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가족의 변화에서 기본소득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오준호(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운영위원)

사람들 앞에서 “4인 가족 기준으로는…”하고 말하다가 멈칫하고는 한다. 내 앞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4인 가족에 속하지 않는 경우가 점점 늘고 있어서다. 4인 가족은 머릿속에 여전히 ‘가족 형태의 전형’으로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빠르게 해체되는 중이다.

4인 가족 모델은 대체로 ‘남성 생계부양자 중심, 혼인한 남녀 배우자와 자녀, 단일 혈통, 가구별 독립생활’ 등을 특징으로 한다. 그러나 전체 가구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이미 1인 가구다(2016년 기준으로 28%). 또한 한부모 가족와 조손 가족이 늘고, 비혼 동거·동성 동거·입양·다문화·이주배경 가족 등 가구의 형태는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 심지어 20대끼리는 ‘여성 1인과 고양이’도 가족의 하나로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도 한다. 주거비 부담이나 공동체 가치 등의 이유로 여러 가구가 공동생활을 택하는 경우도 는다.

가족구조의 변화에서 던져야 하는 질문

가족구조의 변화를 불안하게 바라보는 시각도 있고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시각도 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가족구조의 변화가 가족 구성원들의 시민적 권리와 자유를 확대하는 변화인가 아닌가”다. 가족 내에서 각자의 인권이 존중되고 발언권이 확대되는 변화인가 아닌가? 구성원들 사이에 불평등한 노동 부과·소득과 여가의 격차·성별 분업이 줄어드는 변화인가 아닌가? 구성원들이 지역 사회와 정치 공동체에 더 많이 참여하고 활동하게끔 하는 변화인가 아닌가? 만약 가족구조의 변화가 여기에 긍정적인 답을 준다면 그것은 진보적인 변화일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가족구조 변화의 배경에는, 개인의 자율적인 선택도 물론 있지만, 그러한 선택을 강요하는 외적인 요인들이 존재한다. 그런 요인들이 지속적으로 압력을 가하는 한, 가족구조의 변화가 시민적 권리와 자유를 확대하리라고 낙관하기 어렵다. 여러 요인들이 있겠지만, ‘경제적 요인’은 특히 강한 영향력을 미친다.

비정규·불안정 일자리를 전전하는 청년들은 소득도 여가시간도 심지어 미래에 대한 기대심리도 부족하다. 그런 까닭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연애와 결혼을 포기하고 1인 가구의 삶을 지속한다. 1인 가구의 삶이 결코 낭만이 아니라는 사실은 1인 가구 상대 빈곤율이 전체 가구 빈곤율의 세 배에 달한다는 사실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2013년 기준 1인 가구 상대 빈곤율 49.6%, 전체 가구 빈곤율은 16.5%). 과중한 생계 노동, 자신들이 사회의 주변인이라는 비주류 의식은 1인 가구가 사회 참여에 대해 더 관망적인 태도를 가지게 할 수 있다. 이런 경향은 여성·노령·저소득 1인 가구일수록 크게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1인 가구주들은 노동할 수 있는 한 복지 혜택을 받지 못하고 가족 내에 자신을 돌봐줄 사람도 없으므로, 아프거나 재충전이 필요해도 쉬지 못한다. 1인 가구가 늘어나는 현재의 가족구조 변화가 ‘대세’일지 몰라도, 진보적인 변화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이른바 ‘정상가족’을 유지하는 것이 시민적 권리와 자유에 더 도움이 될까? ‘정상가족’의 유지가 구성원들의 자율적인 선택이라면 모르지만, ‘경제적 요인’에 의해 마찬가지로 강요된 선택이라면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 청년들이 취업비용(각종 스펙)과 주거비용 때문에 부모로부터 독립을 늦추거나, 취업 후에도 독립할 만한 소득이 없어 부모와 같이 사는 경우를 생각해보라. 출산·육아로 ‘경단녀’가 된 여성이 재취업할 기회나 예상 소득이 열악한 상황에서, 이혼을 택해 가정 폭력이나 가혹한 가사노동의 부담에서 벗어나고 싶어도 생존이 막막해 참아야 하는 경우를 생각해보라. 부모의 권위에서 벗어나 자기 길을 개척하고 싶지만 먹고살 길이 없어 주저앉는 청소년을 생각해보라. 이 모든 경우에 ‘정상가족’은 강요된 선택일 뿐 시민적 권리나 자유하고는 거리가 멀다.

기본소득은 더 좋은 변화의 지렛대

우리가 찾아야 하는 것은, 외적 형태든 내적 관계든 가족구조의 변화가 가족 구성원의 자율적인 선택에 따라 이루어지고, 궁극적으로 시민적 권리의 확대로 이어지는 길이다. 기본소득 도입은 이러한 긍정적인 변화의 지렛대가 될 수 있다.

우선 기본소득은 전통적 복지 급여가 가구 중심으로 제공되는 것과 달리 개인에게 주어진다. 가족 구성원을 가구주와 그에게 딸린 피부양자로 나누지 않고 모두를 동등한 주체로 인정한다. 그리하여 기본소득은 각 구성원이 원한다면 독립할 수 있는 경제적 역량을 갖춰주는 동시에, 그들의 가족 관계를 보다 평등하게 구성할 수 있도록 각자의 협상력을 높여준다. 게다가 가족 구성원 수가 늘어날수록 급여 총액이 줄어드는 현행 복지제도와 달리, 기본소득은 구성원 수가 늘면 급여의 총액도 비례적으로 늘어난다. 이는 가족의 결합을 유지하려는 동기가 될 수도 있다. 즉 기본소득은 가족 구성원들이 독립이든 결합이든 더 자율적으로 선택하도록 만든다.

기본소득은, 페미니스트 정치철학자 낸시 프레이저의 표현을 빌리자면 “경쟁적 취업사회에서 보편적 돌봄사회로” 이행하는 발판이다. 노동시간 단축과 연계된 기본소득 도입은 가족 구성원들이 취업 노동에 종사하는 시간을 줄이고 가사·돌봄·양육에 남녀 평등하게 그리고 적정하게 참여할 수 있는 조건을 형성한다. (돌봄과 양육에 관한 사회 서비스는 물론 확충되어야 한다.) 취업 노동에 바치는 시간이 줄면 지역 사회와 정치 공동체에 참여하는 시간과 이에 필요한 역량을 계발하는 시간을 늘릴 수 있다.

최근의 한 연구에 따르면, 월 30만원의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사람들은 재량시간을 평균 약 42분 늘릴 수 있다(이지은, “기본소득과 재량시간: 성별비교를 중심으로”, 한국사회복지정책학회 2018 춘계학술대회 발표문, 2018년). 재량시간이란 생계·가사·식사·수면 등에 쓰는 필수시간을 뺀, 자신이 자유롭게 사용방식을 정할 수 있는 시간이다. 특히 여성이 남성보다, 빈곤층이 비빈곤층보다 재량시간 증가의 폭이 더 크다. 재량시간의 증가는, 맞벌이와 가사노동의 이중 부담에 지친 여성의 처지를, 주거비와 생계비 등 생존비용 마련에 허덕이며 연애할 시간조차 없는 청년 1인 가구의 처지를 향상시킬 것이다. 기본소득은 낸시 프레이저의 말대로 “모든 사람이 정치적 시민이자, 경제활동에 종사하는 노동자이자, 서로에 대한 ‘돌봄인’”의 정체성을 가질 수 있게 한다.

기본소득으로 경제적 불안정성이 감소되면 1인 가구의 삶을 택해야 하는 타율적인 요인은 줄어든다. 이때에도 1인 가구의 비중이 전체 가구에서 증대할지는 지금 판단하기 어렵다. 하지만 1인 가구나 비혼은 지금보다 훨씬 자율적이고 능동적인 선택으로 이해될 것이다. 더 이상 그런 선택이 ‘능력 없어서 택하는 비정상적 삶’처럼 여겨지지 않게 된다.

기본소득의 효과를 크게 둘로 구분한다면 하나는 소득의 급진적 재분배를 통한 경제적 역량의 강화이고, 또 하나는 “모두가 기본소득을 받는다”는 시민적 공통성에서 오는 상호 인정과 존중이다. 무상급식이 저소득층 아이들의 경제적 부담을 줄이는 것만이 아니라 “누군가가 복지 대상자”라는 낙인을 없애 모든 아이들을 평등하게 통합하는 데 기여한 것처럼 말이다. 가족구조의 변화와 관련해 기본소득은, 각자 원하는 가족 형태를 자율적으로 선택하도록 경제적 역량을 제공하면서 동시에, 각자의 선택이 서로 인정되고 존중되도록 도울 것이다. 그 바탕에서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다양한 가족 형태 혹은 시민 결합이 등장할 것이고, 그 변화는 시민적 권리와 자유를 획기적으로 증대하는 방향일 것이다.

(2018년 6월 25일 충남여성정책개발원 주최 포럼 ‘미래 가족변화와 대응 방안’에서 발표한 내용을 수정하였음.)

게시일: 2018년 7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