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

#004 | 2020 봄

|머리글 |

기본소득.
계층화의 정치를 연대의 정치로

백승호 / 계간 <기본소득> 편집위원장

복지국가 연구에서의 고전인 『복지자본주의의 세 가지 세계Three worlds of capitalism』에서 에스핑-안데르센Esping-Andersen은 복지체제의 특징을 탈상품화와 계층화 체제로 규정한다. 복지국가는 노동력의 탈상품화를 통해 사회의 불평등 구조에 개입하고 그것을 시정하는 메커니즘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가 하나의 계층화 체계라는 것이다. 복지국가가 계층화 체계라는 함은 복지 제도들을 통해 그 사회의 계층 질서가 유지 또는 강화되고, 사회적 관계의 적극적 서열화가 조장됨을 의미한다.

대표적인 선별주의 프로그램인 자산조사형 사회부조는 납세자는 감시하고, 수급자는 낙인을 느끼게 함으로써 강고한 이중구조 사회를 만들어낸다. 사회보험 또한 계층화 정치의 전형으로 활용된다. 계급이나 노동시장 지위에 따라 사람들을 서로 다른 사회보험 제도에 포괄하는 방식을 통해 가입자들 사이의 분열을 공고화한다. 이런 곳에서는 계층화의 정치가 실현된다. 반면에 보편주의적 복지체제는 사회부조보다는 보편적 수당을 통해, 조합주의적 사회보험보다는 통합적 사회보험을 통해 지위의 평등, 계급 초월적 연대를 촉진한다. 이런 국가들에서는 계층화의 정치가 아닌 연대의 정치가 실현된다.

계층화의 정치는 그 사회의 빈곤과 불평등에도 영향을 미친다. 저소득층 등 취약계층에 집중적으로 지원하는 선별적 복지국가에서 한정된 자원을 더 효율적이고 비용 효과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취약계층이 더 많은 복지혜택을 누릴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복지국가 역사를 보면 보편적 연대의 정치를 펼친 나라들에서 취약계층이 더 많은 복지를 누리고, 그 결과 빈곤과 불평등 수준이 더 낮다. 이른바 재분배의 역설이다. 재분배의 역설이 나타나는 이유는 연대의 정치를 펼치는 나라들에서 복지를 경험한 중산층들이 친복지적 성향을 보이고, 복지 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증세에 더 적극적이기 때문이다.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속담은 한 국가의 역사적 맥락을 떠나서 인간의 보편적 정서다. 재분배의 역설이 북유럽 국가들의 특수한 역사적 맥락에서나 가능했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이런 연대의 복지정치가 실현된 역사적 경험이 드물다. 재정효율성, 행정효율성만을 강조하는 막강한 (신)자유주의적 경제관료, 행정관료가 오랫동안 지배해온 한국 사회의 역사적 특수성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런 효율성 논리는 부지불식간에 진보진영으로도 흡수되어왔다. ‘어려운 사람들을 먼저 도와야 된다’는 선별주의적 논리는 진보진영에서도 흔히 발견된다. 이러한 논리는 얼핏 도덕적으로 우월하고 정당해 보인다. 심지어 가난한 서민들조차 자신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복지가 필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정서는 신자유주의의 재정효율성, 행정효율성 논리에 교묘하게 활용된다. 동상이몽이다.

물론 진보진영에서의 선별주의 논리에는 진정성이 있다. 평생을 약자 편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그들의 아픔이 먼저 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동상이몽의 우파진영에서 내세우는 선별주의의 본질을 잘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우파진영에서의 선별주의 논리는 사회적 이중구조와 균열을 조장함으로써 복지의 확대를 저지하는 데 있다. 돈이 없으니 아껴서 가난한 사람부터 도와야 한다는 생각과는 거리가 멀다.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계층화의 정치는 성공적으로 작동해왔다. 진보진영의 선한 동기는 계층화의 정치 앞에서 무력화되어왔다. 그 결과는 우리 앞에 놓여있는 불평등과 양극화의 심화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20여 년을 이어온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수급대상의 규모나 급여 수준에서 한발도 앞으로 나가지 못했던 것이 하나의 사례다.

코로나라는 긴급한 재난 시기에도 여전히 한국에서는 계층화의 정치가 빛을 발하고 있다. 정부는 재난지원금을 전체 인구의 70%로 제한함으로써 받는 자와 받지 못하는 자 사이를 갈라놓고 있다. 일부 진보진영에서조차 왜 취약계층 지원을 먼저 하지 않느냐며 성토하고 있다. 정확하게 계층화의 정치를 절실하게 원하는 세력들이 바라는 모양새다.

재난은 특정인에게 국한되어 다가오지 않는다. 따라서 재난지원금은 모두를 대상으로 해야 한다. 재난은 또한 사회적으로 취약한 계층에게 더 큰 피해를 안겨준다. 따라서 이들에게 좀 더 두터운 사회적 보호 장치가 작동해야 한다. 지금은 선별적 정책이든 보편적 정책이든 각자가 가지고 있는 상품의 우수성을 강조할 한가로운 때가 아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두에게 재난지원금을 지원함과 동시에 더 많은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더 많은 지원의 손길이 닿도록 정부를 강력하게 추동하는 것이다. 이것이 계층화의 정치를 넘어 연대의 정치를 실현하는 방법이다.

이번 호의 기획주제는 총선을 앞두고 이슈가 될 청년기본소득을 다룰 예정이었으나, 뜨거운 논쟁이 진행되고 있는 재난기본소득을 전면에 배치하였다. 코로나라는 극한의 상황이 쏘아올린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가 한국사회의 계층화 정치를 무력화시키고, 코로나 이후 새로운 세상을 여는 한 알의 밀알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머리글

기본소득. 계층화의 정치를 연대의 정치로 _ 백승호

이 계절의 이슈 1 : 재난 기본소득

[좌담] 재난 기본소득의 의미와 우리가 할 일 _ 안효상, 용혜인, 오준호, 백승호
코로나바이러스, 재난 기본소득, 그리고 이후 _ 안효상

이 계절의 이슈 2 : 청년을 위한 새로운 정책과 기본소득

정의당의 청년사회상속과 청년기초자산: 무엇을 위한 기초자산인가? _ 서정희
‘서울시 청년수당’의 현재적 의의와 전망 _ 백승호
‘경기도 청년기본소득’의 현재적 의의와 전망 _ 이지은

화제의 인물

[유승희 의원] “기본소득은 ‘버림받지 않는다’는 믿음이죠” _ 인터뷰어 오준호
[송상호 충북네트워크 대표] 충북의 미래를 바꿀 기본소득을 만나다 _ 인터뷰어 박선미

문학

[시] 모든 영화는 다큐멘터리다 _ 이희중
[꽁트] 빵을 굽는 동안 _ 신경숙

류보선의 종횡무진 기본소득 4

이미-재난적 상황과 ‘아름다운 나라’라는 꿈 _ 류보선

동향

[학술 동향] 종교와 기본소득 _ 이관형
[현장스케치] 기본소득당 창당대회 _ 서정희
[현장스케치] 위험사회에서 ‘기본소득’ 연대를 향한 또 한걸음: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법인 설립 총회&제8차 정기 총회 후기 _ 김수연

기본소득과 나

모든 사람은 같은 가치를 갖는다 _ 이원재
국유화와 ‘기본소득 숭그리당당’ _ 김찬휘
서점에 놀러오세요! _ 서희원

친절한 교성 씨의 기본소득 QnA

기본소득은 ‘젠더평등’에 기여할 수 있을까요? _ 김교성

Basic Income Magazine

| 발행일: 2020년 4월 20일
| 발행처: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 편집위원장: 백승호
| 편집위원: 김교성, 류보선, 서정희, 이관형, 이건민, 이지은
| 편집디자인: 사과나무
|기본소득: Online ISSN 2733-8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