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신년사
지는 해를 뒤로 하며,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시간임에도 우리는 여전히 사후(事後) 시간을 살아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우선 우리 모두는 쿠데타 시도 혹은 내란 시도 이후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일이 일부 광인의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니라, 비록 설익긴 했으나, 더 민주적이고 진보적이고 생태적인 변화를 가로막으려는 기성 체제의 반동적 시도라고 할 때 그 ‘청산’이란 건 사법적 결정으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훨씬 더 오랜 시간에 걸쳐, 더 큰 노고 속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긴장과 갈등 속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도, 맥락은 다르지만, 사후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느낌입니다. 한마디로 지난 시간 동안 우리가 쌓아 올린 자산이 우리를 밀고 가고 있지, 우리가 새로운 상황을 조성하기 위해 어떤 것을 하고 있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상황은 끊임없이 변하고, 지형도 움직이고 있지만, 우리는 여기에 맞추어 적절한 역할을 제대로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역량을 충분히 모아내고, 확대하고, 발휘하는 일을 잘 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지나온 길이 지금의 우리를 있게 했고, 앞으로 어렴풋하지만 갈 길을 가리킵니다.
2009년에 만들어진 이후 우리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는, 상황의 변화 속에서 그리고 우리 역량의 발휘를 통해 진화해왔습니다. 그것은 한편으로 연구하고 학습하고 조직하고 교육하고 선전하는 일을 통해 우리를 벼리는 과정이었고, 다른 한편으로 정책을 제안하고, 정치적, 학문적 논쟁을 벌이고, 여러 의미에서 정치적으로 개입하는 시도였습니다.
그 결과 여러분 모두가 아시는 것처럼, 기본소득 운동의 중심 기관이 된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는 진보적이고 해방적인 기본소득의 방향을 정립하고, 사회적, 생태적 전환에서 기본소득 원리가 기능할 수 있는 접점을 발견하고, 온전한 기본소득이 자리 잡을 수 있는 경로를 찾아냈습니다. 또한 전국적으로 기본소득 의제를 가지고 활동하는 사람들과 그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우리의 노력과 정세가 만나는 가운데 현재로 이어지는 상황이 조성되었습니다. 2022년 대통령 선거가 이후, 어떻게 기록되고 기억될지는 아직은 모르지만, 한국 사회에서 기본소득 의제는 분명 의미 있고 현실성을 논의할 수 있는 어떤 것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쿠데타 시도와 탄핵, 조기 대통령 선거를 거쳐 새 정부가 들어섰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뭔가 모호하다는 느낌을, 특히 ‘사회 대개혁’과 관련해서 그런 느낌을 받는 시절입니다. 마치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고,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지만 서부 전선에서 실제로 충돌은 거의 없어서 “가짜 전쟁”이라던 시기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상황에 종지부를 찍고, 우리는 전진할 수 있을까요?
이런 상황은 전반적으로 사회 운동이 약화되면서 만들어졌을 것이고, 또 그 반사작용으로 정당의 과대 대표성과 정치 지도자의 과잉 주도성에도 기인할 것입니다. 민주주의적 정치 과정 속에서 사회 운동이 정치를 추동하지 못하고, 고도 정치 속에서 소실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회 운동의 일부인 우리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도, 그 고유한 궤적과 맥락이 있지만, 이런 상황 속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의 고유한 맥락과 궤적으로 현재의 우리를 살펴보도록 하죠. 우선 기본소득 의제가 가진 두 가지 난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는 매우 포괄적이고 전면적인 변화를 꾀하고, 또 그런 변화에 근거해서만 기본소득이 가능하다고 보지만, 현실에서 기본소득은 하나의 (단일한) 쟁점으로 보입니다. 이런 이유로 경합하는 여러 소득 보장 정책의 하나로 간주되거나 더 큰(?) 쟁점 혹은 더 중요한(?) 쟁점 때문에 뒤로 밀릴 수도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기본소득 지지자들이 오랫동안 고민해 온 문제로) 기본소득의 보편성에서 나오는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모두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지급하는 기본소득은 논리적으로 모두가 지지할 수 있지만, 현실의 대의제 민주주의는 보통 다원주의 혹은 (나쁘지 않은 의미에서) 정체성 정치를 통해 추동되고 구성되고 있습니다. 이럴 경우 기본소득은 모두가 지지할 수도 있지만, 사실상 누구도 첫 번째 요구로 제출하지 않는 상황이 만들어집니다.
이제 현실의 기본소득 의제로 돌아와 보면 분명 한국 사회에서 기본소득은 제법 널리 퍼졌고, (주로 현실 정치적 이유이긴 하지만) 진지하게 수용한 정치인들도 생겨났습니다. 또한 이런저런 방식과 이런저런 의도로 기본소득을 자신들의 주요한 의제와 정책으로 삼는 그룹과 조직들도 등장했습니다. 이 속에서 언제나 그렇듯이 한편으로 (꼭 나쁜 의미에서만은 아닌) 속류화가 일어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의 위상 변화를 요구받게 됩니다. 과거에는 우리밖에 없었고, 어쩔 수 없이 혹은 기꺼이, 우리는 기본소득과 관련하여 모든 일(!?)을 했다면, 기본소득 의제가 널리 퍼지고, 기본소득과 관련한 일들을 하는 다른 사람들과 조직들이 생긴 지금은 좀 더 고유하고 좀 더 명료한 자기 과제를 설정해야 합니다.
이런 과제에 더해 (모든 사회 운동, 아니 모든 사회적 관계가 고민하는 문제라 할 수 있는데) 시대 변화에 맞는 형태와 스타일을 찾아내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운동이 지속될 수 있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불안정하고 격동하는 전환기를 지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2월에 있을 총회에서 우리는 새로운 임기의 임원을 선출하고 사업 계획을 논의하고 정할 것입니다. 당장 앞서 말한 과제들이 성취되고, 또 지금의 모호한 상황이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은 말씀드릴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의 모호함, 때로는 편안함, 밑에 깔려 있는 불안감 등은 상당 기간 지속될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하나하나, 차근차근 함께 해나가자는 것입니다.
다시 떠오르는 해를 보며 누구나 희망을 말합니다. 말 그대로 바람이겠지요. 지금까지 우리가 지나온 길을 생각하면 루쉰의 말이 어울릴 것 같습니다. “희망이란 원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게 곧 길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 갈 길을 생각하면 어떤 성인의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릅니다. 희망에게는 아름다운 두 딸이 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분노와 용기입니다.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분노하고, 지금 그대로의 모습이 아닌 것을 볼 수 있는 용기입니다. 희망이, 온갖 재앙이 쏟아져 나온 상자에 유일하게 남아 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까요?
여러분과 여러분이 함께 하는 모든 분들이 몸과 마음 모두 건강하시기를 빌며 새해 인사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2026년 1월 1일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이사장
안효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