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 당시 민간인 협력자 색출과 학살
작성자
사회민주주의자동맹
작성일
2022-11-24 22:58
조회
1342
여순사건 당시 민간인 협력자 색출과 학살
1948년 10월 19일에 일어난 여순사건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전후하여 제주 4.3 사건과 더불어 무수히 많은 민간인을 도륙한 사건이다. 제주 4.3항쟁 당시 이승만과 미군정이 보낸 진압군에 의해 최소 3만 명에서 6만 명, 많게는 8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무참히 학살당했었다. 제주도 대학살은 과거 일본이 만주 침략 당시 그들이 사용했던 이른바 삼광작전(三光作戰)과 유사했다. 모든 것을 불태우고, 죽이고, 약탈하는 삼광작전은 제주도 해안에서 5km 이상 들어간 중산간지대를 학살지대로 설정해 놓았다. 그 결과 무수히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했으며, 그렇게 수만 명이 미군정과 우익들에 의해 학살당했다. 제주 4.3 사건 당시의 삼광작전은 이후 베트남 전쟁에서도 비극적으로 반복됐다.
제주 4.3 사건이 일어나자, 여수와 순천에서는 좌익성향의 군인들과 민중이 봉기했다. 이것이 바로 여순사건이다. 여순사건이 일어나자 미국과 이승만은 이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병력을 보냈고, 그 과정에서 무차별 민간인 학살이 발생했다. 과거 이승만과 박정희 그리고 전두환 시절 국내 교과서에선 이 사건을 좌익들의 반란이나 폭동으로 묘사했었다. 제주 4.3 사건이야 민간인 학살의 규모가 워낙 심각한 수준이었기에, 점차 제주 4.3 사건 혹은 항쟁으로 명명됐지만, 여순사건은 2000년대까지도 그러한 흐름을 따라가지를 못했다.
여순에 투입된 진압군은 미군 고문단의 지휘를 받으면서 육·해·공군을 동원한 대규모 진압작전을 실행했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무차별 민간인 학살이 발생했으며, 이들의 죽음은 빨갱이 소탕으로 기억됐다. 진압군이 순천과 여수 시내에 들어갈 때, 박격포 사격으로 시가지를 폐허로 만들었으며, 수색과정에서 기관총을 난사하며 잔여 세력의 저항을 제압하는 동시에 시민을 집밖으로 몰아내고 민가를 수색했다. 진압군은 만일 집안에 있을 시 봉기군으로 간주하며 죽이겠다고 협박하며 집 밖으로 내몰았다.
진압군은 봉기군으로 의심되거나 조금의 저항이라도 보이면 민간인이라도 사살했다. 나이 어린 한 학생의 손목을 잡고 냄새를 맡은 진압군인이 화약냄새가 난다며 끌고가서 죽인 사례도 있었다. 진압군의 학살은 초등학교에서 발생했다. 순천에서는 10월 23일 시민들을 북국민학교에 모이게 해서 부역자 심사를 벌였으며, 20~40대 남자들은 옷을 벗기고 팬티만 입은 상태에서 색출했다. 군경은 이 학교에서 최소 22명을 총살했으며, 나머지 5천 명을 심문했다. 이러한 행위를 지켜본 타임-라이프 기자 칼 마이던스(Carl Mydans)는 다음과 같은 글을 ‘타임’지에 기고했다.
“순천농림학교 넓은 교정에 우리는 순천의 전 인구가 나와 있는 것을 보았다. 어린애들을 업은 부인네들이 그들의 남편과 아들이 곤봉과 총대와 쇠투구로 매 맞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24명의 남자가 가까운 소학교로 끌려가는 것을 보았고, 뒤이어 그들을 죽이는 소총의 일제사격 총성을 들었다.”
여수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10월 26일 진압군은 여수에서 초등학교에 모이라고 방송했으며, 죽기 실었던 시민들은 초등학교로 모였다. 진압군은 서국민학교에 본부를 설치했으며 동정 공설운동장, 진남관, 중앙초등학교, 동초등학교, 서초등학교 등 다섯 군데에 시민들을 모았다. 학교 정문에는 중기관총이 설치되어 시민들을 겨누고 있었다. 여수 여자중학교 운동장은 수를 헤이릴 수 없이 많은 시체가 운동장을 뒤덮었을 정도로 학살이 자행됐다. 진압군의 학살 행위는 매우 잔혹했다. 진압군은 봉기 가담자로 판단되는 이들을 학교 건물 뒤편 등에 마련된 즉결처분장에서 개머리판, 참나무 몽둥이, 체인으로 죽이거나 총살했다.
이승만이 ‘백두산 호랑이’로 부르던 김종원은 중앙초등학교 버드나무 밑에서 일본도를 휘두르며 혐의자들을 참수했다. 심지어 김종원은 일본도로 시민들을 참수하는 것을 진심으로 즐겼다. 1937년 중일전쟁 당시 국민당의 수도 난징을 함락한 일본군들은 난징 대학살을 벌였고, 이들 중 일부는 중국인 포로들을 대상으로 참수대회를 벌이기도 했었다. 즉, 김종원은 여순사건에서 그런 극악무도한 짓을 동족을 대상으로 자행했다. 이런 행위를 한 학살자 김종원은 이승만이 신뢰하는 군인 중 한 사람이었다.
이후에도 여순을 장악한 진압군은 이후에도 가담자를 색출하기 위해, 색출작업을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시민들로부터 투서를 받기도 했는데, 이 과정에서도 적잖은 민간인이 빨갱이로 몰려 목숨을 잃었다. 사실 여순사건 당시 진압작전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이른바 초토화 작전이 전개되었으며, 진압군 측에서 발표한 성명서는 “봉기군을 숨겨주는 사람도 사형에 처할 것이며, 반란에 협조하는 어떤 행위도 용서받을 수 없는 죄다.”라고 적혀 있었다. 또한, 앞에서 언급한 일본도로 혐의자의 목을 베는 끔찍한 처형이 수많은 장소에서 공공연히 행해졌다. 김종원의 이러한 행위는 개인적인 일탈이 아니었다. 계획적이었으며, 결과적으로 이승만을 포함한 상부의 명령없이는 불가능한 행위였다.
여순사건 당시 희생된 민간인은 최소 수천 명에서 많게는 1만 명 이상인 것으로 확인된다. 심지어 기록 중에는 반란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500명을 넘지 않는데, 진압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최소 6,000명 이상이라는 기록도 있다. 놀라운 것은 이것이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기록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이후 조사과정에서 좌익의 학살로 알려진 사건들이, 우익에 의한 것으로 밝혀지는 경우도 빈번히 있었다. 결국 여순사건 당시 학살의 절대다수는 우익들에 의해자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민간인 시신은 3,300여구 정도인데, 발견된 시신들은 희생자의 일부일 뿐이다.
여순사건으로 대략 1만 명 정도의 민간인이 무차별 학살당했다. 이 학살의 중심에는 반공 대한민국의 건설이 자리잡고 있다. 즉, 이승만이 얘기한 대한민국에서 생존하려면 먼저 반공주의에 기반한 국민이 되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제주와 여순에서처럼, 죽거나 국가보안법으로 감옥에 갈 수 밖에 없았다. 결과적으로 여순사건은 이승만 정권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적합하지 않은 이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보여준 예시라고 할 수 있다. 그 과정은 무고한 이들의 학살과 피로 보충됐다.
여순사건 당시 현지의 진압작전을 주도한 것은 일제 강점기 당시 만주군 출신들이었다. 백선엽부터해서 김백일, 박기병, 백인엽 등은 여순사건 진압작전의 일등공신이었는데, 이들 모두 만주군 출신들이었다. 이들은 여수와 순천에 사는 시민 전부를 협력자 내지는 공산주의자로 간주하고 작전을 전개했다. 그 결과 진압군의 작전은 무차별 양민학살을 불러왔으며, 미군 고문단은 이러한 학살 작전을 지원했다. 여순사건 당시 진압군의 학살을 피한 이들 중 일부는 계속 투쟁을 이어나갔다. 그들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게릴라전을 전개했고, 가담한 이들 중에는 여순사건 당시 진압군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의 가족들도 있었다. 이들이 바로 빨치산(Partisan)이었다.
참고문헌
김득중, 『빨갱이의 탄생 – 여순사건과 반공 국가의 형성』, 선인, 2009
1948년 10월 19일에 일어난 여순사건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전후하여 제주 4.3 사건과 더불어 무수히 많은 민간인을 도륙한 사건이다. 제주 4.3항쟁 당시 이승만과 미군정이 보낸 진압군에 의해 최소 3만 명에서 6만 명, 많게는 8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무참히 학살당했었다. 제주도 대학살은 과거 일본이 만주 침략 당시 그들이 사용했던 이른바 삼광작전(三光作戰)과 유사했다. 모든 것을 불태우고, 죽이고, 약탈하는 삼광작전은 제주도 해안에서 5km 이상 들어간 중산간지대를 학살지대로 설정해 놓았다. 그 결과 무수히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했으며, 그렇게 수만 명이 미군정과 우익들에 의해 학살당했다. 제주 4.3 사건 당시의 삼광작전은 이후 베트남 전쟁에서도 비극적으로 반복됐다.
제주 4.3 사건이 일어나자, 여수와 순천에서는 좌익성향의 군인들과 민중이 봉기했다. 이것이 바로 여순사건이다. 여순사건이 일어나자 미국과 이승만은 이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병력을 보냈고, 그 과정에서 무차별 민간인 학살이 발생했다. 과거 이승만과 박정희 그리고 전두환 시절 국내 교과서에선 이 사건을 좌익들의 반란이나 폭동으로 묘사했었다. 제주 4.3 사건이야 민간인 학살의 규모가 워낙 심각한 수준이었기에, 점차 제주 4.3 사건 혹은 항쟁으로 명명됐지만, 여순사건은 2000년대까지도 그러한 흐름을 따라가지를 못했다.
여순에 투입된 진압군은 미군 고문단의 지휘를 받으면서 육·해·공군을 동원한 대규모 진압작전을 실행했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무차별 민간인 학살이 발생했으며, 이들의 죽음은 빨갱이 소탕으로 기억됐다. 진압군이 순천과 여수 시내에 들어갈 때, 박격포 사격으로 시가지를 폐허로 만들었으며, 수색과정에서 기관총을 난사하며 잔여 세력의 저항을 제압하는 동시에 시민을 집밖으로 몰아내고 민가를 수색했다. 진압군은 만일 집안에 있을 시 봉기군으로 간주하며 죽이겠다고 협박하며 집 밖으로 내몰았다.
진압군은 봉기군으로 의심되거나 조금의 저항이라도 보이면 민간인이라도 사살했다. 나이 어린 한 학생의 손목을 잡고 냄새를 맡은 진압군인이 화약냄새가 난다며 끌고가서 죽인 사례도 있었다. 진압군의 학살은 초등학교에서 발생했다. 순천에서는 10월 23일 시민들을 북국민학교에 모이게 해서 부역자 심사를 벌였으며, 20~40대 남자들은 옷을 벗기고 팬티만 입은 상태에서 색출했다. 군경은 이 학교에서 최소 22명을 총살했으며, 나머지 5천 명을 심문했다. 이러한 행위를 지켜본 타임-라이프 기자 칼 마이던스(Carl Mydans)는 다음과 같은 글을 ‘타임’지에 기고했다.
“순천농림학교 넓은 교정에 우리는 순천의 전 인구가 나와 있는 것을 보았다. 어린애들을 업은 부인네들이 그들의 남편과 아들이 곤봉과 총대와 쇠투구로 매 맞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24명의 남자가 가까운 소학교로 끌려가는 것을 보았고, 뒤이어 그들을 죽이는 소총의 일제사격 총성을 들었다.”
여수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10월 26일 진압군은 여수에서 초등학교에 모이라고 방송했으며, 죽기 실었던 시민들은 초등학교로 모였다. 진압군은 서국민학교에 본부를 설치했으며 동정 공설운동장, 진남관, 중앙초등학교, 동초등학교, 서초등학교 등 다섯 군데에 시민들을 모았다. 학교 정문에는 중기관총이 설치되어 시민들을 겨누고 있었다. 여수 여자중학교 운동장은 수를 헤이릴 수 없이 많은 시체가 운동장을 뒤덮었을 정도로 학살이 자행됐다. 진압군의 학살 행위는 매우 잔혹했다. 진압군은 봉기 가담자로 판단되는 이들을 학교 건물 뒤편 등에 마련된 즉결처분장에서 개머리판, 참나무 몽둥이, 체인으로 죽이거나 총살했다.
이승만이 ‘백두산 호랑이’로 부르던 김종원은 중앙초등학교 버드나무 밑에서 일본도를 휘두르며 혐의자들을 참수했다. 심지어 김종원은 일본도로 시민들을 참수하는 것을 진심으로 즐겼다. 1937년 중일전쟁 당시 국민당의 수도 난징을 함락한 일본군들은 난징 대학살을 벌였고, 이들 중 일부는 중국인 포로들을 대상으로 참수대회를 벌이기도 했었다. 즉, 김종원은 여순사건에서 그런 극악무도한 짓을 동족을 대상으로 자행했다. 이런 행위를 한 학살자 김종원은 이승만이 신뢰하는 군인 중 한 사람이었다.
이후에도 여순을 장악한 진압군은 이후에도 가담자를 색출하기 위해, 색출작업을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시민들로부터 투서를 받기도 했는데, 이 과정에서도 적잖은 민간인이 빨갱이로 몰려 목숨을 잃었다. 사실 여순사건 당시 진압작전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이른바 초토화 작전이 전개되었으며, 진압군 측에서 발표한 성명서는 “봉기군을 숨겨주는 사람도 사형에 처할 것이며, 반란에 협조하는 어떤 행위도 용서받을 수 없는 죄다.”라고 적혀 있었다. 또한, 앞에서 언급한 일본도로 혐의자의 목을 베는 끔찍한 처형이 수많은 장소에서 공공연히 행해졌다. 김종원의 이러한 행위는 개인적인 일탈이 아니었다. 계획적이었으며, 결과적으로 이승만을 포함한 상부의 명령없이는 불가능한 행위였다.
여순사건 당시 희생된 민간인은 최소 수천 명에서 많게는 1만 명 이상인 것으로 확인된다. 심지어 기록 중에는 반란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500명을 넘지 않는데, 진압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최소 6,000명 이상이라는 기록도 있다. 놀라운 것은 이것이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기록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이후 조사과정에서 좌익의 학살로 알려진 사건들이, 우익에 의한 것으로 밝혀지는 경우도 빈번히 있었다. 결국 여순사건 당시 학살의 절대다수는 우익들에 의해자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민간인 시신은 3,300여구 정도인데, 발견된 시신들은 희생자의 일부일 뿐이다.
여순사건으로 대략 1만 명 정도의 민간인이 무차별 학살당했다. 이 학살의 중심에는 반공 대한민국의 건설이 자리잡고 있다. 즉, 이승만이 얘기한 대한민국에서 생존하려면 먼저 반공주의에 기반한 국민이 되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제주와 여순에서처럼, 죽거나 국가보안법으로 감옥에 갈 수 밖에 없았다. 결과적으로 여순사건은 이승만 정권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적합하지 않은 이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보여준 예시라고 할 수 있다. 그 과정은 무고한 이들의 학살과 피로 보충됐다.
여순사건 당시 현지의 진압작전을 주도한 것은 일제 강점기 당시 만주군 출신들이었다. 백선엽부터해서 김백일, 박기병, 백인엽 등은 여순사건 진압작전의 일등공신이었는데, 이들 모두 만주군 출신들이었다. 이들은 여수와 순천에 사는 시민 전부를 협력자 내지는 공산주의자로 간주하고 작전을 전개했다. 그 결과 진압군의 작전은 무차별 양민학살을 불러왔으며, 미군 고문단은 이러한 학살 작전을 지원했다. 여순사건 당시 진압군의 학살을 피한 이들 중 일부는 계속 투쟁을 이어나갔다. 그들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게릴라전을 전개했고, 가담한 이들 중에는 여순사건 당시 진압군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의 가족들도 있었다. 이들이 바로 빨치산(Partisan)이었다.
참고문헌
김득중, 『빨갱이의 탄생 – 여순사건과 반공 국가의 형성』, 선인, 20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