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대통령 선거와 지방선거의 의미: 기본소득 의제의 관점에서
안효상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이사장)
Note. 이 글은 2022년 4월 20일에 열린 기본소득정치공동행동 국회토론회 “기본소득과 지방자치” 2부 지방선거 기본소득 정책방향의 기조발제문이다. [토론회 보기]
이성적인 사람들의 패배가 이성의 패배인가?
브레히트는 “갈릴레이의 생애”에서 “이성의 승리는 이성적인 사람들의 승리”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성적인 사람들의 패배는 이성의 패배인가? 2022년 3월 10일의 결과를, 특히 기본소득 의제의 시선에서 바라볼 때 이렇게 대위 명제 같은 식의 질문이 떠오르는 것은 당연한 것처럼보인다. 위치에 따라 다른 강도로 느꼈지만, 3월 10일의 결과에 따라 “한국이 최초로 보편적 기본소득을 도입하는 나라가 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최소한 ‘그럴 수 있다’라고 대답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대답했던 이유는 기본소득을 자신의 주요한 정책으로 내세운 사람이 집권 여당의 대통령 후보로 등장했기 때문이며, 2016년 이후 한국의 정치 지형 및 대선에서의 인물 대결이라는 관점에서 ‘질 수 없는 선거’였기 때문이다. (기본소득 의제가 이렇게까지 부상하게 된 이유는 아래에서 살펴볼 것이다.)
집권 여당 후보가 아슬아슬한 차이로 패배했기 때문에 그 원인을 따지는 일은 무척이나 힘들 것이며, 이 자리는 이를 논의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그저 패배했다는 것만 받아들이기로 하자. 다만 기본소득 의제와 관련해서 미리 두 가지는 말해두어야겠다. 하나는 선거전이 진행될수록 기본소득 의제가 후퇴하거나 흐릿해졌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기본소득을 비롯한 진보적인 혹은 전환적인 사회경제적 개혁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개인화된 신자유주의적 욕망의 주체성과는 다른 연대와 공동의 주체성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그런데 패배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그것도 이성적인 사람들은 패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건 아마 굴복하지 않는 태도일 것이다. 이때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은 한편으로 패배를 철저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하며, 다른 한편으로 여전히 이성의 승리를 믿을 뿐만 아니라 이를 가능하게 조건을 마련하기 위해 다시 시도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한국에서 기본소득 의제의 궤적 혹은 기본소득의 모험이라고 할 만한 것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게 필요할 것이다.
기본소득 의제는 어떻게 진전했는가?
바이런이 “어느 날 아침 깨어보니 유명해졌다”라고 말했다지만, 그는 “미래에 대한 가장 훌륭한 예언자는 과거”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기본소득 의제가 부상한 것도 그만큼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며, 이 의제의 운명도 절반쯤은 거기에 좌우될 것이다. 한국에서 기본소득 의제가 부상한 데 출발점은 잿더미 속에서도 현실적이면서도 전환적인 의제를 제출하려고 했던 정치적, 사회적 개인과 집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기본소득이 그런 성격이 있는 의제라는 것을 알아챘을 뿐만 아니라 이 아이디어의 이론적 기반을 단단히 하려고 하는 한편, 현실적, 정치적, 조직적 계기를 놓치지 않으면서 실현을 위한 정치적 통로를 개척하려고 했다. 다음으로 일부 지식인 집단 및 시민사회 운동을 제외하곤 한국의 어떤 의미 있는 정치 세력도 전환적인 사회경제적 개혁을 추구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한때는 탄압받는 야당이었다고 이제는 한국 사회의 주류와 겹쳐 있는 민주당 계열은 민주화와 함께 산업화를 자신들이 계승했다는 것에 만족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강력한 탄압을 견뎌내고 주요한 개혁 집단으로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한때 국제적으로도 찬사를 받던 한국의 노동(조합)운동은 주변화된 지 오래되었다.
그럼에도 지난 30년 동안 이루어진 신자유주의적 전환 그리고 최근의 급격한 기술 변화 등은 사람들의 삶을 불안정하고 불안하게 만들었고, 이는 언제든 계기만 있으면 터질 수 있다는 것을 또한 그 시간들이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진정성 있고 개혁적인 인격이 등장할 수 있는 배경이며, 기본소득 의제가 부상한 세 번째 이유일 것이다.
끝으로 속도의 정치라고 할 수 있는 한국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기술적 지반 그리고 이를수용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있다. 길게는 무상 급식부터 짧게는 2016년의 여러 사건들, 그리고 최근의 코로나바이러스 위기까지 한국 사회는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으며, 이는 기본소득 의제의 부상, 수용, 반대라는 양상의 조건을 이루고 있다.
기본소득 의제가 부상한 이유를 위에서 말한 것에서 찾는 것은 거꾸로 기본소득 의제의 정치적, 사회적 기반이 그만큼 단단하지도 넓지도 않았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런 점에서 기본소득 의제의 관점에서 자기실현을 위해 집권 여당의 대통령 후보를 실현의 문턱을 넘는 통로로 선택한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이 과정에서 기본소득국민운동본부 같은 시민적 조직의 출현은 이런 정치 과정의 효과이자 또 다른 추동력으로 볼 수 있는데, 이런 점에서 한국에서 지난 대통령 선거는 기본소득 정치의 포퓰리즘적 계기라고도 할 수 있다.
밀물이 지나갔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아도르노가 아우슈비츠(오시비엥침) 이후 “시를 쓰는 것은 야만적이다”라고 말했을 때 무엇을 생각했을까? 홀로코스트에 대한 바우만의 해석을 따라 홀로코스트가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현대성의 핵심적 양상들이 종합돼 나타난 필연적 현상이라고 한다면, 시를 쓴다는 것은 그 사태에 눈을 감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야만이라는 것은 여기가 아니라 저기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에서 해야 할 일은 진부할지 모르지만 산문, 즉 아도르노가 말한 에쎄(essai)를 쓰는 일, 아니 행하는 일이다.
대통령 선거가 기본소득 정치의 포퓰리즘적 계기라고 할 때 우리가 받아든 결과는 그 계기의 해체를 의미할 것이다. 비유하자면 고조되었던 기본소득 의제의 물결이 잦아들고 갯벌이 드러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두 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우리가 말한 기본소득이 무엇이었고, 무엇을 겨냥한 것이었는가라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어떤 흔적들이 남아 있고, 혹은 남겨지게 될 것인가라는 점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우리가 대홍수 이후의 백지상태나 거대한 폭발 직후의 진공 상태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먼저 우리에게 기본소득은 무엇이고, 무엇을 겨냥했는가를 말해보자. 어떤 기본소득을 어느 정도로 지급하는가와 상관없이 기본소득이 모두에게 경제적 기반의 일부를 마련해 주어 (장기적으로) 자율적인 개인들로 살아갈 수 있게 한다는 점에 모두가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런 개인들은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떤 지향 속에 살아갈 것인가?
다음으로 우리에게 남은 흔적들 혹은 남겨야 하는 흔적들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두 가지 정책, 제도의 문턱을 넘으려 하는 정책들, 이것들에 대한 사람들의 경험, 이 경험에 대한 이론과 담론, 그리고 특히 대통령 선거를 통해 조명탄처럼 켜졌던 기본소득이라는 기표 등일 것이다.
이런 흔적 속에 맞이하는 지방선거는 군사적 비유를 하자면 (군사적 비유이기에 입체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동학적이지도 않다) 1950년 추운 겨울에 벌어진 장진호 전투와 비슷할 것이다. 겉으로는 드러난 것은 후퇴이지만, 적에게 큰 타격을 주어 전체 전쟁의 판도에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함께 싸운 우리는 누구도 남겨지지 않는다는 전설을 남긴 전투. 이때 중요한 것은 조직적 퇴각을 위해 누군가는 버텨야 하고, 누군가는 또 전진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보면 지방선거에서 우리가 차지하는 장소가 우리가 후퇴하는 지점일 것이다. 이 지점이 또 다른 진전의 출발점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사람과 함께 하고 어떤 무기를 들고 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