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효상 이사장 인터뷰
인터뷰어: 한인정 뉴스레터 공동편집위원장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는 2022년 한 해를 어떻게 보냈나요? 굵직한 사건을 중심으로 평가를 부탁드립니다.
2021년 8월에 <기본소득이 있는 복지국가> 로드맵을 발표하고, 한동안 ‘대기’ 중으로 보냈다고 할까요. 느슨하다는 말보단, 밀도가 조금 낮았던 시기라 말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일종의 연장전이었죠. 2022년 초, 대선이라는 갈래길을 앞두고 있었으니까요. 당시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기본소득 로드맵 실현은 아니더라도, 기본소득 공론장을 열어보자는 생각이 있었죠. 하지만 대선이 ‘권력, 진영, 과거’만이 난무하는 선거판으로 바뀌면서, 다양한 정책경쟁의 모습이 사라졌어요. 물론 일각에선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가 대선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더 많이 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아쉬움 섞인 평가도 나오지만 또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의 성격을 둘러싼 고민도 나오고 있습니다. 그간 연구·교육단체의 성격이 강했던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가 정치·사회적 활동을 직접 담당하는 것이 맞을지에 관한 고민입니다. 그러다보니 ‘대기’ 상태가 지속되는 것 같아요. 숨고르기의 일환이죠.
대선 당시에 왜 정책경쟁이 사라진 걸까요? 코로나19, 일자리 감소라는 위기의식도 있었잖아요. 재난기본소득 도입도 있었고요.
당시 이재명 여당 후보는 ‘위기에 강한 대통령’이라는 담론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기본소득은 그 대안 중 하나였고요. 그런데 사실 실패했습니다. 일각에선 언론에서 시선을 돌린 탓을 하지만, 저는 아니라고 봐요. 우선 ‘위기’, ‘대안’이라는 말을 쓰기에 앞서, 시민들 사이에 위기의식이 팽배했는지부터 돌아봐야 할 것 같아요. 제가 보기엔 시민들이 크게 동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즉, 어떤 아젠다(위기)에 대해 집중적으로 사고하려면 위기를 위기로 느낄 만한 간절함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던 거죠. 코로나19도 이미 어느 정도 진행 중이었고, 일자리 감소도 하루이틀 이야기가 아니었고. 당시 급격한 반등을 일으킬 만한 사건이 있던 것도 아니고요. 지금 역시 마찬가지예요. 고물가-고금리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 물론 힘들죠. 하지만 그 고통이 이른바 ‘확’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위기라기보다 일상처럼 느껴지는 것 같아요.
방금의 이야기는 기본소득을 위기담론이 아닌 다른 담론으로 끌고 나가자는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그럼 무엇일까요. 그 답이 다음 숨을 열어낼 실마리 같기도 한데요.
지금 필요한 이야기는 기본소득이 약속할 미래를 매력적으로 만들 이야기, 그리고 그런 이야기들의 확산이라고 봐요. 예를 들어 각 지자체 및 단체별로 기본소득정책, 기본소득 실험들이 진행되고 있어요. 근데 이 실험들이 크게 주목받진 못했단 말이에요. 왜요? 지금껏 있어 온 실험들의 결정적인 문제가 소액이라 큰 효과를 보이지 못했다는 데 있어요. 물론 없던 소득이 생기면 그만큼 나아지는 정도야 있겠죠. 하지만 충분성이 부재하면, 질적인 변화를 포착하기 어려워요. 그런 의미에서 기본소득연구소에서 올해 기본소득 실험 몇 곳을 주목하고 있는데요. 그중 하나가 부산 청년기본소득 프로젝트예요. 물론 여러 한계가 있지만, 월 100만원이 물질적인 효과를 가져온 것은 물론이고, 삶의 태도와 같은 정신적인 것들까지 포함해서 다양한 효과를 보여주었어요. 어린이기본소득도 마찬가지로 효과가 상당했습니다. 주 2~3천 원이 성인들에게는 작은 금액일 수 있지만, 어린이들에게는 유의미한 금액이더라고요. 그런 과정과 결과를 상세히 담은 백서작업을 기본소득연구소 차원에서 진행하고 있기도 해요. 시민들에게 기본소득이 있는 미래에 ‘무엇’이 있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 그것이 암울한 미래가 예견된 지금, 전환의 맹아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올해 8월에 서울과 전남에서 개최될 제22차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대회(자세히 보기)는 전 세계적인 기본소득 운동의 중요한 행사예요. 기본소득 운동이 불가피하게 국민국가 단위로 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운동의 과정에서 서로 교류하고, 연결하고, 다시 진전할 수 있도록 기본소득 지지자들이 힘을 합쳐보는 장이죠. 특히 대선 패배 이후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하는 시점에서 다시금 기본소득 의제를 중심으로 한국사회의 시민적 지지와 제도적 역량을 모아내기를 바라고 있죠. 이번 대회는 ‘현실 속의 기본소득’을 주제로 하고 여러 세부주제들을 통해 기본소득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논의들을 이끌어내려 합니다. 많은 분들이 머리를 맞대고 열심히 준비하고 있으니 기대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위기의 대응책. 기본소득. 우리는 어떤 위기 속에 살고 있는 걸까요. 제가 기본소득에 대해 알고, 스스럼없이 지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기본소득이 ‘상호의존성 속 개인의 해방’이라는 프로젝트에 필수적인 요소라고 생각해서입니다. 물론 여기서 개인은 자유주의에서 말하는 오롯한 개인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오롯이 개별화된 개체라면 해방이란 단어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기본소득은 ‘공유’라는 상호의존성 속에 기대어 있으면서도, ‘공유부’의 평등한 분배로 인해 개인으로 설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하는 겁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 기본소득이 일자리 소멸 시대의 대응책 수준이 아니라, 평등과 자유 사이에서 끊임없이 줄타기 하면서 근대의 위기를 막아낼 담대한 기획이라고 봅니다. 자유와 평등의 교차점에 서 있는 기본소득. 저는 이 기획에 매료되었으며, 여전히 매료되어 있습니다. 다만, 그 기획이 누군가에게 더 매력적인 ‘실체’로 다가오는 건 다른 문제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 매력적인 실체를 생생한 삶의 언어로 표현해내는 것이 우리의 과제일 것 같습니다. 회원 여러분들, 혹은 기본소득에 관심을 가진 모든 분들의 일상에서 그 언어를 찾아가려고 합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