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2025년 대선 이후, ‘다시 만난 세계’


혁명의 상상이 뿌예지고, 혁명의 기억이 흐릿해지는 것과 함께 혁명의 정의도 흔들린다. 도대체 혁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형태를 가지며, 어떤 세계를 지향하는가?

이런 질문이 앞서는 이유는 12.3 쿠데타에 맞서는 사람들의 저항을 ‘빛의 혁명’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쿠데타 세력이 세상을 잿빛으로 만들고자 하는 마법사라고 할 때 거기에 맞서는 사람들이 빛으로 세상을 구하고자 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아니 ‘우리’가 구하고자 한 세상은 어떤 것인가? 그건 우선 ‘헌정 수호’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쿠데타로 파괴될 뻔한 기성질서이다. 여러 가지 자유권이 보장되고, 제도로서의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작동하며, 그렇기에 개인들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다. 물론 지난 몇 년 사이에 그런 권리가 얼마나 침해되었는가, 그리고 그 제도가 얼마나 잠식되었는가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거기에 더해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은 박제화되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이데올로기와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는 이를 침해하려는 세력에게나 이를 지키려는 사람들에게나 준거점이었다. 쿠데타 세력에게, 그들이 입으로는 ‘자유민주주의’를 떠드는 것과 상관없이, 민주주의는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 해서든 약화시키고 형해화시키며 가능하다면 파괴해야 할 어떤 것이었으며,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지켜야 할 뿐만 아니라 확장해야 할, 그럼으로써 더 나은 삶을 위한 제도이자 힘이었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구하고자 한 세상은 현재이지만 미래이기도 하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미래에서 바라본 현재이다.

쿠데타 이전에 우리는,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지금의 세계를 결여와 퇴행으로 이해했다. 1987년을 거치면서 수립된 형식적, 제도적 민주주의는 제한된 것이고, 이를 삶의 민주주의로 확장해야 한다고 보았으며, 특히 1997년 외환위기를 하나의 분기점으로 하는 신자유주의의 공세 속에서 특히 그렇다고 인식했다. 하지만 분명 한편에서는 확장이 이루어졌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침식에 의한 퇴행이 있었다. 결여는 미래에서 본 현재이며, 퇴행은 과거에서 바라본 현재이다. 그렇기에 둘은 현재를 설명하기는 하지만 같지 않다. 다시 말해 이런 두 현재의 겹침과 엇나감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이다.

한편 쿠데타는 무엇이었는가? 여기서 우리의 관심은 쿠데타의 원인이 아니라 쿠데타가 무엇을 드러냈는가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쿠데타가 드러낸 것은 지금과 같은 통치 방식으로 기득권을 지키기 어렵다는 그들의 인식이다. 물론 우리가 보기에 그런 인식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하지만 점점 더 드러나고 있듯이 이번 쿠데타는 터무니없는 개인 혹은 소수 집단의 망상에 의해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길게 보면 보통사람들(서민 혹은 민중)의 지위와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자신들의 지위, 위신, 권력이 약화된다고 느끼는 지배층(엘리트층?)이 무력을 통원해서라도 이런 흐름을 꺾겠다는 게 이번 쿠데타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흐름이다.

이렇게 본다면 쿠데타는 민주주의의 침식을 넘어서서 아예 여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말 그대로 판을 바꾸려는 기도였고, 단절을 통해 ‘퇴행’을 완성하려는, 비가역적으로 만들려는 시도였다. 사태를 이렇게 보면 ‘빛의 혁명’은 헌정 ‘수호’적이고, 보수적인 어떤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제도로서의 민주주의, 공통의 장으로서의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하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공통의 장으로서의 민주주의를 지킨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지킨다는 것, 각자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지반을 지킨다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도 말했듯이 지금의 민주주의는 형식적으로만 공통의 장이며, 실질적으로는 각자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는 지반이 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가 쿠데타 이전부터 현재를 결여로 이해한 이유이다. 이는 민주주의의 수호가 민주주의의 확장이라는 점을 말한다. 이는 ‘몫 없는 자들’의 몫을 할당할 때 가능하다.

2025년 6월 3일 새로 선출된 대통령은 ‘회복, 성장, 행복으로 국민 통합’을 새 정부의 목표이자 수단으로 내세운다. 적절한 과제이고, 좋은 말이며, 많은 사람들이 대체로 동의할 것이다. ‘내란 극복과 민주주의 회복’, ‘한반도 평화’, ‘신산업 육성’, ‘공정 경제’, ‘지역균형발전’, ‘기후 대응’, ‘노동 존중 및 권리 보장’, ‘의료 개혁’ 등의 표제어를 누가 반대하겠는가? 문제는 이런 목표를 실현할 적절한 수단, 그리고 무엇보다 적절한 과정을 찾아내는 일이다.

일부가 날카롭게 지적하듯이 새 정부가 추진하겠다는 수단들이 목표를 달성하는 데 적절하지 못한 경우도 있고, 또 그 수단들 사이의 모순도 있다. 게다가 ‘민생’이라는 이름으로 경제 회복이 우선시되는 일이라고 하면서 과거의 성장 우선으로 돌아갈 가능성도 크다. 이때 과거의 성장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성장 대 분배’ 같은 식의 프레임으로 사태를 바라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번 선거에서 기본소득 같은 정책이 ‘후퇴’했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일 것이다. 이럴 경우 민주주의는 회복되기는커녕 끊임없는 퇴행과 메워지지 않는 결여 속에서 허우적거릴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점은 지배 엘리트의 쿠데타 시도 및 동조가, 어찌되었든, 일부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른바 ‘극우화’ 현상이 한국에서도 중요한 정치적, 사회적 현상이라는 것이다. 극우파가 다른 무엇보다도 ‘타자’의 구성과 배제에 기초하고 또 이를 목표로 하고 있다면 극우파는 민주주의 내에서, 민주주의를 통해서,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힘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이른바 ‘국민 통합’을 이뤄낼 것인가?

법적 조치 이외에 방책으로 제시되는 게 불평등의 완화 혹은 해소이다. 이는 특히 신자유주의하에서 악화된 불평등과 지위 하락이 극우파 발흥의 연료라고 보는 관점에서 나온 것이다. 거시적으로 볼 때 이는 필요하고 적절한 일이다. 하지만 적절한 과정이 없이 불평등 완화나 해소를 위한 정책을 실시할 경우 극우파는 이를 다시 타자에 대한 공격에 이용할 것이고, 논쟁의 지점은 엉뚱한 곳으로 가버릴 것이다.

정치공동체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기본소득은 모두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는 물질적 기반을 제공하는 것인데, 거기에는 “완전히 새로운 사회적 현실을 형성할” 자유가 포함된다. 그렇다면 이런 정책을 구현하는 과정 자체도 그런 자유의 실현이 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좋은 정책을 실시하겠다가 아니라 어떤 과정을 거쳐 좋은 정책을 실시하고 좋은 사회를 만들겠다는 약속이 더 중요하다.

쿠데타 시도에 맞서 사람들이 헌정질서를 지키고자 했던 것을 ‘빛의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민주주의를 통해서 민주주의를 지키고 확장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는 끊임없는 혁명이고, 참여이며, 새 정부가 진정으로 내란을 종식하고 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것은 이런 혁명 과정을 통해 ‘다른 세계’를 만드는 일이다.

2025년 6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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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 안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