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 왜 필요한가?
신자유주의 체제의 경제위기는 항시적, 기본소득에 답 있다
기본소득이란 모든 사회구성원의 ‘적절한 삶’을 보장하기 위해 정치공동체가 모든 구성원에게 개별적으로 아무런 조건 없이 정기적으로 지급하는 것이다. 물론, 특히 오늘날에, 어떤 (정치)공동체가 구성원의 안녕과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말하겠는가? 그리고 이를 위한 이러저러한 방도가 없는 사회가 어디 있겠는가? 대표적으로 복지국가의 다양한 복지 제도와 정책이 그런 것이다.
하지만 기본소득에 대한 주장과 관심이 커지는 이유는 사회구성원의 안녕과 행복을 추구한다는 기존의 방책들이 이제는 별로 효과가 없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반대 효과를 가져왔다는 인식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일자리가 곧 복지라는 명제 아래 완전고용을 추구하는 것이 복지국가의 주요 목표였지만 저성장 혹은 고용 없는 성장의 시대에 이것이 가능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 시장의 효율성을 통해 모든 사람의 자유와 행복을 보장하겠다는 신자유주의의 약속은 사실상 거짓이었음이 드러난 지 오래이다.
오늘날 기본소득의 필요성은 우선 경제체제의 운영 방식이 보이는 한계에서 나온다. 전 세계적으로 보면 1980년대 이후에, 한국으로 한정하면 1997년 이후에 본격화된 신자유주의의 특징은 불안정노동체제와 금융시장 자본주의의 본격화이다.
불안정노동체제는 비용 절감을 통해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기업의 전략 속에서 일반화된 사회적 양상이다. 이 속에서 노동자들은 한편으로 낮은 임금과 장시간 노동뿐만 아니라 고용 불안에 시달리며, 다른 한편으로 아예 일자리가 없어서 삶의 불안에 시달린다. 이런 사태가 가능했던 것은 1980년대 이후 자본-노동 사이의 힘의 관계가 바뀐 데 있다. 물론 여기에 더해 기계화와 자동화가 늘어난 것도 한몫했다. 특히 기계화와 자동화는 점점 고용 자체를 줄이는 경향을 띤다.
다음으로 금융시장 자본주의의 가장 큰 문제는 실물 경제와 무관한 방식으로 이윤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즉 적절한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이 매우 제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일종의 제로섬 게임처럼 누군가의 이득은 누군가의 손해를 수반한다.
그런데 어떤 경제체제이든, 생산-유통-소비가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며 돌아가지 않을 경우, 그 체제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지금의 신자유주의 체제는 극단적인 이윤 추구 속에서 소득 분배가 너무나 불균형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다수가 소비할 수 있는 몫 자체가 심각하게 줄어들었다. 따라서 경제 위기는 항상적이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삶의 조건을 빼앗기면서 사회 자체가 해체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현존 경제체제의 한계에 더해 생태 위기라는 더욱 큰 문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생태 위기는 크게 보아 자원 고갈과 기후 변화로 인한 생태계의 위기를 가리킨다. 우선, 우리 문명을 떠받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석유 자원을 생각해 보자. 석유 자원의 고갈 문제는 이미 오래전부터 운위되었는데, 이제는 국제에너지기구조차 2006년에 이미 피크 오일이 지나갔다고 말할 정도이다. 연료로서의 석유는 광범위하게 쓰일 뿐만 아니라 다양한 소재의 원천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석유 없는 세상은 지금과 많이 달라질 것이다. 다음으로 기후 변화도 심각한 문제이다. 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은 수많은 해안가 도시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이른바 이상 기후로 인한 다양한 피해도 벌써 드러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중의 문제에 대해 기본소득이 주요한 해법이 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소득과 자산에 따른 심각한 사회양극화를 넘어서서 모든 사회구성원이 적절한 삶을 누릴 뿐만 아니라 생태 위기가 극복할 수 있는 방도가 될 수 있는가?
우선 기본소득이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지급된다면 최소한의 삶을 재량껏 누릴 수 있는 물질적 조건이 마련되는 셈이다. 그러면 당연히 소비가 어느 정도 늘어 경제가 좀 더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재원을 무엇으로 마련하느냐에 따라 (소득세, 자본 이득세 같은 경우) 소득 재분배 효과가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이뿐만이 아니라 또 다른 더욱 적극적인 효과가 나온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이 고용에 목을 매는 것은 다르게 먹고살 수 있는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다른 조건이 없다면 나쁜 일자리(저임금, 장시간 노동, 위험한 일)라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기본소득이 주어지면 굳이 오랜 시간 일하지 않아도 되고, 임금이 적거나 위험한 일은 거부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이렇게 된다면 사람들이 더 많은 시간을 다른 활동, 예를 들면 문화 활동, 돌봄 노동, 정치 활동 같은 활동에 쏟을 수 있게 되어 이른바 문화 사회로 이행할 수 있고, 민주주의도 더욱 확장될 수 있다.
이런 효과의 연장선에서 기본소득은 생태 위기의 해법이 될 수 있다. 오늘날 생태 위기를 낳은 근원은 이윤의 극대화를 위한 과도한 생산과 소비라 할 수 있다. 자본은 살아남기 위해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판매하려고 하며, 다수의 사람들은 이 속에서 그저 소비자로 존재한다. 즉 인격이 아니라 무엇을 얼마나 소비하느냐를 잣대로 자신과 타인을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많이 생산하고 많이 소비한다고 해서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깨닫게 되었다. 다시 말해 ‘좋은 삶’은 물질적 풍요에 있는 게 아니라 자아가 충만해지고, 인간 및 자연과의 관계가 풍부해지는 것에 있다는 것을 이제 어렵게나마 알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기본소득으로 인해 사람들이 더 적게 일하고, 비물질적, 문화적 활동에 더 많은 시간을 낸다면 우리는 지금과 같은 경제 성장이 아니라 삶과 자연의 증진을 원리이자 목표로 삼게 될 것이다.
분명 기본소득은, 실현된다면 이런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 올 것이다. 하지만 아직 다수가 기본소득을 지지하고 있지는 않다. 아마 그것은 낯설기 때문일 것이다. 이때 낯설다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 소득이란 일한 대가로 돌아오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무 조건 없이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문제 제기에 대해 기본소득이 이러저러한 이유로 정당하다고 답할 수 있어야 한다.
기본소득은 왜 정당한가?
기본소득은 경제 우선의 논리를 뒤집는 시도, 경제는 인간적, 시민적 삶의 기초
오늘날에는 모든 사람에게 이러저러한 권리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권리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것 혹은 출발점이 생명과 생존의 권리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사실 인간의 생명 혹은 생존은 개인의 권리가 성립할 수 있는 조건이므로, 생명권이나 생존권은 권리 이전의 권리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권리란 어떤 정치공동체 내에서 혹은 그런 공동체를 통해서만 보장된다. 다시 말해 인간의 권리라고 말하지만 현실은 시민의 권리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정치공동체 밖에 혹은 정치공동체의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의 무권리 상태가 문제가 된다.) 이런 시민의 권리는 현대 사회에서는 헌법으로 보장되어 있다.
하지만 현실의 또 다른 논리는 자본주의적 상품시장경제이다. 생산수단(자본)이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노동력 상품을 시장에서 팔고 그 대가로 받은 임금으로 살아가야 하는 게 자본주의의 논리이다. 이때 모든 사람이 적절한 가격으로 자신의 노동력 상품을 팔 수 있다면 큰 문제는 드러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이다. 자본주의적 경기 변동에 따라 나타나는 임금 등락은 말할 것도 없고, 거시경제적으로 보면 아예 일자리가 없는 경우도 적지 않다. 게다가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할수록 이런 경향은 심화된다. 여기에 더해 또 다른 현실은 노동력 상품 판매자가 보통 말하는 ‘을’의 지위를 차지하며, 이는 노동 과정에서의 소외, 부당한 대우까지 감수해야 하는 처지에 빠지게 한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존권을 박탈당하거나 불완전하게밖에 보장받지 못하는 처지에 빠질 수 있다.
기본소득은 이런 현실의 논리를 뒤집고, 정치라는 관점에서 모든 구성원의 생존 혹은 생존의 물질적 조건을 보장하는 방도로 제출된 것이다. 정치공동체가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우선 공화주의적 견해를 말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기원하는 공화주의는 모든 사회구성원(시민)의 자유의 확대 및 참여를 보장하는 것을 자신의 목표로 삼는 정체(政體)이다. 이를 시민의 측면에서 보자면 자신의 사적 이익이 아니라 공적인 일을 우선시하는 것이며, 자신의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과 충성심의 표현인 애국심으로 나타난다.
이런 사회가 성립하고 작동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모든 시민이 그 무엇보다 독립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독립성은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 것 모두를 포함한다. 다시 말해 타인에게 자신의 삶을 의탁해야 할 정도로 가난한 사람이거나, 타인에게 어떤 판단을 의존해야 할 정도로 빈약한 정신의 소유자라면 공화국의 시민으로서 자격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물론 고대 사회는 노예에게 물질적 생산을 의존했기에 시민들이 정치와 예술에 참가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벌 수 있었다. 또한 완전한 독립성을 갖춘 시민이란 어찌 보면 이상(理想)이었지 현실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시민의 자유가 보장되는 정치공동체를 우리의 목표로 삼는다면 시민의 독립성은 가장 중요한 전제가 된다.
문제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인 오늘날에는 시민의 물질적 독립성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이다. 한 가지 방식은 ‘완전 고용’을 통해 그리고 부수적으로 부당한 계약 조건의 제약을 통해 시민의 물질적 독립성을 보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논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 사회주의 국가처럼 생산수단을 국가가 소유하면서 모든 사람에게 일자리를 ‘할당’하는 것도 바람직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거기서는 그 무엇보다 공화주의가 지향하는 자유가 부족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적절한 수준의 기본소득을 통해 시민들의 물질적 조건을 보장하는 것이 양자의 위험을 피하는 길이라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기본소득은 모든 자원의 공유라는 관점에서도 가능한 일이다. 이른바 자연 혹은 대지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니며 모두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 인간의 노동이 들어감으로써 인간적으로 유용한 어떤 것으로 변화하기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모두에게 동등한 몫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몫이 있는 것은 분명하며, 그것이 어느 정도인지를 결정하는 것이 정치공동체의 업무라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알래스카이다. 미국 연방에 가입한 1959년에 알래스카는 주 헌법을 통해 알래스카의 모든 자연자원은 알래스카 사람들에게 속한다는 원칙을 천명했다. 이에 따라 이후 발견된 석유에서 나오는 수익금을 알래스카 영구기금으로 만들었고, 이를 ‘배당금’으로 알래스카 주민에게 매년 지급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에 대해 석유 같은 자원이 없는 경우에는 불가능하지 않느냐고 말하지도 모른다. 하지만 공유 자원이 하나도 없는 나라 혹은 지역은 없다. 그것 없이는 인간의 삶 자체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현대 사회의 가장 중요한 공유 자원 가운데 하나는 전파이다. 이를 사적 소유나 배타적 이용으로 할 것이 아니라 만인의 것으로 하고, 거기서 나오는 수익금의 일부를 기본소득 재원으로 삼을 수 있다.
기본소득을 공화주의적 관점에서 보건, 자원의 공유라는 관점에서 보건 모두 경제 우선의 논리를 뒤집는 시도이다. 다시 말해 경제는 인간적, 시민적 삶의 기초이지 통제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기본소득은 기존 사회의 논리를 문제 삼는 것이고 어떤 심대한 변화를 겨냥하는 것이다.
기본소득, 어떻게 돈을 마련할 것인가?
모든 공동체에는 공유재산이 존재, 창조적인 경제활동 역시 공동의 사회활동에 의한 것
기본소득을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지급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인정하는 경우에도 언제나 이런 질문이 나온다. 그 많은 돈을 어떻게 마련할 수 있지? 역사상 사회구성원의 안녕과 복지를 최대로 추구했다고 할 수 있는 20세기 후반의 유럽 복지국가가 재정적 어려움을 겪으며 약화된 것을 감안하면 너무나 당연한 질문이다.
아니, 좀 더 근본적으로, 어떤 조건도 없이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할 경우, 누가 일을 할 것이며, 따라서 뭔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할 수 있다.
우선 전자에 대한 이러저러한 대답을 찾아보자. 기본소득을 정치공동체, 대체로 보아 국가가 지급한다고 하면 당연히 먼저 떠오르는 것이 조세 체계의 개혁이다. 기본소득 지급을 위한 조세 개혁과 관련해서 ‘좌파적’ 관점은 소득과 부의 재분배를 겨냥하여 각종 소득세와 자산세를 ‘누진적으로’ 추가로 걷는 것이다. 사실 이는 기존 복지국가의 재원 마련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가 2014년 봄에 제시한 모델도 주로 이를 따르고 있다.
1인당 연간 360만 원을 지급하고자 하는 이 모델에 따르면 필요한 재원이 181조 5000억 원이다. 이를 위해 소득세 범주에 포함할 수 있는 것으로 근로소득 및 종합소득 27조 1000억 원, 배당 또는 이자소득 종합과세 15조 원, 증권양도소득 종합과세 30조 원 등을 추가로 걷어야 하며, 자산세라 할 수 있는 토지세는 공시지가의 1% 징수 원칙에 따라 39조 원을 걷게 된다. 이외에 생태세 40조 원, 지하경제 과세 20조 원, 기본 사회복지 지출 전환금 13조 1000억 원 등이 있다. 그리고 이 모델을 시뮬레이션해 본 결과, 소득세 증가에도 불구하고 순수 세금 납부액이 기본소득으로 받는 돈보다 많아서 ‘손해’를 보는 경우는 소득 구간 85%(연소득 7957만 원) 이상이다. 따라서 상당한 재분배 효과가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토지세로 걷는 부분은 공유 재산에 대한 모두의 권리라는 측면에서 볼 수도 있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토지는 ‘주어진 것’이지 인간이 새롭게 창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이용권을 누릴 수는 있어도 배타적 소유권을 행사하고, 또 이를 상속한다는 것은 정당하지 않은 일이다. 따라서 현행 토지 소유권을 다시금 모두의 것으로 돌리기 위한 한 가지 방법으로 적절한 세금을 매겨 ‘환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럴 경우 토지세는 기본소득 재원을 마련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공유 재산의 재형성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토지세에 대해 이런 방식으로 사고하는 것은 기본소득 재원 마련과 관련해서 소득세 중심의 방법과는 다른 방식을 고려할 수 있게 해 준다. 그것은 알래스카 모델과 유사하게 공유 재산에 대한 동등한 접근권의 일부를 기본소득으로 지급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도 반론이 있다. 석유와 같이 가치 있는 자원이 없는 경우에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토지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의미 있는 공유 재산이 없는 공동체는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현대 사회에서 대표적인 공유 재산이라 할 수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전파이다. 현재는 이동통신회사라는 기업이 돈을 버는 데 이용하는 자원이지만, 이것을 모두의 것으로 보고 여기서 나오는 수익을 배분할 수 있을 것이다.
창조적인 경제 활동은 전통과 유산, 그리고 사회구성원의 공동 활동에 의해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특정 생산물의 생산에 직접 기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일정한 지분이 있는 것 …… 국민배당 혹은 기본소득은 사회구성원의 권리
기본소득 재원을 마련할 수 있는 또 다른, 매우 혁신적인 방법이 국가화폐에 기초한 국민배당 혹은 사회배당이다. 이는 영국의 엔지니어였던 더글러스 클리포드가 1930년대에 입안한 사회 신용론에 기초한 것이다. 그가 보기에,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상품의 가격은 언제나 임금 등 소득에 비해 크기 때문에 상품이 제대로 팔리지 않으면서 발생하는 공황이 불가피하다는 것, 그리고 사적 기업인 은행이 창출하는 신용은 부채에 기초한 것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미래를 차입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인식에 따라 그는 금융 체계의 개혁을 요구했는데, 그것은 은행의 화폐 발행 및 신용 창출 기능을 없애는 대신에 국가가 부채를 기반으로 하지 않는 화폐를 발행하는 것이었다. 또한 구매력을 높이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국민배당이라는 이름의 기본소득을 제안하였다.
그런데 클리포드는 구매력을 높이기 위해서만 국민배당을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보기에, 현재 벌어지고 있는 창조적인 경제활동은 전통과 유산, 그리고 사회구성원의 공동활동에 의해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특정 생산물의 생산에 직접 기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모든 구성원에게는 일정한 지분이 있다. 이런 점에서 그에게 국민배당 혹은 기본소득은 사회구성원의 권리였던 것이다.
끝으로 재원 마련이라는 문제는 얼마만큼의 기본소득을 지급할 것인가라는 문제와 뗄 수 없는 것이다. 앞서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의 모델은 일인당 연간 360만 원, 즉 매달 30만 원을 지급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현재의 생계비 수준을 감안할 때 가족 구성원의 숫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충분하다’고는 할 수 없는 액수이다.
물론 생태적 한계에 부딪힌 오늘날에는 물질적 소비는 생태 문제와 함께 고려해야만 하며, 정치공동체가 지급하는 기본소득의 액수는 민주적으로 결정돼야 할 것이다. 여기에 더해 기본소득의 지급액은 우리가 기본소득으로 이루고자 하는 사회가 어떤 것인가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 이것이 다음에 논의할 문제이다.
기본소득은 어떤 사회를 지향하는가?
기본소득,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를 함께 지키는 방법
우리는 앞에서 기본소득의 필요성, 정당성, 재원 등에 관해 살펴보았다. 기본소득이 필요한 이유는 한편으로 현재의 불안정노동체제가 더 이상 ‘일자리=생존’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 생태적 위기로 인해 더 이상 (물질적) 성장 지향 사회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정당성과 관련해서는 자유로운 시민들로 이루어진 공화정이 그 구성원의 물질적 독립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과 모든 사회구성원은 공유재에 대해 일정한 몫이 있다는 관점을 제시했다.
끝으로 재원과 관련해서는 부의 재분배를 목표이자 근거로 하여 소득과 자산에 적절한 과세를 해서 기본소득 재원을 마련하는 것, 앞서 말한 공유재인 자연적, 사회적 자원에서 나오는 수익을 기본소득으로 분배하는 것, 국가화폐의 발행을 통한 배당을 지급하는 것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렇게 보면 기본소득은 얼핏 보기에는 매우 단순한 아이디어라고 할 수 있지만, 매우 복잡한 근거와 구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해당 사회와 그 사회구성원은 다면적이고 심층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후 사회에 대한 전망 없이 기본소득 도입을 주장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한 이러한 전망이 ‘좌파’ 내에서 기본소득을 둘러싼 쟁점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간단히 말해 기본소득이 자본주의를 강화하는 것이냐 아니면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것이냐 같은 식의 논쟁 지형이 있다.
자본주의의 극복과 기본소득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과거 사회주의 운동 내부의 논의와 경험을 참조해야 한다. 유럽 사회주의 (정당) 운동은 주로 마르크스의 입론인 역사유물론과 계급투쟁의 관점 등에 입각하여 19세기~20세기 초에 정렬했다. 그런데 바로 그 시기는 보통선거권의 확대를 통한 민주주의의 진전, 독점자본과 주식회사의 발전, 민족주의의 확대, 제국주의적 팽창 등이 이루어진 시기였고, 이런 정세 속에서 사회주의 운동 내에서는 부르주아 정치 질서에 대한 태도, 권력 쟁취 방식, 대안적인 생산양식의 모습 등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다. 이 논쟁은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을 거치면서 국제 사회주의 운동의 분열을 낳았고, 그 결과 소비에트식 공산주의와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가 각기 다른 방향을 지향하기 시작한다.
소비에트식 공산주의는 사적 소유를 폐지하고 주로 국가 소유에 기초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려 했으며,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시장에 대한 정치적 통제를 통해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완화하는 방식을 택했다. 성장이라는 점에서 눈부신 성과를 거뒀지만 현실에서 여러 문제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결국 체제의 붕괴로 이어진 것은 공산주의였다. 이에 반해 현실에 맞는 수정을 여러 수준에서 거듭한 사회민주주의는 살아남았다. 하지만 꾸준한 개혁을 통해 사회주의에 도달한다는 의미에서의 개혁주의는 사라졌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사회민주주의가 지금의 사회와 다른 세상을 꿈꾼다고 말하기 어려운 지경이 됐다. 더구나 1980년대 이후 ‘대안이 없다는’ 분위기 속에서 훨씬 더 오른쪽으로 돌아서면서 사회민주주의라는 이름 자체가 부끄러울 정도로 바뀌기까지 했다.
경제 모델의 구상과 관련해서 우선 화폐로 지급되는 기본소득은 시장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한다. …… 시장 자체는 사회의 다양성을 도모하고 개인들의 개별성을 발휘할 수 있는 제도이며, 따라서 자본주의가 시장을 장악하지 못하게 하는 게 필요한 일이 된다. 이때 기본소득은 특히 노동력의 탈상품화를 뒷받침함으로써 이런 기능을 하게 될 것
1980년대 초중반에 유럽에서 기본소득 아이디어가 제기될 때 상황이 이러했다. 이런 맥락에서 기본소득은 어떻게 하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면서 공동체를 유지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지금은 선명해졌지만 당시로서는 크게 도드라지지 않았던 생태 위기에 대한 인식을 담고 있었다. 자본주의와 구별되는 의미에서의 시장 속에서 개인의 선택을 가능하게 하고, 시장 외부에서의 개인의 선택 또한 뒷받침하며, 그러면서도 사회구성원의 공동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방향을 기본소득 아이디어로 실현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물론 기본소득 자체가 어떤 경제 모델을 자동으로 낳는 것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기본소득 아이디어를 가장 잘 실현할 수 있는 경제 모델을 구상할 필요가 있다. 경제 모델의 구상과 관련해서 우선 화폐로 지급되는 기본소득은 시장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한다는 점을 말해야겠다.
이는 자본주의와 시장을 구분하는 것이며, 자본주의는 다른 무엇보다 이윤극대화와 경제활동 자체를 우선시하는 체제라고 본다는 것이다. 도리어 시장 자체는 사회의 다양성을 도모하고 개인들의 개별성을 발휘할 수 있는 제도이며, 따라서 자본주의가 시장을 장악하지 못하게 하는 게 필요한 일이 된다. 이때 기본소득은 특히 노동력의 탈상품화를 뒷받침함으로써 이런 기능을 하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 사회적 연대의 의미가 있는 경제활동, 주체들의 참여가 제약되지 않는 경제활동이 필요한데, 이는 협동조합과 사회적 기업 등의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이는 특히 자본주의 경제활동의 주요 특징인 생산자 중심 경제 혹은 그 반대편에서 나타나는 낭비 경제를 넘어서서 사회구성원들이 실질적으로 필요한 것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끝으로 여전히 공적 소유 혹은 국유 부문이 필요할 것이다. 인프라스트럭처 부문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며, 어떤 영역이 그렇게 될지는 민주적 절차와 자체 합리성에 의해 결정될 문제이다.
기본소득은 크게 보아 두 가지 내용을 담는 미래 사회를 지향한다. 하나는 경제를 다시금 사회의 통제 아래 두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개인들이 충분한 자기 시간을 누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사회는 새로운 기술과 조직, 새로운 윤리를 필요로 할 것이다.
글쓴이: 안효상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