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복지국가 혁명과 기본소득
백승호(운영위원, 가톨릭대학교 사회복지학)
1970년대 이후 자본주의 국가에서 발견되는 변화의 핵심은 표준적 고용관계의 해체와 불안정 노동의 일상화 그리고 불평등의 구조화로 요약할 수 있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신자유주의적 정책이 확산된 결과인가? 그렇다면 신자유주의 정책의 수정만으로 문제의 해결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들의 근본적인 원인을 신자유주의 정책에서 찾는 것은 한계가 있다. 이러한 변화들은 현대 자본주의의 변화가 가져온 특징들 중 하나의 현상일 뿐이다.
이러한 현상들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인지자본주의로의 전환에서 찾을 필요가 있다. 전통적 산업자본주의에서의 가치는 상품화된 노동력에 의해서 창출되었다. 그러나 인지자본주의 단계에서는 지식과 정보에 의해서 가치가 창출된다. 따라서 자본은 전통적 산업사회와는 달리 노동과의 타협에 의존하여 생산을 조직화할 동기가 줄어들고, 지식의 조직과 확산에 관심을 가진다. 전통적 산업자본주의에서 생산성 향상이 노동과정의 통제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다는 점과 비교하면, 인지자본주의 단계에서 자본축적방식은 질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지식의 조직화를 통해 자본이 축적된다는 것은 자본형성에서 사회적 성격이 강화됨을 의미한다. 여기서 사회적 성격은 지식축적의 역사성, 집단성과 관련된다. 지식은 오랜 시간을 거쳐 축적되는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지식은 동시대 대중들의 집단적 활동에 의해 축적된다. 이는 인지혁명의 시대에 특히 더 그러하다. 보통 사람들이 인터넷 공간에서 자료를 검색하고, 이메일을 보내고, 온라인 쇼핑을 하는 과정에서 빅 데이터가 구축된다. 심지어는 재화와 서비스를 소비하고,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과정에서도 빅 데이터는 구축된다. 이 빅 데이터는 알고리즘 기술의 혁신적 발달과 결합하며 자본형성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기업들은 초과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신들이 개발한 알고리즘을 공개하여 하나의 플랫폼을 만들고, 많은 사람들이 그 알고리즘 속에서 활동함으로써 지대를 극대화하게 하는 전략을 선호한다. 이것이 이른바 플랫폼 경제 과정이다. 하지만 이렇게 생산된 지대는 현재 지대 형성에 기여한 일반지성에게 분배되기보다는 플랫폼 기업들이 독점하고 있다. 전통적 산업사회의 토지라는 공유지에 비견되는 인지자본주의 시대의 ‘가상 토지’라는 공유지에서 기업들은 새롭게 지대를 추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플랫폼 기업들의 지대 독점에 대한 규제는 매우 제한적이다. 가이 스탠딩은 지식특허에 과도한 독점권을 부여하고 지대 추구를 용인하는 현대 자본주의를 지대자본주의(rentier capitalism)라 명명하며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이 인지자본주의에서 가치가 생산되고 분배되는 핵심과정이다. 그런데 그 분배과정은 정의롭지 못하다. 역사적으로 축적된 지식, 일반지성들에 의해 확대된 지식을 활용하여 자본이 축적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성과는 일부 기업에 의해 독점되고 있기 때문이다. 기본소득은 이러한 부의 불공정한 분배를 넘어 일반지성들에 의해 축적된 공유 부를 공평하게 배당함으로써 정의로운 분배시스템을 만들고자 하는 기획이다.
인지자본주의로의 전환은 시장에서의 1차적 분배를 왜곡시키고 있을 뿐 아니라, 재분배 시스템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전통적 산업사회에 만들어진 사회보험 중심의 복지체제는 노동을 전제로 한 재분배 시스템이다. 그러나 인지자본주의하에서의 노동시장은 ‘플랫폼 노동’, ‘모호한 고용’ 등이 확산되면서 전통적 사회보험 시스템에 포괄되지 못하는 광범위한 사각지대를 만들어 내고 있다. 사회보험 중심의 복지체제는 인지자본주의에서의 생산체제 변화를 반영하여 사회적 보호의 기능을 수행하는 데 한계를 보이고 있다. 전통적 산업사회의 복지제도들이 새롭게 변화되고 있는 노동시장과 조응하지 못함으로써 복지국가의 지속가능성이 위협받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자리 창출 전략이나 사회보험 강화전략이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하지 않아 보인다. 이것이 사회보험 중심의 복지국가에서 더 나아가 기본소득 중심의 새로운 복지국가 혁명이 필요한 중요한 이유중 하나이다.
물론 여기서 언급하는 복지국가 혁명이라는 것이 현 시점에서 기본소득으로 사회보험을 대체해야 한다는 주장은 아니다. 기본소득과 사회보험은 상호보완적으로 구성될 필요가 있다. 사회보장의 역사적 발전과정을 보아도 사회변화에 의해서 새롭게 도입된 제도와 이전의 제도들 사이의 관계는 대체 관계가 아닌 상호보완적인 관계였다. 서구에서 16세기 대량 빈곤이 발생하자 기존의 빈곤구제 방식이었던 자선은 대량빈곤의 문제를 해결하기에 한계가 있었다. 대량빈곤이라는 새로운 문제는 공공부조의 제도화로 이어졌다. 하지만 공공부조 이전 시기 빈곤구제의 역할을 담당했던 자선은 사라지지 않고 공공부조와 상호보완적인 기능을 수행하였다.
19세기 말 이후 빈곤을 넘어 실업, 질병, 노령으로 인한 소득상실의 문제가 새로운 사회적 위험으로 등장하면서 기존의 공공부조 제도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이는 사회보험의 도입으로 이어졌다. 사회보험이 복지국가의 핵심적 제도로 안착되는 과정에서도, 공공부조 제도는 소멸되기는커녕 오히려 사회보험과의 상호보완적 관계 속에서 발전되어왔다. 현 시기 필요한 복지국가 혁명도 마찬가지다. 앞서 언급한 불공정한 분배의 문제뿐 아니라, 기존의 사회보험으로는 포괄할 수 없는 사회적 위험에 대한 새로운 접근으로서 기본소득이 요구되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논의는 기본소득과 기존 사회보장제도를 어떻게 정합적으로 재구성하느냐에 있다.
게시일: 2018년 3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