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e. 2026년 2월 21일 제5기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임원 선거에서, 금민, 백승호, 신지혜, 안효상, 이지은, 한인정 등 6인이 이사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사장은 이사회의 호선에 따라 선출되는 정관(정관 제3장 제12조 2항)에 따라, 2026년 3월 4~5일 제5기 이사회 성원이 참석한 텔레그램 그룹에서 안효상 이사가 제5기 이사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제5기 이사장이 회원 여러분께 드리는 글

2026년 봄,
회원 여러분께,

다시 이사장으로 선출되면서 회원 여러분께 말씀을 드려야 하는데, 주저하다 이제야 말씀을 드립니다. 마음이 꼭 이 시절 같습니다.

최고의 시대이자 최악의 시대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지는 몰라도 대비되는 시절을 살고 있는 것은 분명한 듯합니다. 한편으로는 ‘콜 니드라이(Kol Nidrei)’ ― 유대교의 가장 신성한 날인 속죄일(욤 키푸르) 전야제에 부르는 참회 기도 ― 의 비통함과 간절함을 바라며, 다른 한편으로는 분노의 ‘인티파다(Intifada)’ ― 이스라엘 점령에 대한 팔레스타인인의 봉기나 저항 운동 ― 를 원합니다.

이렇게 마음이 크게 흔들리고, 세계가 출렁거리는 때에 기본소득과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는 좁은 오솔길을 걷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상승과 추락, 밀물과 썰물 그리고 추운 겨울을 녹이려는 뜨거운 몸짓을 지나 기본소득이 다시 걷기 시작했으나, 그 걸음은 조심스럽고 위태롭기 때문입니다. 새삼 비개혁주의적 (혹은 혁명적) 개혁의 현실성과 난점을 동시에 느끼는 시절입니다.

열 개 지역에서 시범 실시되고 있는 농어촌기본소득은 분명 대단한 성취입니다. 비록 기본소득 일반이 그대로 실시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농어촌기본소득은 기본소득의 원리에 따라 구성된 정책이며, 무엇보다 그런 식의 정책이 아니면 우리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태도를 반영합니다. 이런 태도의 변화는 지방선거를 앞두고 많은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기본소득을 주요한 비전으로 내세우는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에너지 전환이라는 슬로건 하에서 추진되는 여러 일도 농어촌기본소득만큼 분명하지는 않지만 기본소득의 정신과 원칙을 담으려는 시도와 함께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기후위기와 생태위기를 넘어서기 위해 전환을 이루어야 하는데, 그 전환이 통곡의 골짜기까지는 아니라 할지라도 많은 사람에게 힘든 여정이라는 것도 분명하고, 따라서 기후 배당 및 이익 공유 같은 방식으로 분배 정의를 실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걷는 길이 ‘기본소득이 있는 복지국가’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건 이 길의 앞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농어촌기본소득 ‘시범’ 실시가 전면 실시로 나아갈 수도 있고, 멈칫할 수도 있고, 후퇴할 수 있습니다. 에너지 전환과 배당 및 이익 공유의 경우에는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를지 모르며, 이것이 앞으로의 갈래길을 좌우할지도 모릅니다.

사실 앞으로 만날 갈래길보다 더 위험한 것은 지금 걷고 있는 길이 좁고 울퉁불퉁하다는 점입니다. 농어촌기본소득의 경우 특정 목표를 가지고 제한된 범위에서 실시되는 것이기에 거주 요건이라든가 사용 지역의 범위 등 기술적 문제가 기본소득의 원칙을 침해할 수도 있습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재원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확대는 고사하고 언제든 후퇴할 수도 있습니다.

에너지 전환은 생태적 전환, 이른바 혁신 성장과 탈성장, 당면한 위기에 대한 대응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서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에 그저 일부 지역에 새로운 소득원을 창출해주는 것으로 축소될 수도 있는 일입니다. 물론 이조차도 송배전 문제와 얽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오솔길을 걷는 우리도 상황이 녹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때는 내적 의지와 욕망으로, 또 어떤 때는 상황의 압력과 강제 속에서 전진하고, 멈추고, 후퇴하고, 또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의심하기도 하고, 지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 있습니다. 바로 지금 여기에 있기에 다행입니다. 많이 지쳐 있기에 안타깝기도 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 ‘리얼 유토피아’를 시도할 수 있는 시절이기에 말입니다.

그럼에도, 그러기에, 조금 더 힘을 내보려고 합니다. 조금 더 힘을 낸다는 게 대단한 일을 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고대 민주적 공화주의의 관점에서 자기 자리를 지키고자 합니다. 그것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가 해 오던 일을 분명하면서도 유연하게 수행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의 대형을 정렬하고 유지해야 합니다. 이를 여러분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일교차가 큰 날씨가 암시하는 듯 봄이 왔으나 여전히 봄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시절입니다. 물론 안타까움보다는 희망이 더 크긴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좁은 오솔길을 조심스럽지만 가슴을 펴고 걸을 수 있습니다. 이 길을 함께 걷는 회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2026년 3월 30일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이사장
안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