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신년사
1월 1일이 싫다는 그람시의 말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새 해가 뜨는 일이 이렇게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때는 없는 것 같습니다. 공포스럽고 부조리한 사태로 발생한 정치적 위기가 일단락되기 전까지는 멈추어 있는 듯한 지금의 시간이 길게 이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은 바람이 있다면 그건 아마 우리가 살아 숨 쉬고, 조금씩은 나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정치적 위기 속에서 그리고 우리의 지나온 시간과 함께 2025년이 중요한 해가 되리라는 점은 누구나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상치 못한 일은 아니었지만 갑자기 빨리 휘감은 정치적 소용돌이가 우리 활동의 방향을 확인하라고 재촉하고, 우리 활동의 속도를 높이라고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2023년 BIEN 대회를 전후로 해서 여러 면에서 활동의 한 순환을 마감했기 때문입니다. 2025년은 한편으로 민주주의의 심화와 사회적, 생태적 전환이라는 시대적 목표의 달성을 위한 중요한 한 걸음을 내딛고, 다른 한편으로 이 거대한 흐름에 우리 자신이 제대로 함께하기 위해 정렬이 필요한 시절입니다.
2023년 하반기부터 2024년까지 우리는 보통 정중동이라고 부르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것은 당장의 급박한 일을, 활기차게 전개하기보다는 지나온 일들을 정돈하고, 현재의 상황을 점검하면서 꼭 해야 되는 몇 가지 일에 집중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본소득 의제와 정책에 관한 연구와 교육은 어느 정도 이루어졌고 어떤 상태에 있는가, 기본소득의 제도화를 위한 정치적 모색은 적절한 방식으로 제대로 했는가, 시민운동 단체로서 우리의 역량과 활동을 모으고 펼치는 일은 잘 이루어졌는가, 그리고 이 세 가지 활동이 서로 어울렸는가? 당장 딱 맞는 대답을 내놓기는 크고 어려운 질문이며, 어쩌면 우리의 활동 자체가 이런 질문들에 답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질문을 던지고 답하는 한편 우리는 하던 일과 해야 할 일을 하면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100년도 더 전에 격동의 시기를 거치면서 어떤 사람이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살아남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어떤 때는 희망의 격정으로 곧 좀 더 나은 세상이 열릴 수 있다는 믿음이 컸던 때도 있었고, 또 어떤 때는 절망의 우울감으로 그 어떤 일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고 도리어 바닥이 없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감싸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남았고, 다시 내일을 말할 수 있고, 함께 하는 것을 함께 말할 수 있습니다. 위대한 독재자들은 거대한 건조 환경을 만들어냄으로써 권력의 지속성을 뽐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과 모두를 돌보는 것으로써 시간을 이어나가고자 합니다.
이번 정치적 위기는 ‘87년 체제의 가을’에 일어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상상 불가능한 일이라고 여겼던 비상계엄 선포가 일어난 것은 현재의 헌정 질서의 취약함을 보여줍니다. 이른바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것도 주된 이유가 될 수 있지만, 현재의 헌정 질서는 (생태적 지향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시민의 사회적, 경제적 권리를 제대로 보장하지 못하고 있으며, 극심한 불평등과 불안전 속에서 극단적이고 비이성적인 정치의 작동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민주공화국의 이념과 국민주권의 원칙 그리고 87년 체제 자체를 낳았던 역사적 경험은 비상계엄이라는 반동적 시도를 무력화시킬 수 있을 만큼 단단하고 넓게 퍼져 있습니다. 이것이 이번 정치적 위기 속에서 우리가 거둔 하나의 수확입니다. 그리고 이 수확물은 현재의 불안을 잠재우고 새로운 땅을 일굴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87년 체제를 넘어서서 나아가는 일이 필요합니다. 87년 체제를 넘어서는 일은 새로운 헌법, 새로운 지향에 사회적, 생태적 전환의 방향과 원칙을 뚜렷하게 새겨 넣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는 다시 우리 정치 공동체의 공통성을 수립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기본소득이 중요한 고리이자 단단한 기반이 될 것이라고 오래전부터 말해왔습니다.
그러니 다시 기본소득이 구현될 수 있는 방안과 경로를 찾아야 하고, 이때 제시할 기본소득 정책을 가다듬는 일이 필요합니다. 또한 2024년에 새로 시작한 기본소득 학교를 좀 더 단단하고 넓은 기반 위에 올려 놓아 정치적 부침에도 전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 과정이 우리 자신을 정돈하고 재정렬하는 일을 수반하겠지만,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의 좀 더 장기적인 전망 및 이에 적합한 태세를 잡는 일도 동시에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지금의 시간이 지독한 불안과 형용할 수 없는 무의미 속에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서로의 안부를 묻고, 좀 더 편안한 내일을 기원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좀 더 건강하고, 좀 더 평온한 나날, 그래서 자유롭고 의미 있는 삶들이 펼쳐지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25년 1월 1일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이사장
안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