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열리는 국제기본소득에 참가하는 세계 여러 도시들을 볼 수 있다. (https://www.basicincomemarch.com)
26일, 전 세계 곳곳에서 그리고 또 서울에서. 미래를 향한 행진, 국제기본소득 행진(Basic Income March).
오는 10월 26일 서울을 포함한 전 세계 여러 도시에서 기본소득 행진(Basic Income March)이 열린다. 현재 이 계획을 주도한 뉴욕을 비롯해서 23개 도시가 행진을 벌인다는 소식이다.
사람들이 부당한 억압에 저항하거나 자신들의 정당한 요구를 내걸고 행진하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1930년 간디가 이끈 소금 행진이 인도 독립으로 가는 데 중요한 디딤돌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1963년 워싱턴 행진이 미국 민권 역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사건이었는지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와 함께 잘 알려져 있다.
이번 기본소득 행진이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기본소득이라는 요구를 내걸고 사실상 최초로 벌어지는 행진이라는 점이다. 게다가 어느 한 나라에서가 아니라 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다는 것은 기본소득이라는 의제가 전 지구적 관심사이자 요구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모두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개별적으로 지급하는 기본소득은 많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낯선 생각이다. 그럼에도 2008년 경제 위기 이후, 특히 최근 몇 년 사이에 기본소득이 주목을 받는 이유는 인류가 몇 가지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리라. 가장 심각한 것은 기후 위기와 파괴적 기술의 진전이다. 기후 위기는 당장 지구 온난화를 막을 수 있는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말 그대로 인류에게 미래가 없다는 묵시록적 경고이다. 파괴적 기술의 발전이 많은 사람들에게 또 다른 암울한 전망으로 다가오는 것은 일자리의 소멸이라는 불길한 조짐 때문이다. 이는 일자리를 통해 경제적 필요뿐만 아니라 사회적 지위도 누려야 한다는 익숙한 생각과 결별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기후 위기와 파괴적 기술의 진전이라는 묵시록적 경고와 조짐은 사회적 불평등의 심화라는 또 다른 문제와 교차하고 있다. 사회적 불평등의 심화는 말 그대로 사회를 해체시킬 뿐만 아니라 이 속에서 미래를 전망할 수 있는 우리의 힘 자체를 약화시킨다.
이런 상황에서 기본소득은 일자리와 무관한 소득을 모두에게 보장함으로써 모두가 존엄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해줄 수 있다. 또한 이전에 있었던 기본소득 실험에서 나타났듯이 기본소득이 보장될 경우 사람들은 공동체의 삶에 더 적극적으로 관여하며, 이는 인류가 직면한 도전을 해결하기 위한 집단 지성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기본소득이라는 의제는 정치 과정에서 한 가지 약점이 있다. 그것은 모두의 의제이기 때문에 누구의 의제도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현대 다원주의 사회의 정치 과정이 다양한 이해 집단의 목소리가 경합하는 장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기본소득을 자신의 이해로 직접 주장하는 사회 집단의 부재는 그동안 기본소득이 정치적 의제로 자리 잡는 것을 방해했다. 2016년의 스위스 국민투표가 의미 있었던 것은 스위스 특유의 직접 민주주의 방식으로 기본소득을 정치적 의제로 부각시켰다는 데 있다.
이후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적절한 정치적 통로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최근 한국에서 모색되고 있는 기본소득 법의 입법이라든가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유럽 시민 이니셔티브는 아래로부터 법률 제정을 강제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또 다른 것은 지방정부 차원의 실험이다. 성남시 청년배당과 경기도의 청년기본소득부터,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여러 지역에서 실험이 실시되었거나 실시되고 있다. 물론 나라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지방정부는 입법과 조세라는 면에서 권한이 제약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시도가 충분한 기본소득 제도의 실현으로 나아갈지는 미지수이다. 하지만 각 나라에서 기본소득이 의제가 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는 분명히 기여하고 있다.
끝으로 총선이나 대선에서 유력한 정당과 후보가 기본소득을 정책으로 채택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현실에서 구현될 수 있는 기본소득 안이 마련되어야 한다.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창립자 가운데 한 사람인 영국의 가이 스탠딩이 노동당에 제출한 ‘공유부 배당으로서의 기본소득’ 정책안이 하나의 예이다.
하지만 현재 세계적으로 기본소득이 부상한 데는 미국 민주당 대선 앤드류 양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거의 무명이었던 앤드류 양은 기본소득에 해당하는 ‘자유 배당’을 내걸고 민주당 내에서 주목받는 후보로 떠올랐고, 이는 다시 기본소득이 더 많은 관심과 지지를 받는 데 기여하고 있다.
앤드류 양의 부상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알려준다. 하나는 현대 대의제 정치 과정에서 적절한 정치가를 발견하고 협력하는 것이 가진 중요성이다. 다른 하나는 기본소득이 독립된 의제로 실현되는 게 아니라 우리 시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정책 패캐지의 하나로 제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기본소득 지지자들은 기본소득 자체를 지지하는 게 아니라 더 민주적이고 평등한 사회를 지지하기에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번 기본소득 행진은 원래 앤드류 양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발상에서 시작되었고, 뉴욕이 중심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는 앞서도 말한 것처럼 중심 인물과 계기가 어떤 의제가 성공적으로 부상하고 자리 잡기 위해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준다. 하지만 짧은 시간 내에 세계 여러 도시에서 함께 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은 기본소득이 오늘날 진지한 의제로 이미 확산되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와 더불어 이 진지한 의제를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당장은 눈에 잘 띄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얼마나 퍼져 있는지도 보여준다. 서울 행진이 급한 대로 준비될 수 있는 것도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를 비롯해서 함께 하는 여러 단체와 개인이 있기 때문이다. ‘이성의 승리는 이성적인 사람들의 승리’라는 말처럼 기본소득의 승리도 그렇게 올 것이고, 이번 기본소득 행진은 그러한 길로 나아가는 첫 걸음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