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글 모음] 긱셀렉트 기본소득 시리즈 by 이다혜
이다혜 회원(서울대 고용복지법센터 연구위원)이 기본소득을 주제로 리디셀렉트의 긱셀렉트 연재를 합니다. 법학자의 시선으로 기본소득의 정당성과 기본소득 쟁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1화 기본소득에 대한 ‘더 나은 논쟁을 할 권리'(2020년 9월 16일), 2화 기본소득과 분배정의, ‘생명의 경제학’을 향하여(2020년 10월 19일) 등 연재가 이어집니다. 글을 볼 수 있도록 링크합니다.
[기본소득 ①] 기본소득에 대한 ‘더 나은 논쟁을 할 권리’
최근 기본소득에 대한 논쟁이 전개되는 방식은 미투 직후 여성주의 담론이 확산될 당시의 모습을 닮아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페미니즘이라는 용어 자체에 강한 반감을 갖는 사람들이 많았고, 여전히 그렇다. 기본소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모든 새로운 생각과 제도는 반대와 공격을 받으면서 탄생한다. 기본소득에 대한 찬반이 순식간에 정리되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양한 찬반론이 기본소득이라는 새로운 제안을 더 탄탄하게 성장시켜 줄 것으로 예상한다.
그런데 사회 구성원 간의 의사소통이 집단 지성을 발전시켜 간다면 어느 시점에서는 논쟁의 차원이 한 단계 올라서야 한다. 여성주의 논의에서 ‘페미니즘은 여성 우월주의라며?’라는 식의 낮은 수준의 공격이 이제 지양되어야 하는 것처럼, 기본소득 논의에서도 ‘일하지 않아도 돈을 주면 위험하다’라는 식의 반론보다 더 고차원적인 논쟁이 필요하다. 그래서 기본소득은 이제 ‘더 나은 논쟁을 할 권리’를 누릴 시간이 되었다.
[기본소득 ②] 기본소득과 분배정의, ‘생명의 경제학’을 향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에서 조금 더 나아가 보면, 지금의 경제와 사회 영역에 필요한 정의론은 “다른(달라 보이는) 것을 같게” 보는 데에 있다. 인류 역사는 원래 달랐다고 여긴 것을 점차 같게 보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남성과 여성을, 서로 다른 인종을, 내국인과 외국인을 구분하고 차별하다가 비로소 같다고 인정했을 때 진보가 이루어졌다. 반대로 많은 문제의 원인은 같은 것을 다르게 취급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가정의 테두리에 가둬 놓을 때,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열등하게 취급하고 권리를 부정했을 때,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똑같이 일해도 더 낮은 임금을 주었을 때 항상 혐오와 불평등의 문제가 발생한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사회에 다양성이 필요한 것과, 원래 동등하게 취급되어야 할 사람들을 다르게 취급하는 것은 서로 다른 차원의 문제다. 전자는 정치적, 문화적 영역의 문제고, 후자는 경제적 영역에서 주로 일어나는 문제다. 기본소득은 경제 영역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다르다’고 여겼던 것의 본질을 다시 생각한 뒤, 달라 보였던 것을 같게 회복하는 정의론이라 할 수 있다.
[기본소득 ③] 기본소득의 전제 바로잡기 – 노동의 미래 vs 미래의 노동
오래된 미래: ‘노동의 미래’의 역사
‘노동의 미래’에 대한 실패한 예언의 대표적인 사례로 자주 회자되는 사람이 한 명 있다. 그 주인공은 놀랍게도 유명한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이다. 케인스는 1930년에 집필한 짧은 에세이 형식의 논문인 <우리 손자 세대의 경제적 가능성>( Economic Possibilities for Our Grandchildren)이라는 글에서 100년 뒤, 즉 2030년이 되면 놀라운 기술 발전으로 인해 적어도 서구권에서는 근로시간이 주 열다섯 시간 정도로 단축될 것으로 전망했다. 케인스의 예언이 맞았는지 확인해 보려면 이제 10년이 채 남지 않았다. 그러나 가까운 장래에 근로시간이 열다섯 시간, 즉 하루 세 시간으로 줄어드는 세상을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기본소득 ④] 기본소득과 새로운 노동 – ‘자유’와 ‘안정’, 두 날개 모두를 꿈꾸며
기본소득을 받는다면 무엇이 달라질 수 있을까?
작년 이후, 우리나라에서도 기본소득에 대한 법안들이 속속 발의되고 있다(3화 참조). 실제 시행된다면 초미의 관심사는 단연 “그래서 얼마?”일 것이다. 기본소득의 액수는 어떻게 제안해도 반론에 부딪힌다. 높은 액수를 제안하면 예산 제약론과 함께 그만한 돈을 받으면 과연 누가 일하겠냐는 우려를, 낮은 액수를 제안하면 그 정도 금액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반문을 듣게 마련이다. 필리페 판 파레이스를 비롯한 기본소득 학자들은 해당 국가 연간 GDP의 25% 정도를,한국 기본소득당의 경우 월 60만원을 제안하고 있다.
기본소득을 희망하는 사람들은, 학생들조차도, 실물 경제에 대한 본능적인 감각과 합리성을 갖고 이야기한다. 지난 1화에서 지적했듯이 “기본소득을 시행하면 아무도 일하지 않을 것이다”는 식의 반론은 대화의 상대방을 어리석고 무모한 인간으로 치부하는, 근거 없고 무례한 논쟁 방식이다. 또한 2화에서 예산 편성이라는 것은 결국 사회 구성원의 정치적 합의가 본질이라는 점을 이야기했다. 사실, 해보기 전부터 안 되는 것은 없다. 안 될 것 같다는 두려움이 더 크게 보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