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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으로 자본주의 잠식하기
백승호 / 계간 《기본소득》 편집위원장
지난 몇 년은 이상 속의 기본소득이 현실 정치를 만났을 때 어떤 역동들이 가능한지를 볼 수 있었습니다. 유력한 대통령 후보의 기본소득 공약에서부터, 지역의 기본소득 실험들 그리고 시민사회의 다양한 기본소득 목소리가 펼쳐졌던 시기였습니다. 이러한 역동들에 대해 어떤 이는 새로운 세상을 열어젖힐 기본소득이라는 씨가 한국 복지국가에 뿌려진 시기로 평가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이상 속의 기본소득이 성숙하지 못한 채 성급하게 현실 정치를 만났을 때 얼마나 무기력할 수 있었는지를 볼 수 있었던 시기로 평가하기도 합니다. 평가의 방향은 다소 다르지만, 이러한 평가들이 공유하고 있는 지점은 긴 호흡과 살고 싶은 대한민국의 미래 모습입니다. 좋은 씨를 다시 뿌리고, 뿌려진 씨가 자라나 열매를 맺기를 기다리는 긴 호흡, 기본소득 운동이 시민들에게 제시해야 할 분명한 미래 모습.
인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야만적 형태의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다양한 운동과 정치가 있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사회주의 운동가이자 이론가였던 에릭 올린 라이트는 이러한 반자본주의적 투쟁을 자본주의 분쇄하기(혁명), 자본주의 해체하기(민주적 사회주의), 자본주의 길들이기(사민주의), 자본주의에 저항하기(사회운동), 자본주의에서 벗어나기(공동체 운동)로 유형화하기도 했습니다. 자본주의 길들이기와 저항하기는 자본주의의 문제들을 ‘개선’하는 것을, 나머지 세 가지 전략은 자본주의적 착취 ‘구조’를 넘어서는 것을 강조합니다. 자본주의 저항하기와 자본주의에서 벗어나기 전략이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한 상향식 반자본주의 투쟁이라면, 자본주의 길들이기와 해체하기는 국가 중심적 하향식 전략에 해당합니다.
어떤 전략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역사적 비판들이 있었지만, 에릭 올린 라이트는 상향식 전략과 하향식 전략을 결합한 자본주의 잠식하기 전략의 가능성에 주목했습니다. 서로 다름을 확인하고 헤어질 결심을 하기보다, 서로 공유하고 있는 지점을 확인하고 함께 하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입장입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기본소득 운동의 한 길을 가는 입장들이 공유하고 있는 규범적 가치, 미래 사회에 대한 공동의 비전입니다. 공유하는 가치가 다르다면 빠른 헤어짐이, 같다면 인내와 상호 이해와 소통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이번 계간 기본소득에서는 지난 대선 기간의 기본소득 운동들에 대한 평가를 기획으로 담았습니다. 다소 거칠게, 다소 날카롭게 서로의 다름을 확인하고 있지만, 그 행간에 공유하고 있는 가치를 발견하는 것은 독자의 몫일 것 같습니다. 기고해주신 오준호, 고봉준, 윤형중, 김찬휘 님께 감사드립니다.
논점 코너에서는 꾸준히 지역 활동을 해 오신 양준호 교수님과 박경철 박사님께서 지방분권, 지역 균형 발전, 지역 격차 해소의 관점에서 지역과 기본소득을 다루어 주셨습니다. 화제의 인물 코너에서는 요즘 Youtube에서 핫한 기본소득 상상 인터뷰 ‘파문’을 이번 호부터 연재합니다. 이번 호에는 고전 평론가 고미숙님과 기본소득 국민운동 본부 대표 김세준님 편입니다. 문학 코너에서는 김승희, 장석남, 김금희, 황시운 님이 소중한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학술동향 코너에서는 기본소득에 대한 신학적, 사회과학적 논의를 집대성한 책 『한국교회, 기본소득을 말하다: 기본소득에 관한 신학과 사회과학의 대화』를, 해외 동향 코너에서는 돌봄혁명의 제안자 중 한 명인 가브리엘레 빈커의 인터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특별기고 코너에서는 기본소득에 관한 교황의 입장을 가톨릭 사회교리의 관점에서 다룬 마르쿠스 슐락니트바이트 박사의 글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함께 만들어가는 기본소득 코너에서는 전성철 님이 네오오페라이스모neo-operaismo 이론가들의 기본소득론을, 안찬수 님이 『발언Ⅲ』의 출간을 계기로 김종철 선생의 기본소득을 다루어 주셨습니다. 기본소득과 나 코너에서는 기본소득당 동물권 생태의제기구 어스링스에서 활동하시는 윤희주 님이 기본소득과 동물과의 공존에 관한 글을, 문학평론가/<뉴래디컬리뷰> 편집인 최진석 님이 존재의 권리로서 주권자의 몫으로써 기본소득에 관한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기본소득의 새로운 지평 코너에서는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김지현 님이 석사학위 논문 「청년배당의 쟁점과 기본소득의 궤적: 정책-연결망의 형성과 변형을 중심으로」와, 제주대학교 이재섭 님이 박사학위 논문을 소개하시면서 공동체와 공동자원의 지속가능성 그리고 시민배당의 관계에 대한 소중한 원고를 보내주셨습니다.
계간 기본소득은 이렇게 소중한 원고를 보내주신 분들의 한 줄기 희망으로 만들어집니다. 모든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