게 그런 규칙을 요구하는 요점은 그들이 얼마간이라도 이 계획의 재원을 마련하는 데 기여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는 또한 “일에 바삐 몰두하도록 해서 그들이 만일 게을렀다면 빠져버렸을지도 모를 사악한 생각과 행동을 멀리하게 하는” 대책을 강구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일은 부자로 태어난 사람들에게도 일관되게 확대 적용되어야 한다. 비베스에 따르면,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사람들이 게으른 삶을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법을 부과한 것”은 옳았다. 빈민들이 기생자가 되어선 안 된다면, 부자들은 왜 그래야 하나?”[주 2]

 

두 가지 맥락에서 비베스는 후대의 사상가들을 기본소득의 방향으로 이끄는 어떤 통찰을 제시하고 있다. “신은 자신이 창조한 이 모든 것들을 우리의 큰 집, 즉 세상에 들여놓았다. 그 모든 것들은 벽과 문으로 에워싸이지 않으니, 그것들은 모든 하느님의 자녀에게 공유될 것이다.” 따라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지 않는다면, 자연의 선물을 전유한 사람은 누구나 “자연법에 따라 유죄 선고를 받게 되는 한낱 도둑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자연이 그 자신만을 위해 창조하지 않은 것을 그가 소유하고 내놓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비베스는 “궁핍이 어떤 미친 혹은 사악한 행동을 불러오기 전에, 궁핍해 보이는 얼굴이 수치심으로 빨개지기 전에 … 괴로워서 고마워하기도 어려운 요청을 하기 전에 기부하는 것이 훨씬 더 기분 좋고 더욱 고마워할 가치가 있는 것”이라며 구제가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궁핍해지기 전에 이 선물을 주는 것”이 훨씬 더 나을 것이라는 더욱 급진적인 결론은 명시적으로 거부한다. 그런 결론은 분명 적절한 기본소득이 얻게 될 것이었다.

 

비베스부터 구빈법까지

비베스의 탄원은 몇 년 후 플랑드르의 이프르 지방정부가 하나의 계획을 입안하도록 명시적으로 고무시켰다. 이는 또한 (1536년부터 지속된) 비토리아 와소토의 살라망카학교부터 (1576년부터 지속된) 영국의 구빈법에 이르는, 빈민 구제 방식들에 관한 초기 사고와 조치에 영감을 줬다. 그를 보호해준 친구, 에라스무스와 모어에 비해 사람들이 잘 기억하지는 못하겠지만, 복지국가에 대한 비베스의 개척자적인 사고는 최근에 재조명되고 있다.[주 3]

그는 또한 그의 모교인 루뱅대학교에서도 여전히 기억되고 있다. 그가 살던 집에서 가져온 돌이 루뱅 구시가지에 있는 총장 관사인 ‘대학회관’ 벽에 섞여 들어가 있다. 그리고 샤를푸리에그룹이 기본소득을 토론하고 기본소득유럽네트워크(BIEN) 창립회의를 조직하기 위해 1984~1986년에 회합을 가졌던 루뱅 신시가지의 후버석좌교수 회의실은 “비베스 홀”로 명명되고 있다.

비베스의 소책자는, 빈민들을 대상으로 하고 정부가 실시하는 자산 심사 계획을 거치는 공적 시혜 조치에 초점을 맞춘 사회사상과 제도 개혁의 오랜 전통을 맨 처음 체계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구빈법 시행에서 불거진 난점들과 의구심들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시대의 사상가들은 공공부조를 정부의 본질적 기능으로 보았다. 한 예로 몽테스키외는 이렇게 말한다. “국가는 모든 시민에게 안전한 생활수단, 음식, 적당한 옷과 건강을 해치지 않는 생활방식을 제공할 책임이 있다”(L’Esprit des Lois (1748), section XXIII/29, Paris: Flammarion, Vol.2, 134쪽). 이러한 사상의 흐름은 결국 프랑스의 최저통합수당(RMI, 1988년)과 포르투갈의 최저보장소득(RMG, 1997년)처럼 대부분 최근에 점점 더 많은 나라들에서 국가적으로 재원이 뒷받침되는 포괄적인 최소소득 보장 계획으로 등장했다.

2. 기본증여: 공화주의자 콩도르세와 페인

사회보험에 관한 콩도르세의 구상

그런데 18세기 말 무렵 유럽 전역에 걸친 빈곤의 제거에 좀 더 큰 역할을 수행한 다른 아이디어가 부상했다. 맨 처음에 이 아이디어를 내놓은 것으로 알려진 사람은 일류 수학자이자 정치활동가인 콩도르세(1743~1794년)였다. 콩도르세는 프랑스 혁명 당시에 저널리스트와 국민공회 의원으로서 눈에 띄는 역할을 한 후, 감옥에 갇혔고 사형 선고를 받았다. 감옥에 있는 동안, 그는 가장 체계적인 저작인 <인간 정신의 진보에 관한 역사적 개관>(1795년, 그의 사후에 미망인이 출판)을 썼는데, 이 책의 마지막 장은 사회보험을 어떤 것으로 생각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사회보험이 불평등, 불안전과 빈곤을 감소시킬 수 있는지에 관한 대략의 구상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의 대다수이자 가장 능동적인 계급을 계속 위협하는 불평등, 의존 상태 그리고 심지어 곤궁함에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다. 우리는 운명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노년층에게 구제를 보장함으로써 이를 광범하게 제거할 수 있음을 보여줄 것이다. 이러한 구제는 그 사람이 저축한 결과물이지만, 똑같은 희생을 치렀으나 그 과실을 따야 할 시기가 오기 전에 죽은 개인들의 저축들 덕분에 커진 것이기도 하다. 여성과 아이들이 남편과 아버지를 잃는 순간, 그 가정이 가장의 요절로 인해 어려움을 겪든 아니면 그럭저럭 오래 버틸 수 있든 간에, 이들에게 같은 가격으로 얻을 수 있는 같은 수준의 자원들을 제공하는 유사한 보상을 통해서도 구제가 이루어질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스스로 일할 수 있을 만한 나이가 된 아이들과 새로운 가정을 찾은 아이들에게 활동 개발에 필요한 자산 혜택을 제공함으로써 구제가 가능하다. 여기서 이 자산은 이를 영유할 수 있기에는 너무 일찍 죽어간 아이들 때문에 커진 부분도 있다. 이 방법에 대한 아이디어는 인생의 가능성과 돈의 투자에 대한 계산법의 응용 덕택이다. 이는 이미 성공적으로 이용되고 있지만 단지 소수의 개인들이 아닌 사회의 전체 대중에게 실질적으로 유용할 수 있는 정도의 범위와 다양한 형태를 지닌 것은 결코 아니다. 사회의 전체 대중에게 적용된다면 부패와 곤궁의 무진장한 원천인 상당수 가정들의 주기적 파산을 막게 될 것이다.[주 4]

 

한 세기가 지난 후, 이 분명한 아이디어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입안한 노령연금과 통일독일의 (1883년 이후의) 노동자 건강보험 계획을 시작으로 하는 유럽의 대규모 사회보험 체계의 탄생과 발전을 고무하게 됐다. 비록 빈민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빈민이 아닌 사람들에 대한 대규모 소득이전과 관련된 것이긴 했지만, 그 체계들이 발전하면서 재빨리 공공부조 계획을 축소시키고 공공부조를 보조적인 역할로 격하시킴에 따라, 이 체계는 곧 빈곤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한편으로, 사회보험은 공공부조보다 기본소득에 더욱 가까워지도록 우리를 안내했다. 사회보험이 분배하는 사회급여는 동정으로 부추겨진 것이 아니었고, 납부한 보험료에 기초한 자격 부여로 유도된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사회보험은 우리를 기본소득으로부터 멀어지게 했다. 왜냐하면 수급 자격 부여가 정확히 과거에 임금의 일부 형태로 되어 있는 보험료를 대체로 충분히 냈는가(또는 해당 고용주가 이를 납부했는가)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가장 포괄적인 형태의 공공부조와는 달리, 가장 포괄적인 사회보험의 형태조차 최소소득을 보장할 수 없었다.

 

기본증여에 관한 콩도르세와 페인의 구상

사회보험에 관한 논의의 맥락에서 (동정을 받을 만한) 빈민들뿐만 아니라 (위험이 현실화되면 보상 자격이 주어지는) 보험 가입자에게도 제한되지 않는 급여라는 아이디어, 즉 “스스로 일할 수 있을 만한 나이가 된 아이들과 새로운 가정을 찾은 아이들에게 활동 개발에 필요한 자산 혜택을 제공하는” 아이디어를 처음으로 잠시 언급한 사람은 바로 콩도르세였다. 그렇지만 콩도르세 자신은 이 주제에 관해 더 이상 말하거나 쓰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국민공회의 동료 의원이었던 토마스 페인(1737~1809년)은 콩도르세의 사망 2년 후 총재정부에 보낸 보고서에서 이 아이디어를 매우 상세하게 발전시켰다. 총재정부는 로베스피에르의 처형과 나폴레옹의 부상 사이의 기간 대부분 동안 프랑스를 다스린, 5명으로 구성된 집행기관이었다.

 

“미개간된 자연 상태의 지구는 여태껏 인류의 공동자산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입장은 반박될 수 없는 입장이라고 그는 쓰고 있다.” 땅이 개간됨에 따라, “개선의 가치는 지구 자체가 아니라 단지 개인의 자산에 속하게 된다. 그러므로 개간된 땅의 모든 소유자는 그가 갖고 있는 땅에 대한 지대(이를 표현할 더 나은 용어를 알지 못하므로)를 공동체에 지불할 의무가 있다. 그리고 이 계획에서 제안된 재원은 이 지대로부터 나온다.” 이러한 재원으로부터 “토지 자산 체계의 도입으로 인한 자연유산의 손실을 부분적으로 보상하기 위해서 21살이 되면 모든 사람에게 15 파운드가 지급될 것이다. 그리고 또한 지금 50살이 된 모든 사람에게는 해마다 10 파운드가 평생 지급될 것이고, 다른 모든 사람들도 그 나이가 되면 받을 것이다.” 페인은 “부유하거나 가난한 모든 사람에게” 이것이 지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형성한 자산 혹은 이를 형성한 사람으로부터 물려받은 자산이 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이는 모든 사람에게 권리로서 속하는 자연유산을 대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주 5]

 

페인에서 종잣돈 사회까지

성인이 되는 모두에게 균등한 기본증여를 하는 아이디어는, 예를 들어 프랑스의 정치철학자인 프랑수아위에의 저작에서처럼 이따금씩 다시 나타났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결합하고자 한 그는, 청년들이 토지와 유산으로 물려받은 다른 자산 전체에 세금을 부과해서 마련된 재원으로 증여를 받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특히 Le Règne social du christianisme, Paris: Firmin Didot & Bruxelles: Decq, 1853, 262, 271~273쪽을 보라.)

페인이 기초연금과 관련 지었던 것과 같은 증여 아이디어는 최근에 예일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인 브루스 액커만과 안네 앨스톳 두 사람이 더욱 상세하게 되살려 발전시켰다(The Stakeholder Society,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99). 그렇지만 8만 달러의 조건 없는 지급은 이제 지구의 공동소유 자격으로 정당화되지 않으며, 기회의 평등으로서의 정의라는 좀 더 포괄적인 개념으로 정당화된다. [주 6]

3. 기본소득: 공상적 사회주의자 샤를(1848년)과 밀(1849년)

샤를 푸리에의 생계권

페인의 관점에서는, 지구에 대한 동등한 소유권은 소득 보장이 아니라 모두에 대한 조건 없는 증여를 정당화해준다. 영국의 윌리엄 코벳(1827년), 새뮤얼 리드(1829년), 풀렛 스크로프(1833년) 같은 19세기의 개혁가들 다수는 소득 보장 계획이 공공의 자선보다 더 확고한 기초를 제공해주기 때문에 오히려 더 낫다고 판단했다. (유용한 개괄을 위해서는 다음을 보라. Horne, Thomas A. “Welfare rights as property rights”, in Responsibility, Rights and Welfare. The theory of the welfare state, Boulder & London: Westview Press, 1988, 107~132쪽.) 이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별나면서도 많은 저작을 남긴 프랑스의 작가 샤를 푸리에(1836: 490~492쪽)인데, 그는 맑스가 경멸하는 의미로 “공상적 사회주의자”라고 이름 붙인 급진적 몽상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잘못된 산업>(1836년)에서 푸리에는 수렵, 어업, 채집 그리고 공유지에서의 소 방목과 같은 각 개인의 기본적 자연권을 침해했다면 “문명”은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없는 모든 사람들에게 6등급 호텔 방과 하루 세 끼의 적당한 식사 형태로나마 생계를 보장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초의 권리, 즉 자연 채취권, 자연의 선물을 이용하고, 수렵, 채집, 방목 등을 하는 권리는 배가 고플 때 먹을 권리, 즉 생계를 유지할 권리였다. 이러한 권리는 문명 속에서 철학자들에게는 부정당하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다음과 같은 말로 인정했다. … 예수는 이러한 말을 통해 사람이 배고플 때 필요한 것을 찾아 취하는 권리를 신성시했으며, 이러한 권리는 사회가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할 의무를 지도록 했다. 문명이 이 최초의 자연적 권리, 즉 수렵, 어업, 채집, 방목 등의 권리를 없애버린 이상, 문명은 사람들에게 보상해야 한다. … 문명화된 질서가 인간에게서 최초의 권리를 이루고 있는 네 종류의 자연적 생계수단, 즉 수렵, 어업, 채집, 방목을 박탈했다면, 토지를 빼앗아간 계급은 빼앗긴 계급에게 아홉 번째 권리(풍족한 생계)에 근거해서 풍족하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권리의 양도에는 수많은 걸림돌이 있다. 우선, 네 배의 생산물을 제공하면서 최소 생계를 충족시킬 수 있게 해주는 결합된 산업의 사회적 메커니즘을 조사하고 발견해야 한다. 다른 한편, 풍족한 최소 생계를 보장받는 다수는 거의 일을 하지 않으려 할 수 있기 때문에, 만족감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계속 노동할 수 있게끔 보장하는 매력적인 산업체제를 발견하고 조직해야 할 것이다.[주 7]

 

그렇지만 푸리에는 노동 심사 배제에 대해서만큼이나 이러한 현물 수입 분배의 비보편성(6등급 호텔들은 단지 소수의 사람들만 수용할 수 있다)에 대해서도 분명한 입장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자연자원에 대한 직접적인 접근성이 줄어든 것에 대한 보상으로서 빈민들에게 조건 없는 자격을 주는 것이었다. 그의 제자이자 푸리에주의 유파의 지도자인 빅토르 콩시데랑(Exposition abrégée du système Phalanstérien de Fourier, Paris, 1845)은 팔랑스테르 체제(Phalansterian system) 덕분에 노동이 매력적인 것이 된다면, “연말까지 지출보다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서 공동체의 가난한 구성원들에게 최소소득을 전달할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진정한 기본소득의 방향으로 한 발 나아간다. 하지만 빈민 구제는, 본성상 정당화될 수 있는데도, 여전히 보편적 소득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집단과 분야에 따라 노동을 배분하는 것이 노동을 매력적이게 하는 속성이 있다면, 사회의 모든 계급들은 사회적 기능을 하는 아주 다양한 모든 영역에서 열심히 자리를 찾는다. 따라서 더 이상 게으른 사람은 없다. 연말까지 지출보다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서 공동체의 가난한 구성원들에게 최소소득을 전달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체제가 만들어지면 곤궁과 구걸, 즉 무정부적인 경쟁과 분열에 기초한 사회의 재앙은 없어질 것이다. 오늘날에는 사람들이 최소한의 진보를 이루는 것도 불가능하다. 또한 노동이 역겨운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게으름에 빠져 있다. 이런 이유로 영국에서 구빈세가 항구적인 빈곤이라는 끔찍한 상처를 더 크게 만들었다. 최소한의 진보, 그것은 자유의 기초이며, 프롤레타리아 해방의 담보물이다. 최소소득이 없다면 자유도 없다. 산업적인 매력이 없다면 최소소득도 없다. 대중을 해방시키는 모든 정치가 거기에 있다.[주 8]

 

조셉 샤를리에의 토지 배당

1848년 칼 맑스가 브뤼셀의 또 다른 인근 지역에서 <공산주의 선언> 집필을 마무리하고 있었을 때, 푸리에주의 작가인 조셉 샤를리에(1816~1896년)는 진정한 기본소득에 대한 최초의 정식화를 포함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사회문제의 해법 혹은 인도적 헌법>(Bruxelles, “Chez tous les libraires du Royaume”, 1848, 106쪽)을 브뤼셀에서 출판했다. 의심의 여지 없이 이는 푸리에주의 전통에서 영감을 얻은 것인데, 그는 토지 소유에 대한 동등한 권리를 일정 소득에 대한 조건 없는 권리의 기초로 간주했다. 하지만 그는 샤를 푸리에가 옹호한 ‘자산 심사를 통한 지원에 대한 권리’와 그의 가장 뛰어난 제자인 빅토르 콩시데랑이 옹호한 ‘유급 노동에 대한 권리’ 양자 모두를 거부했다. 그가 보기에, 전자는 단지 효과만을 다룬 것이고, 후자는 국가의 개입을 너무 많이 수반한 것이었다. 그는 “최소소득” 혹은 “보장소득”(그리고 나중에는 “토지 배당”)이란 이름으로 모든 시민들에게 전체 부동산의 임대료에 기초하여 의회가 매년 정하는 액수만큼을 분기별(나중에는 월별)로 지급받을 수 있는 권리를 조건 없이 주자고 제안했다. 자신의 제안을 더욱 발전시키는 나중의 책에서 그는 이를 “토지 배당”(La Question sociale résolue, précédée du testament philosophique d’un penseur, Bruxelles, Weissenbruch, 1894, 252쪽)이라고 다시 이름 붙인다. 그가 논하는 이러한 계획은 “노동에 대한 자본의 지배”를 끝장낸다. 이것이 게으름을 조장하지 않겠냐고? “게으른 사람들에게 불운은 그들이 얼마 안 되는 소득을 얻는다는 점이다. 사회의 의무는 얼마 안 되는 누군가의 권리를 빼앗지 않으면서 자연이 처분에 맡긴 것을 각자의 공정한 몫에 따라 향유하도록 보장하는 것을 넘어서지 않는다.” 최소소득 이상의 소득은 벌어서 얻어야 할 것이다.[주 9]

 

밀의 가장 기술적으로 결합된 사회주의의 형태

샤를리에의 완강한 청원은 거의 무시되었고, 자신도 이를 빨리 잊었다. 또 다른 푸리에주의 숭배자인 존 스튜어트 밀은 그렇지 않았다. 이와 관련한 적절한 구절은 샤를리에의 첫 번째 책이 나온 다음 해에 출판된 <정치경제학의 원리> 2판에 그가 덧붙인 구절로, 푸리에주의에 동조하는 논의였다. 이 논의는 명백히 자산 심사 없는 기본소득 제안이 푸리에주의자의 제안이라고 본다.

 

모든 사회주의 형태 가운데 불복에 대한 가장 위대한 통찰을 보여주면서 가장 기술적으로 결합된 사회주의 형태는 통상 푸리에주의라고 알려진 것이다. 이 체계는 사적 소유뿐만 아니라 심지어 상속의 폐지도 꾀하지 않는다. 반대로, 이는 명백히 생산물 분배의 요소들로서 노동뿐만 아니라 자본을 고려한다. … 분배에서, 특정한 최소치는 노동을 할 수 있든 없든 상관없이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생계를 위해 먼저 할당된다. 생산물의 나머지는 노동, 자본, 재능이라는 세 요소들 사이에서 사전에 결정되는 특정한 비율로 분배된다.” [주 10]

 

아이디어는 분명히 그곳에, 그 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사상가들 가운데 한 명의 저작 속에 있었다. 그러나 실질적인 토론이 처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다시 또 60년이 지나서였다.

 

20세기 기본소득의 역사

 

20세기에는 기본소득에 관한 토론이 특히 집중된 세 시기가 있었다. 첫 번째로, “사회 배당”, “국가 보너스”, “국가 배당” 같은 이름으로, 진정으로 조건 없는 보편적 기본소득에 대한 제안이 영국의 전간기 논쟁에서 전개되었다. 두 번째로, 몇 년간의 침묵 이후 1960년대와 1970년대 동안 미국의 “시민보조금”과 “음의 소득세” 제도에 관한 논쟁에서 이 아이디어가 재발견됐으며 상당히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세 번째로,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반 이후로 기본소득 제안이 북서유럽의 몇몇 나라들에서 활발하게 토론됨에 따라 논쟁과 탐구의 새로운 시기가 도래했다. 이와는 아주 별개로, 20세기에는 또한 알래스카의 모든 거주자들에게 매년 배당금을 지급하는 알래스카영구기금(APF)이 조성됨으로써 세계 최초로 기본소득의 특징을 모두 갖춘 계획이 실시되기 시작했다.

 

1. 교전상태에서 존엄함으로: 전간기 영국

무정부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러셀의 조합

제1차 세계대전의 끄트머리인 1918년에 영국에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수학자이자 철학자이자 비국교도 정치사상가이자 전투적 평화주의자인 그리고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버트런드 러셀(1872~1970년)은 1918년에 처음 출판된 간결하고 날카로운 시각의 책인 <자유로 향하는 길>에서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의 장점들을 결합시키는 사회모델에 관해 논했다. 이것 중 하나의 핵심요소는 “필수품을 마련하기에 충분한” 조건 없는 기본소득이다.

 

무정부주의는 자유와 관련하여, 사회주의는 노동 유인과 관련하여 장점을 갖고 있다. 우리가 이 두 장점을 결합하는 방법을 찾을 수는 없을까? 나는 우리가 찾을 수 있다고 본다. … 더 친숙한 용어로 표현하면, 우리가 옹호하는 이 계획은 본질적으로 다음과 같다. 일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간에, 필수품을 마련하기에 충분한 일정한 금액의 적은 소득은 모두에게 보장되어야 한다. 그리고 공동체의 생산 총액이 보증하는 것만큼의 더 큰 소득 — 생산된 상품 총량에 의해 보증되는 만큼의 큰 소득 — 은 공동체가 유용하다고 인정하는 어떤 일에 하려는 사람들에게 주어져야 한다. … 교육이 끝났을 때, 어느 누구도 노동을 강요당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노동을 하지 않는 선택을 한 사람들은 가장 기본적인 생계수단을 받으면서 완전히 자유롭게 지내도록 놔둬야 한다.[주 11]

 

밀너의 국가 보너스

같은 해에 퀘이커교도이자 노동당원인 젊은 기술자 데니스 밀너(1892~1956년)는 자신의 부인인 마벨과 공동으로 “국가 보너스를 위한 계획”(1918년)이라는 표제가 붙은 간결한 소책자를 발간했다. 폭넓은 일련의 논의들을 동원하여 그들이 주장한 것은 영국의 모든 시민들에게 조건 없이 매주 지급되는 소득의 도입이었다. 1인당 GDP의 20%로 맞춰진 이 “국가 보너스”는 특히 전쟁의 여파로 매우 심각했던 빈곤 문제의 해결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은 생계수단에 대한 도덕적 권리를 갖기 때문에, 생계수단의 회수 위협을 통해 강제된 노동의무는 제외되었다. 밀너는 이어서 <국가 생산량에 대한 보너스로 더 많은 생산을>이라는 제목으로 존경할 만한 출판업자가 출판한 책에서 이 제안을 정교하게 다듬었다. 나중의 토론들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대다수의 논의는 이 책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실업의 덫에서 노동시장의 유연성까지, 낮은 수급 비율에서 이윤 공유의 이상적인 보완까지. 하지만 강조점은 “생산주의적” 주장에 있었다. 국가 보너스는 효율성 하나만을 근거로 해도 정당화될 수 있었다. 밀너의 제안을 동료인 퀘이커교도 버트램 피카드가 열정적으로 지지해주었고, 단명한 국가보너스연맹(SBL)도 이를 지지했다. 밀너는 이를 기치로 총선에 참가하기도 했다. 이 제안은 1920년 영국 노동당 당대회에서 토론되었으나 다음 해에 결정적으로 거부되었다.[주 12]

 

메이저 더글라스와 사회신용운동

하지만, 또 다른 영국의 기술자 클리포드 H. (“메이저”) 더글라스(1879~1952년)가 매우 커다란 영향력을 지닌 이 아이디어를 다시 붙들 때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더글라스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의 산업이 매우 생산적이었던 것에 충격을 받아 과잉생산의 위험을 우려하기 시작했다. 은행들이 융자를 제한하는 데다가 구매력이 매우 느리게 증가하고 있는데, 4년간의 전쟁으로 가난해진 사람들이 어떻게 쓸모 있는 상품을 풍족하게 소비할 수 있었을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글라스(1924년)는 일련의 강의와 저작에서 모든 가구들에게 매달 “국가 배당”을 지급하는 것을 포함한 기법의 하나로, 종종 매우 혼동되는 표현인 “사회신용”의 도입을 제안했다. 사회신용운동은 다양한 운명을 맞이했다. 이 운동은 정작 영국에서는 확실히 자리 잡지 못했지만, 캐나다에서는 많은 지지자들을 끌어모았다. 비록 국가 배당을 도입하는 아이디어는 재빠르게 버렸지만, 사회신용당(SCP)이 캐나다의 앨버타 주를 1935년부터 1971년까지 통치했다.

 

콜과 미드의 사회 배당에 관한 논의

사회신용운동의 대중성이 영국의 폭넓은 계층에서 처음에는 확산되고 다음에는 줄어들었던 반면, 조건 없는 기본소득이라는 아이디어는 영국노동당과 가까운 작은 지식인서클에서 지반을 마련하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 저명한 사람은 옥스퍼드대학교의 첫 번째 사회정치이론학 치첼레석좌교수를 지낸 (나중에는 이사야 벌린, 찰스 테일러, G. A. 코헨이 치첼레석좌교수를 지냈다) 경제학자 조지 D. H. 콜(1889~1959년)이었다. 몇몇 책에서 그는 처음으로 그가 “사회 배당”(1935년)이라고 불렀던 것을 확고하게 지지했다. “현재의 생산력은 사실상 현재의 노력과 사회적 유산이 결합된 결과물이고, 현재 발전 단계에서 통합된 창의력과 기능 그리고 생산기술로 달성된 교육이 그 사회적 유산이다. 그리고 모든 시민들이 이러한 공동 유산의 산물을 공유해야 하고, 이러한 배분 이후 남은 생산물만이 현재 생산에 참여하는 일에 대한 보상과 유인책의 형태로 분배돼야 한다는 점은 내겐 항상 전적으로 옳아 보인다”(1944: 144쪽). J. S. 밀에게 바친 자신의 책 <사회주의 사상사>(1953년)에서 콜은 또한 “기본소득”이라는 영어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조건 없는 기본소득이라는 아이디어에 주목한 최초의 인물이었던 듯하다. 그리고 “기본소득”이란 표현은 1980년대에 국제적인 토론이 이루어지면서 빠르게 퍼져나갔다.[주 13]

정치적으로는 덜 적극적이었지만 콜보다 세계적으로 더 폭넓은 명성을 얻은 또 다른 옥스퍼드대학교 경제학자이자 노벨상 수상자인 제임스 미드(1907~1995년)는 “사회 배당”을 매우 열성적으로 지지했다. 사회 배당이라는 아이디어는 그의 책 <노동당 정부를 위한 경제정책 개요>(1935년)와 몇몇 다른 초기 저작들(Meade 1937, 1938)에서 공정하고 효율적인 경제의 핵심 구성요소로 나타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아가소토피아(옮긴이 주: 미드가 훌륭한 사회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한 표현) 프로젝트의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 그는 마지막 저작들(1989, 1993, 1995)을 이 프로젝트에 바쳤다. 여기서 자본과 노동 사이의 협력과 공적 자산에 의해 기금이 마련된 사회 배당이 실업과 빈곤 문제에 대한 해법으로 함께 제시된다. “사회 배당”이란 표현이 제임스 미드의 저작들에서 등장한 시기와 같은 시기에 런던정치경제대학 교수인 오스카르 랑게(1904~1965년)와 아바 레르너(1903~1982년)가 시장사회주의에 관한 유명한 토론을 하면서 이를 또한 표면화했다. 레르너(1936년)의 비평에 답하면서 랑게(1937년)는 “사회 배당”이라는 분명한 표현을 사용했는데, 기여와는 독립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야만 했던 사회 배당을 그는 집단적으로 소유한 자본에 대한 보상으로 여겼다.

자유주의자 줄리엣 라이즈-윌리엄스(1943년)가 기본소득을 핵심 구성요소로 하는 “새로운 사회계약”을 제안한 것은 이러한 전간기의 토론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이것은 노동 수행을 일정한 보조금의 필수적인 짝으로 만든 것이어서, 보편적이긴 하지만 전적으로 조건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보조금의 지급이 파업 중에는 중단되었다. 하지만, 1942년에 또 다른 자유주의자이자 런던정치경제대학 학장이었던 윌리엄 베버리지가 (통일된 국민아동수당과 사회보험에 관한 폭넓은 프로그램과 연결된) 국민 최소소득에 대한 대안적인 제안을 했다. 이것은 영국에서 널리 알려졌고, 곧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도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따라서 조건 없는 기본소득 형태의 제안은 영국의 정책 관련 논쟁의 언저리로 들어갔다.

2. 단명했던 활기: 1960년대 미국

미국의 세 가지 최소소득 보장 접근법

보편적 기본소득에 관한 실질적인 논쟁이 세 가지의 주요 원천에서 영감을 얻으며 다시 부상한 곳은 바로 시민권운동의 절정기, 1960년대 격동의 미국에서였다. 첫째로, 로버트 테오발드(1929~1999년)와 그의 ‘삼중혁명에 관한 특별위원회’(1964년)(옮긴이 주: ‘삼중혁명’은 1964년 3월 22일 미국 대통령 린든 존슨과 정부 각료들에게 보낸 공개각서다. 일련의 사회운동가, 교수, 전문가들이 ‘삼중혁명에 관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이 각서에 서명했다)는 다양한 출판물에서 막연하게 특정한 최소소득 보장을 지지했는데, 예컨대 “자동화가 유급 노동을 쓸모없게 만들고 있고, 자동화 기기가 생산한 엄청난 양의 산물을 구매할 수 있는 수단을 대중에게 지급하는 유일한 방법은 정부 지원금이다”라는 믿음은 더글라스를 떠올리게 한다. 둘째로, 미국의 경제학자이자 노벨상 수상자인 밀턴 프리드먼(1912~2006년)은 그의 대중적인 책 <자본주의와 자유>에서 그가 “음의 소득세”라고 부른 것을 도입함으로써 미국의 복지 형태를 급진적으로 단순화하자고 제안했다. 정률의 음의 소득세에 대한 프리드먼의 제안은 소득세와 소득 이전 체계를 완전히 통합하려는 것이었다. 이는 짜깁기된 현존 사회복지 체계들에 대한 단순하고 급진적인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그리고 이는 그 자체로 이상적인 사회, 즉 소득 이전 없는 자본주의 사회로 가는 이행 단계를 의미했다. (프리드먼이 어디에서 이러한 아이디어와 관련 참고자료들을 구했는지에 대해 그 자신의 설명을 보려면, 2000년 5월에 발행된 기본소득유럽네트워크(BIEN) <뉴스플래시 3호>에 있는 수플리시와 프리드먼의 대화를 참고하라.)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인데, 제임스 토빈(1918~2002년),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1908~2006년) 등의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일련의 글들에서 더욱 일반적이고, 더 관대하며, 현재의 지원 프로그램들보다 의존성이 적게 해주는 최소소득 보장에 관한 아이디어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토빈의 시민보조금

토빈, 페츠먼, 미에즈코스키는 1967년에 음의 소득세 제도에 관한 첫 번째 기술적 분석을 내놓았다. 여기서 그들은 모든 시민에게 자동으로 지급하는 것을 포함하는 변형에 호의적인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조지프 페츠먼은 진정한 조건 없는 기본소득을 시민보조금(demogrant)이라고 부르자고 제안했다. 프리드먼의 제안과는 대조적으로, 토빈의 시민보조금 계획은 — 복지국가를 끝장내는 데 도움을 주려고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 사회적 지원과 보험 계획의 전체 체계를 대체하는 것을 꾀하지 않았다. 단지 빈민들의 소득을 끌어올리기 위한 좀 더 효율적이고 좀 더 노동 친화적인 제도를 만들기 위해 뒤떨어진 요소를 바꾸려 했을 뿐이다.

프리드먼의 제안보다 더 관대하고 테오발드의 제안보다 더 분명한 토빈의 제안에서는 개별 가구가 가족 구성에 따라 금액이 달라지는 기본보조금을 받는 것이었다. 그리고 개별 가족은 여기에다 벌어서 생긴 소득과 정률의 세금이 부과되는 다른 소득을 보충하는 것이었다. (관련 참고자료들과 시민보조금 제안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에 대한 토빈 자신의 설명을 보려면, 2001년 9월에 발행된 기본소득유럽네트워크(BIEN) <뉴스플래시 11호>에 있는 수플리시와 토빈의 대화를 참고하라.)

 

닉슨의 가족지원제도와 시민보조금에 대한 맥거번의 지지

이렇게 활기차고 가능성이 보이는 분위기에서 1968년 봄 미국 의회에 “올해에 소득 보장과 지원 체계를 도입할 것”을 호소하는 청원이 조직되었다. 제임스 토빈, 폴 새뮤얼슨,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로버트 램프만과 해롤드 와츠 그리고 천 명이 넘는 많은 경제학자들이 이 청원을 지지했다. 물론 밀턴 프리드먼은 지지하지 않았지만. 자산 심사에 기초한 현존 복지 체계에 의존하는 비중이 극적으로 높아지고 있던 맥락에서, 이 청원은 행정부가 한 발 더 나아가야만 하겠다고 느끼는 분위기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 이것은 공화당 소속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 정부를 대신하여 민주당 상원의원인 대니얼 패트릭 모이니한(1927~2003년)이 야심 찬 사회복지 프로그램인 가족지원제도(FAP)를 마련하도록 이끌었다. 이 가족지원제도는 빈민 가구를 대상으로 하는 원조 프로그램(AFDC)의 폐지를 가져오고, 보장소득과 노동자 재정 지원금을 통합했는데, 이 노동자 재정 지원금은 음의 소득세 계획과 매우 비슷한 것이었다. 1969년 8월 닉슨 대통령은 이 법안을 공개적으로 제출했고, 1970년 4월 미국 하원에서 대다수 의원들은 이를 채택했다. 그러나 1970년 11월 미국 상원의 관련 위원회는 이를 거부했고, 1972년에는 반대의 완화를 꾀한 몇몇 수정에도 불구하고 너무 소심한 법안이라고 생각한 사람들과 너무 용감한 법안이라고 생각한 사람들 사이의 제휴 탓에 결정적으로 반려되고 말았다. 더 야심 찬 “시민보조금” 제도는 제임스 토빈의 제안으로 민주당 조지 맥거번 후보의 1972년 대통령 선거 강령에 포함됐지만, 1972년 8월에는 빠져버렸다. 상원에서의 가족지원제도의 무산은 1972년 11월 맥거번이 닉슨에게 패배한 것, 1973년 3월 워터게이트 사건이 시작된 것, 1974년 11월 닉슨이 사임한 것 등과 결합되면서 미국의 논쟁에서 짧지만 강렬하게 등장한 조건 없는 기본소득 방식의 아이디어가 끝이 났음을 보여줬다. 하지만 음의 소득세 제도에 관한 다섯 가지 대규모 실험(4가지는 미국에서 그리고 한 가지는 캐나다에서)과 그 결과를 둘러싼 논쟁들에 기초하여 좀 더 학술적인 차원의 토론은 지속되었다.

3. 새로운 출발: 1980년대의 북서유럽

첫번째 주도권: 덴마크와 네덜란드에서의 논쟁

1970년대 말에 들어서면서 미국에서는 시민보조금 논쟁이 사실상 잊혔지만, 다수의 유럽 나라들에서는 조건 없는 기본소득에 관한 논쟁이 일필로부터 시작되었다. 물론 유럽에서건 미국에서건 이전의 논쟁들은 거의 전적으로 무시된 가운데 일어난 일이었다. 예를 들면, 덴마크에서는 세 명의 학자들이 나중에 <중심부로부터의 반란>(Meyer et al. 1978)이라는 제목을 달고 영어로 번역된 책에서 “시민임금”이라는 명칭으로 조건 없는 기본소득 제안을 지지했는데, 이 책은 덴마크에서 전국적 베스트셀러였다. 그러나 유럽에서 조건 없는 기본소득에 관해 새로운 논쟁이 일어난 것은 무엇보다도 네덜란드에서였다. 이 토론에서 맨 처음 목소리를 낸 사람은 암스테르담자유대학교 사회의학과 교수인 J. P. 퀴퍼였다. 어떤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지 못해 피폐해지고 있는 데 반해, 어떤 사람들은 과도한 노동으로 심하게 몸을 혹사하고 있는 상황에 충격을 받은 그는 유급 고용의 비인간적 본성에 대처하는 방법의 하나로 고용과 소득의 고리를 끊을 것을 제안했다. 즉, 그가 호소한 상당한 수준의 “소득 보장”만이 사람들을 독립적이고 자율적으로 발전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Kuiper 1976). 1977년에는 네덜란드기독민주당 좌파로부터 성장한 소규모의 급진적 정당(급진당 Politieke Partij Radicalen)이 자신의 선거 강령에 조건 없는 기본소득(basisinkomen)을 공식적으로 포함시킨 유럽 최초의 국회의원을 보유한 정당이 되었다. 이 운동은 주요 노동조합 연합체인 네덜란드노총(FNV) 소속의 식품 분야 노동조합인 식품조합(Voedingsbond)이 개입함으로써 매우 급속도로 성장했다. 조합원들 가운데 예외적으로 여성과 시간제 노동자의 비율이 높았던 이 식품조합은 1980년대 내내 네덜란드의 논쟁에서 주요한 역할을 했다. 이 조합은 일련의 출판물들을 냈을 뿐만 아니라 과감한 노동시간 단축과 결합된 조건 없는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행동을 시작했으며, 네덜란드의 조건없는기본소득협회를 자신의 건물에 유치했다. 1985년에는 유명한 ‘정부정책을 위한 과학위원회’(옮긴이 주: 네덜란드 정부의 독립적인 싱크탱크)가 이른바 “부분 기본소득”의 도입을 분명하게 제안한 보고서를 출간하면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을 때 네덜란드의 논쟁이 첫 번째 절정에 달했다. 이러한 부분 기본소득은 진정한 조건 없는 기본소득이긴 하지만 한 개인의 필요를 충족시키기에는 불충분한 수준이었으므로 현존하는 조건부 최소소득 제도를 대체하는 것을 꾀하지는 않았다.

 

영국과 독일에서의 전개

같은 시간대에 이 논쟁은 다른 나라들에서도, 비록 따로따로이긴 하지만,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1984년에는 빌 조던과 허미온 파커 주위로 모여든 학자들과 활동가들로 구성된 한 그룹이 ‘자원활동가 조직들의 전국위원회’ 후원을 받아 기본소득연구그룹(BIRG)을 만들었다. 이 그룹은 1998년에 시민소득트러스트가 된다. <파이낸셜 타임스>의 새뮤얼 브리튼 부주필처럼 독립적인 사람들의 지속적인 뒷받침과 이 아이디어에 대한 자유민주당의 공감 표명에도 불구하고, 이 조건 없는 기본소득은 대처 총리의 신자유주의 아래에서보다 블레어 총리의 신노동당 시대에 – 매우 미약한 형태의 아동신탁기금을 제외하고는 – 더욱더 주류 정치에 편입될 수 없었다. 독일에서는 베를린 출신의 생태자유지상주의자인 토마스 슈미트가 자신의 책 <그릇된 노동으로부터의 해방>(Schmid ed. 1984)에서 논쟁을 제기했다. 녹색운동 쪽에서 펴낸 몇몇 총서들은 이러한 처음의 주도적 논의들을 이어갔고 발전시켰다(Opielka & Vobruba 1986; Opielka & Ostner 1987). 이와 동시에 프랑크푸르트대학교 공공재정학 교수인 요하임 미취케(1985년)는 음의 소득세 형태로 시행되는 시민소득(Bürgergeld)을 지지하는 장기 캠페인을 시작했다. 하지만, 베를린 장벽의 붕괴(1989년)와 그 결과인 동서독 통일(1990년 10월)은 이러한 초기의 공개적 논의를 오랫동안 중단시켰다. 녹색당에 가까운 클라우스 오페(1992년, 1996년), 사회민주당에 매우 가까운 프리츠 샤르프(1993년)와 같은 명성 있는 학자들이 이 논의를 떠받쳤는데도 말이다. 놀라운 주목을 받으면서 풍부한 전국적 논쟁이 벌어진 것은, 재통일 과정이 다소간 마무리되고 난 후인 2005년 무렵에나 가서였다.

 

프랑스의 기본소득 논쟁

프랑스에서는 논쟁이 상대적으로 천천히 전개됐다. 영향력 있는 좌파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인 앙드레 고르츠(1923~2007년)는 처음에는 20,000시간의 보편적 사회서비스와 결합된 평생 기본소득을 지지했다(Gorz 1985). 그러나 완전히 유급 고용의 식민지가 되어가는 사회생활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되면서 조건 없는 소득에 대한 지지로 돌아섰다(Gorz 1997). 매우 다른 결에서, 자신을 “좌파 드골주의” 경제학자로 묘사한 요랑 브레슨(1984, 1994, 2000)은 “시간 가치”가 객관적 기준에 맞춰진 것으로 가정된 보편적 “생존소득”에 대한 복잡한 논의를 제공했다. “공리주의에 대항하는 사회과학운동”(MAUSS)의 지도자인 앨랭 카일레(1987, 1994, 1996)는 노동시장에서 배제된 사람들에 대한, 그리고 집단적 이해관계 행위들에 쏟는 그들의 능력과 의지에 대한 사회의 근본적 신뢰의 표현으로서 조건 없는 소득을 옹호했다. 그리고 하버마스 전통의 정치철학자인 장-마르크 페리(1995, 2000)는 유럽연합 차원의 시민적 권리로서 조건 없는 기본소득에 대한 진술을 발전시켰는데, 그 배경에는 통상적으로 이해되는 완전 고용은 영원히 실현할 수 없다는 그의 판단과 사회적으로 유용한 활동들인 “제4” 부문이 발전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있었다.

 

기본소득유럽네트워크(BIEN)의 탄생과 확장

이렇게 소소한 국가적 논쟁들은 서로 독립적으로 일어났다. 그리고 그 논쟁들에 기여한 지적 산물들은이 아이디어의 역사 대부분을 알지 못했고, 만일 알았다고 하더라도 역사 전체를 안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기본소득유럽네트워크의 창립 덕택에 점차 서로 접촉하게 되었다. 1984년 3월 벨기에 루뱅대학교와 가까운 한 연구자 그룹과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조건 없는 기본소득에 대한 도발적인 시나리오를 “샤를푸리에그룹”이라는 집단 필명으로 출판했다. 샤를푸리에그룹은 이 시나리오로 노동의 미래를 논하는 시합에 참여해서 상을 받았고, 1986년 9월 벨기에 루뱅 신시가지에서 몇몇 나라의 조건 없는 기본소득 지지자들이 모인 바로 그 첫 모임을 조직했다. 거의 홀로 이 아이디어를 지지하는 줄로만 알았던 참가자들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를 알고서 유쾌하게 놀랐으며, 이에 힘입어 기본소득유럽네트워크(BIEN)를 출범시키기로 결정했다. 이 네트워크는 정기적인 뉴스레터를 발간했고 2년마다 회의를 개최했다. 미국, 남아메리카,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의 유사한 네트워크들의 탄생, 호주와 뉴질랜드에 이미 존재하는 네트워크들과의 접촉 강화, 그리고 기본소득유럽네트워크 회의에 참가하는 비유럽인들의 수가 증가한 현상 등은 2004년 9월 바르셀로나에서 개최된 제10차 대회에서 기본소득유럽네트워크(BIEN)가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IEN)로 확대되는 배경이 되었다. 2006년 10월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대학에서 열린 대회는 새롭게 창설된 전 세계적 네트워크가 유럽 바깥에서 개최한 첫 번째 대회였다.

 

4. 소소하지만 실재하는 알래스카의 배당

이러한 논쟁들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게 되면서 진정으로 보편적인 기본소득 제도의 도입과 발전이 오늘날 가능해졌다. 1970년대 중반 미국 알래스카 주의 공화당 소속 주지사 제이 하몬드는 북미에서 가장 커다란 석유 지대인 프루도만의 석유 채굴로 얻은 커다란 부가 오직 주의 현재 주민들에게 혜택을 주도록 하는 것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석유에서 얻은 수입의 일부를 투자해서 이러한 부가 축적되는 것을 보장해주는 기금의 설립을 제안했다. 그리고 1976년 주 헌법의 개정으로 알래스카영구기금(APF)이 설치되었다. 알래스카 주민들이 이 기금의 성장과 지속에 관심을 갖게 하려고 주지사 하몬드는 모든 거주자들에게 그들의 거주 햇수에 비례하는 배당을 매년 지급하는 것을 구상했다. 그런데 다른 주들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을 차별한다는 이유로 미국 대법원에 제소된 이 제안은 수정연방헌법 제14조인 “동등 보호 조항”에 위배되는 것으로 판결이 났다. 이러한 거부를 극복하기 위해 이 제안은 수정되었고, 진정한 보편적 기본소득으로 변형되었다. 1982년 이 프로그램의 시행 이후 알래스카에서 최소 6개월 이상 공식 거주한 모든 사람은 — 현재 650,000명 정도 — 나이나 알래스카 주에서 거주한 햇수가 얼마나 되든 상관없이 매년 일정한 배당을 받아왔다. 이러한 배당은 석유 채굴 수입을 이용하여 설치된 영구기금을 바탕으로 하며, 이전 5년 동안 거둔 평균 이익의 일부에 해당한다. 이 기금은 처음에는 오로지 주 경제에만 투자되었지만, 나중에는 국제적으로 분산투자를 하게 됐고, 그래서 배당의 분배가 지역 경제 상황의 변동폭을 증폭하는 게 아니라 완화해줄 수 있게 됐다(Goldsmith 2004). 이 배당은 초기에는 매년 1인당 300달러 수준에 머물렀지만, 주식시장이 폭락해 몇 년 동안 배당이 절반으로 깎이던 때인 2000년에는 2,000달러 가까이에 달했다. 하지만 2008년에는 1인당 2069달러를 지급함으로써 연간 배당의 크기가 새로운 최고 기록에 도달했다. 알래스카의 석유 배당 제도는 세계의 다른 나라들에게도 계속해서 제안되었지만, 여전히 유일무이한 것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이는 알래스카가 미국의 주들 가운데 가장 평등한 주가 되도록 돕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