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록] 2016년 6월 2일, 라벤토스 초청강연회 “공화주의와 기본소득”
정의로운가 그리고 실현 가능한가를 순서대로 봐야
우선 이야기를 시작 전에 저를 초청해주신 연구소 대안과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에 감사드린다. 오늘 주제인 기본소득은 유럽과 미국에서 굉장한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주제이다. 하루라도 관련 기사가 나오지 않은 일이 없을 정도이다. 열정만큼 합리적 토론도 이뤄지는 중이다. 이 엄청난 열정은 찬반론자 모두 열띠게 토론하는 실정이다.
기본소득은 단순한 의제를 넘어서서 많은 사회적 함의를 가진다. 모든 사회적 제안은 두 가지 장애물을 넘어야 한다. 첫째로는 그 사회적 제안이 정의로운가, 정당한가이고 둘째는 실현 가능한가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두 가지가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순서로 질문되고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기본소득뿐만 아니라 오늘날 모든 문제들이 그런 것인데, 첫 번째 장애물을 넘어섰을 때, 정의롭다는 것이 확신됐을 때야 비로소 실현 가능성을 알아볼 수 있는데,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와 안효상 선생님이 요청한 것처럼 오늘 자리는 첫째 질문에 답하는 강연이고 내일은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하는 강연이 될 것이다.
앞서 말했던 첫째 질문에 답하려면 우리는 정의에 대한 이론을 봐야 하는데,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정의로운 사회란 무엇인가에 답해야 한다. 많은 철학자와 정치학자들이 이에 관해 대답하려고 애써왔는데,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런 많은 철학자들과 정치인들이 정의로운 사회보다 윤리를 더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찌되었건 중요한 것은, 우리는 어떤 내용으로든 도덕에 대한 관념을 가지고 있는데, 윤리라는 건 다양한 도덕 기준 혹은 대안적인 도덕을 구분하는 합리적 기준이다. 물론 종교적 윤리를 제외하고 말이다.
정의로운 사회란 무엇인가: 자유주의
그래서 지금 여기서 간단하게 이런 개념, 관념에 대한 지도를 그리려 한다. 학문적으로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자유주의 이론이다. 물론 자유주의에 딸려 오는 다양한 관념어들이 있다. 자유, 평등, 민주주의가 그런 것이다. 우선 학문적 자유주의 이론으로 정의로운 사회를 얘기할 수 있는 하나의 갈래가 있고, 나머지 하나는 공화주의적인 관점과 관련된 것이다. 우선 제가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은 제가 여기서 말하는 자유주의는 역사적으로 분명히 존재한, 역사적 실체를 가진 자유주의이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자유주의적 정의에 관한 이론에 대해 얘기해보려고 한다.
우선 자유주의부터 시작할 때, 자유주의는 역사적인 기원이 분명히 있는 것이다. 19세기 초에 탄생한 것이다. 그래서 그 이전의 것을 말하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의미가 없다. 어떤 사람들은 존 로크, 엠마뉴엘 칸트, 애덤 스미스, 막시밀리안 로베스피에르 등을 자유주의자로 위치짓곤 하는데 이것은 역사적으로 볼 때는 잘못된 구분이다.
굉장히 자주 있는 일이 이런 철학자, 사상가들을 자유주의자로 설명하는 것인데, 제가 강의하는 경제학부에서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애덤 스미스를 자유주의적 경제학자로 소개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기본소득네트워크와도 관련 있고 인용되고 있는 나의 동료 카사사스는 애덤 스미스에 관한 박사논문을 썼는데 그 주제는 애덤 스미스가 왜 자유주의적 개념을 가질 수 없었던 이유, 왜냐면 역사적으로 시대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논문에서 밝혔다. 그래서 애덤 스미스는 공화주의적인 전통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그는 썼다.
그래서 자유주의 전통은 민주주의의 적이라고 볼 수 있다. 많은 책이나 이론들이 그 반대로 설명하고 있는데, 19세기 문헌들을 찾아보면 많은 자유주의자들이 “나는 자유주의자다. 그리고 나는 반민주주의자다”라고 본인을 설명하고 있다. 20세기에 들어서야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함께 가거나 같이 쓰이는 사례를 볼 수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자유주의 전통은 반민주주의 성향을 많이 가지고 있다. 나는 이 부분을 강조하고 싶다.
자유주의에 기초를 둔 자유주의 정의 이론을 얘기한 사람이 많다. 존 롤스, 기본소득네트워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필립 판 파레이스 등이 그러한데, 이 사람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이들은 왜 자신의 이론에 자유주의, 리버럴이라는 말을 붙이는가? 그 이유는 기본적인 토대를 공유하기 때문인데, 그 토대는 ‘정부는 어떤 것이 더 좋은 삶이냐, 더 나은 삶이냐에 대한 선호를 가질 수 없다’는 인식이다. 즉 정부는 더 낫다를 판단하지 않고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기본 토대를 자유주의 이론들이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의로운 사회란 무엇인가: 공화주의
나는 자유주의자가 아니고, 공화주의자이다. 강연의 제목이 말하듯이. 제 생각에 공화주의는 2300년의 역사를 가진다. 그 사이에 공화주의적 관념을 가진 수많은 사상가들, 정치가들, 활동가들이 사용한 언어는 제각각이고 그 결도 굉장히 다양하지만 기본적으로 공화주의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과두제적 공화주의이고 나머지 하나는 민주주의적 공화주의다.
그럼 간단하게 복잡하지 않은 언어로 공화주의가 얘기하는 공화주의적 자유를 설명할 수 있나?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게는 이렇다. 사람은 본질적 생존이 보장되지 않으면 누구도 자유롭지 않다, 물질적 생존이 보장되어야만 자유로울 수 있다는 명제이다. 이 단순하고 짧은 말은 굉장히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앞서 말한 공화주의의 두 전통을 봤을 때, 이렇게 생각하는 자유의 개념은 둘 다 공유한다. 그러나 이 자유가 ‘누구에게 해당되냐’에서 차이가 난다. 과두제적 공화주의는 이 자유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을 오직 부자들, 재산이 있는 부자들로 한정하고 있고 민주주의적 공화주의는 이 자유의 개념을 모든 사람들, 모든 국민들에게 보편화시키려고, 확장시키려고 한다. 그리고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모든 사람에 여성을 포함한 개념이라는 것이고, 뒤에서 다시 언급할 것인데 역사적으로 여성이 이런 문제에서 항상 주변부에 위치하는 그런 상황에서 공화주의적 자유가 여성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는 더 깊이 생각해볼 만한 주제라고 생각한다.
제가 말한 공화주의적 전통의 좋은 역사적 예시를 들겠다. 공화주의적 민주주의를 잘 보여준 역사적 예시로 아테네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이는 중간중간 단절이 있었으나 170년간 유지되었는데 가난하지만 자유로운 자들의 공화주의였다. 그래서 그 시대 사람인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주의적 공화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과두제적 공화주의자였고, 하지만 공화주의적 역사를 바라보는 기준의 방향성을 잡아줬다는 점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주의적 공화주의는 가난한 자들이 통치하는 것이고, 과두제적 공화주의는 부자들이 통치하는 것이다”고 나눠서 설명한 바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보면 사회이해에 있어 무엇이 중요한가라는 질문이 있다. 핵심적인 질문으로서 사회에서 누가 부자이고 가진 자이며 누가 가난한 자인가라는 질문을 하는데, 이는 맑스 한참 이전에 아리스토텔레스가 던진 계급적 질문이다. 이 질문은 단순하지만 깊이 있는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누가 부자인가’의 답은 생존수단, 소득이 보장된 사람이다. 그 당시에는 그것이 ‘토지’이다. 가난한 자는 홈리스 같은 사람이 아니라 생존수단이 없기 때문에 다른 이에게 의존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여기에서 바로 역사적으로 여성의 지위가 항상 기존의 남성에게 기대야 하는, 생존수단에 대한 역사적 상황 때문에, 당시의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으로는 모든 노예나 노동자들, 여성들은 모두 자유로운 개인이라고 할 수 없었다. 물질적 생존수단이 보장되지 않는 가난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 이후로 수많은 사상가들과 작가들이 비슷한 의견을 각자 다른 방식으로 풀었는데, 맑스의 경우만 해도 공화주의적 전통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프랑스 혁명의 정신을 갖고 있는 맑스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화주의 전통에서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래서 2300년간 내려온 공화주의 사상을 하나로 아우르는 것이 있다면, 19세기 정치적 자유주의가 태동했을 때, 그 자유 개념을 이 공화주의자들이 어떻게 해석했느냐의 문제인데, 아까 얘기한 두 가지 큰 갈래로 나뉘게 된다. 애덤 스미스의 경우 과두제적 공화주의자였기 때문에 부자의 개념을 가진 자에 한해서 얘기했고, 로베스피에르는 자유를 모든 사람들에게 넓히고자 하는 민주주의적 공화주의였다. 로베스피에르는 “국가가 해결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권리, 국민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권리는 물질적 생존을 보장하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그래서 기본소득을 옹호하거나 뒷받침하는 이론 중에서 자유주의적 공화주의의 전통이 매우 유용하다. 물론 당연히 과두제적인 전통이 아니라 민주주의적인 전통 말이다. 21세기 현재 사회에서, 공화주의적인 정신, 모든 사람에게 물질적 생존수단을 보장해줄 수 있는 것이 기본소득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일 얘기하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기본소득의 반대 이유로 빈곤을 퇴치하거나 빈곤을 돕자고 하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집중적으로 지원하거나 돈을 주면 되지 않냐고 말하는데, 실제로는 보편적인 기본소득이 빈곤을 훨씬 더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그래서 이렇게 기본소득을 공화주의적 논리로 뒷받침하는 것이, 현재의 세계 정치경제적 상황에서 빈국이든 부국이든, 선진국 후진국 할 것 없이 훨씬 더 유효한 일이라는 것을 내일 수치로 증명할 것이다.
기본소득은 노동자계급의 자유와 협상력, 여성의 물질적 자유를 가져다준다
이제 또 여러분께 질문의 시간을 드려야 한다. 그전에 두 가지를 예시로 설명할 텐데, 하나는 노동자계급 집단이고, 다른 하나는 여성이라는 집단이다. 물론 두 그룹의 모든 사람들이 다 가난하다거나 하진 않지만 두 사례를 통해 잘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제가 이 두 가지를 얘기하는데, 가장 단순한 그러나 가장 효과적 일화가 있다. 15년전 일이다. 카탈루냐 지역의 라디오방송에 출연했을 때였다. 한 기업가와의 짧은 대화였는데, 방송 중이 아니라 속내를 얘기하는 시간에 그가 한 얘기인데, 이 짧은 대화가 굉장히 많은 것을 시사한다고 생각한다. 그 기업가가 나에게 했던 말은 “기본소득은 재정문제가 아니다. 만일 숫자를 들여다보고 어떻게 어떻게 해본다면 분명히 숫자상으로 기본소득은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기본소득이 노동자계급에게 줄 엄청난 자유와 그들의 협상력을 엄청나게 높여줬을 때의 파급력을 생각했을 때, 우리가 왜 그들에게 기본소득을 줘야 하냐, 그 결과는 생각 안해도 뻔히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많은 국가에서 기본소득에 대한 정치적 반대가 극심한데 이는 꼭 경제문제나 재정조달의 문제가 아니다. 재정적으로 가능하면 기본소득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렇지 않는 것은, 앞서 제가 강조했듯이, 노동자계급의 협상력을 높인다는 사실 때문이고, 현재 많은 직업상황 또는 노동환경을 볼 때 조건이 반(半)노예적이거나 반(半)봉건적인 노동환경을 가진 계약들이 굉장히 많다. 기본소득이 지급된다면 노동자들이 그런 상황을 분명히 거부할 것이고 그것이 가지는 민주주의적 잠재력이 어마어마할 것이다. 현재 노동계약을 할 때 굉장히 약점으로 작용하는 부분이 노동자들에게 사라지는 것이다. 한 예로, 그리스 시리자 정부 재무장관을 지낸 야니스 바루파키스(국제금융기구의 요구를 반대하고 사임한)가 대중운동과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는 인물인데, 그가 한달 전에 공식적으로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입장을 표명했고 이것이 지금 유럽에서 큰 파장을 불러오고 있다. 그도 같은 얘기를 한다. “분명 기본소득은 노동자에게 필요하다. 이것이 매우 많은 개입이 필요한 노동시장의 조건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을 것이다. 그래서 노동자들의 협상력을 증진시킬 것이다” 라고 밝힌 바 있다.
앞서 제가 계속 강조한 노동자의 협상력 문제를 생각할 때, 많은 사상가들이 기본소득 선언에 포함하는 내용이기도 한데, 현재 파업이 지속될수록 노동자들은 월급이 깎여서 위협을 느끼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본소득은 굉장한 무기가 될 수 있다. 기본소득이 가져올 노동자의 협상력 증진은 무궁무진하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기본소득이 여성에게 줄 영향을 연구한 학자가 많은데 그중 한 명이 캐럴 페이트먼이다. 페이트먼의 분석에 따르면 기본소득은 여성에게, 특히 페미니즘에 힘을 실어줄 것이라 전망한다. 기본소득이 가정이 아니라 개인에게 지급되기 때문이다. 많은 여성들에게 기본소득이 지급되었을 때 자유와 가능성은 크다. 많은 경우, 여성은 남편에게 의존하는데, 기본소득이 이를 해결해줄 수 있을 것이다. 기본소득의 지급은 누군가에게 공포스러울 정도의 파급력을 가질 것이다. 많은 여성들이 기본소득을 통해 물질적 자유를 얻을 것이라 전망한다.
이제 마무리로 한마디하자면, 이렇게 많은 사적 권력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사적 권력들이 많은 사람들의 물질적 조건을 파괴하는 상황에서, 기본소득은 단순히 평등의 문제가 아니라 자유의 문제라 볼 수 있다. 인내심을 가지고 통역을 해준 최이슬기 씨와 열심히 들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마치겠다.
다니엘 라벤토스는 기본소득스페인네트워크 대표이자 스페인 바르셀로나대학교 경제학 교수이다. 대표저서는 <기본소득: 자유의 물질적 조건(Basic Income: The Material Conditions of Freedom)>(플루토출판사, 2007년)이다. 국제 정치 비평지 <허가 없이(Sin Permiso)>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