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기본소득론과 복지주의기본소득론의 비교

작성자
retelf
작성일
2016-09-02 08:43
조회
2636
작금의 기본소득운동은 현재 혼돈 속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기존 주류기본소득론은 기본소득의 개념부터 정립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 결과 나침반 없는 항해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이에 기본소득의 전반적인 개념정립을 위해 나름대로 짧막한 글을 남겨봅니다. 기준개념은 ‘자유’입니다. 사실 기본소득론이 정처없는 항해를 지속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이 개념에 대한 이해의 부족 때문입니다.

개념은 이를 직접적으로 정의하거나 설명하는 것보다는 비교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훨씬 이해에 도움이 됩니다. 이에 자유와 복지의 개념을 대비시켜 설명을 시도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자유주의기본소득론과 복지주의기본소득론

자유주의기본소득론은 ‘자유’를 기본소득의 궁극적 목적으로 위상시키는 기본소득론입니다. 반면 복지주의기본소득론은 복지를 기본소득의 궁극적 목적으로 이해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자유와 복지 모두를 함께 목적으로 추구하는 기본소득론을 지칭합니다.

현재 대부분의, 어떤 의미에서는 필자를 제외한 이 세상의 모든 기본소득론이 바로 후자의 복지주의기본소득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명확한 자유의 개념 하에서 기본소득이론을 전개하고 있는 사람을 필자는 단 한명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필자는 학문적으로 상당히 외로운 입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자유주의기본소득론은 자유주의, 복지주의기본소득론은 복지주의라고 약칭하기로 합니다.

2. 자유와 복지

복지주의는 자유의 개념에 취약합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자유란 단지 여가나 휴식 정도입니다. 그리하여 낮잠이나 바캉스 그리고 레크리에이션 같은 것을 자유라고 생각하는 정도입니다. 복지주의가 이러한 자유의 개념만을 생각하는 이유는 그들이 노동을 절대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자유란 언제나 노동과 함께하는 자유만을 떠올릴 수 밖에 없으며 그 결과 자유는 노동에 봉사하는 자유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즉 복지주의에 있어서의 자유란 목적이라기 보다는 수단으로서의 자유일 뿐입니다.

반면 자유주의에서는 노동을 위한 자유가 아니라 노동을 떠나는 자유, 즉 노동해방, 즉 노동부정이 곧 자유입니다. 자유주의에서 자유란 에덴동산의 자유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는 노동이 없습니다. 그곳에서는 하고 싶은 ‘활동’만하며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자유가 그 어떤 다른 것의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 최고목적적인 존재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자유주의 하에서의 자유의 관념입니다. 이에 대해 복지란 그 자유를 떠받들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자유주의는 자유가 목적이고 복지가 그 수단임에 비하여 복지주의에서는 복지가 목적이고 자유는 그 수단입니다.

3. 복지의 후퇴

복지주의 하에서는 복지가 궁극적인 목적이므로 자유를 위한 복지의 후퇴라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복지주의 하에서는 적어도 복지의 수준을 그대로 유지하는 선에서의 자유의 전진만을 인정할 뿐입니다. 이번에 한국에서 열린 기본소득 2016 BIEN 세계총회에서 ‘기존 복지의 후퇴없는 기본소득 추진’을 강령으로 채택한 것을 보면 BIEN은 분명 복지주의기본소득론의 입장에 서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반면 자유주의 하에서 복지는 자유의 수단이므로 복지는 극대자유를 추구하는데 필요한 수준의 복지만을 추구하며 나아가 그 이상의 복지는 자유를 후퇴시키는 것이므로 오히려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자유를 위하여 복지를 후퇴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아주 유연한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결과 자유주의는 복지예산의 기본소득으로의 전용을 비교적 쉽게 인정합니다. 그 이론적 근거는 현재상태에서 자유증가의 한계효용이 복지감소의 한계비효용에 비하여 월등히 높다는 데 있습니다. 즉 월 50만원 지급에 의한 노동해방의 효용은 월 100만원의 복지지출의 효용보다 높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지예산의 기본소득으로의 전용을 통하여 사회적 총효용은 증가하게 됩니다.

4. 증세없는 복지

자유주의 하에서는 기본적으로 증세 없는 복지를 추구합니다. 자유주의 하에서 복지를 팔아서 자유를 사는 것은 남는 장사이므로 그 남는 만큼 예산이 절약되며 따라서 증세없는 복지가 아니라 감세있는 복지까지도 가능하게 됩니다. 보다 정확히 표현한다면 ‘감세있는 자유’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반면 복지주의 하에서는 증세없는 복지는 허구에 해당합니다. 왜냐하면 복지주의 하에서 자유는 복지의 하위 내지 수단가치이므로 복지를 팔아 자유를 사는 것은 손해보는 장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극대복지라는 최상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증세가 불가피하게 됩니다.

5. 기본소득의 지급수준

자유주의기본소득론에서는 기본소득의 지급수준이 자유의 개념에 의하여 비교적 명확하게 정해집니다. 자유주의 하에서는 노동해방이 자유이므로 기본소득의 지급수준은 노동으로부터 완전한 엑소더스를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경비가 얼마인가에 의하여 기본소득의 최소지급수준이 정해집니다. 그리하여 한국의 경우라면 월 50만원 정도의 지급이, 그리고 유럽과 같은 선진국에서는 월 100만원 선이 최소한의 기본소득 지급수준이 될 것입니다.

복지주의 하에서는 자유가 아닌 복지를 기준으로 그 지급수준을 책정하게 됩니다. 하지만 얼마만큼의 복지가 ‘기본소득복지’인지 여부에 관한 기준은 없습니다. 복지의 개념은 막연하기 때문입니다. 스위스에서 월 300만원의 기본소득 국민투표가 행해진 것이나 한국의 주류기본소득론에서 월 30만원의 기본소득을 내걸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기본소득의 지급수준에 관하여 주류기본소득론의 입장은 통일되어 있지 않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주먹구구라 할 수 있습니다.

복지주의 하에서 이러한 혼란이 발생하는 이유는 물론 가치의 전도 때문입니다. 자유와 복지의 위상 전도 때문입니다. 목적을 수단으로 내려놓고 수단을 목적으로 올려놓는 바람에 발생하게 되는 혼란입니다. 만약 그들이 올바른 위상에서 자유와 복지를 바라보게 된다면 기본소득의 지급수준에 관한 혼란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6. 노동이탈

기본소득이 명실상부한 액수로서 지급되는 경우, 즉 한국에서라면 월 50만원 수준으로 지급되는 경우 상당수의 사람들이 노동현장으로부터 이탈하게 될 것임을 자유주의는 솔직하게 인정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노동보다 높은 가치인 자유를 향해 달려갈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복지주의는 노동을 상위가치로 규정하는 입장이며 적어도 노동을 부정할 수 없는 입장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기본소득의 실시로 인하여 어떤 형태로든 노동이탈은 발생하지 않으며 오히려 노동증가현상이 발생한다는 강변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례로서 나미비아의 사례를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나미비아의 사례는 ‘기본소득’이 아닌 보너스 소득 내지 일시적인 지역투자가 행해진 사례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나미비아의 사례는 기본소득의 본질적 요소인 지급의 영구성이 결여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주류기본소득론, 즉 복지주의는 기본소득이 아닌 것을 기본소득의 이름으로 원주민들에게 지급하고 마치 그 결과를 기본소득의 성공사례인 것처럼 나미비아의 사례를 제시하고 있을 뿐입니다.

명실상부한 기본소득이 지급되는 경우, 즉 영구성 기본소득으로 지급되는 경우라면 그 결과로서 상당한 수준의 노동이탈이 발생하게 될 것임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 상식적입니다. 적어도 그 위험을 매우 신중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 올바른 학자의 태도입니다. 자유주의에서는 이 때문에 기본소득의 실시는 극히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복지주의 측에서는 노동이탈에 관하여서 만큼은 별다른 준비없이 실시되어도 좋다는 입장입니다.

7. 기본소득의 지급방식

자유주의에서 기본소득의 목적은 ‘자유의 보장’입니다. 기본소득이 현실적으로 지급되던 다른 형태를 취하던 그 ‘보장’만 되면 된다는 것이 자유주의의 입장입니다. 왜냐하면 기본소득의 목적은 돈이 아니라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복지주의에서는 복지, 즉 돈이 기본소득의 목적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기본소득의 현실적 지급을 중시합니다. 그리하여 빌게이츠도 이건희도 획일적인 액수의 기본소득을 지급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미 이전의 글에서 밝힌 것처럼 기본소득의 지급을 정산형(예를 들면 음의소득세와 같은)방식으로 하는 경우 이를 위한 필요재원 조달액은 획일형의 경우보다 이론적으로 1/4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선진국의 경우라면 그 비율은 더욱 축소되게 됩니다. 이러한 감소폭은 기본소득제도의 채택 여부에까지 영향을 주게 되는 거대한 크기의 감소폭입니다. 이에 자유주의 하에서는 흑묘백묘론에 입각해서 정산형이 되었던 획일지급형이 되었던 자유만 보장된다면 그 어떤 방식을 택해도 좋다는 입장인 반면 복지주의 측에서는 정산지급형에 대한 상당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으며 오직 획일형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획일형 주장은 이미 복지주의 내부에서도 폐기되어가고 있는 것이 현재의 상황입니다. 즉 핀란드나 네덜란드의 기본소득 실험에서도 음의 소득세 방식이 도입되고 있는 것이 이를 시사하고 있습니다.

8. 인공지능과 실업

자유주의에서는 인공지능의 등장과 실업의 확대는 근본적으로는 재앙이 아닌 축복으로 이를 이해합니다. 인류경제의 목적은 에덴동산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복지주의는 에덴동산이 아니라 노동동산이 인류의 궁극적 천국이라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노동없는 천국을 상상하지 못하며 그 결과 천국의 일자리를 잠식하는 인공지능의 등장은 재앙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유주의에서는 실업이란 것을 기본소득의 지급을 통해서 자유로 전환되어야 할 대상으로 바라봅니다. 즉 실업은 잠재적 자유이며 이를 현실화시키는 것이 기본소득이라는 입장을 취합니다. 반면 복지주의에서는 노동과 복지가 함께 손잡고 가야 하는 당위구조상 실업은 결코 자유로 전환되어서는 안되며 오히려 노동으로 다시 되돌아가야 하는 것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이처럼 복지주의 하에서 실업은 절대악이 되는 반면 자유주의 하에서 실업은 잠재선이 됩니다.

9. 노동긍정과 노동부정

이제 진실을 이야기할 때가 되었습니다. 자유주의는 노동부정입니다. 자유주의 하에서 노동은 인민의 의무이자 명예가 아니라 치욕이자 자해행위입니다. 노동은 언젠가는 법으로 금지되어야 할 범죄입니다. 다만 현재로서만 필요악일 뿐입니다. 반면 복지주의는 노동긍정 내지 노동찬양 나아가 노동숭배, 즉 노동종교의 단계에까지 머물러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노동은 영원한 인류의 동반자이며 이로 인하여 흘리는 피땀은 모든 노동자의 명예이며 이로 인하여 얻게 된 질병은 그의 훈장입니다. 이것이 노동교라는 종교이며 이 종교는 이 세상의 그 어떤 다른 종교보다도 강력한 제1종교입니다. 예수도 부처도 알라도 숭배하고 있는 종교가 바로 이 노동교였던 것입니다. 노동교를 믿지 않는 자는 불신자로서 파문을 당하게 되며 길거리 노숙자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 어떤 종교도 그 어떤 성인도 이들을 구원해 주지 못합니다. 만약 도와주려 나선다면 예수, 부처, 알라마저도 노동신에 의하여 파문을 면치 못하게 됩니다.

결국 인간 스스로 이 골리앗 종교에 맞서 싸우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첫번째 전사 다윗이 바로 기본소득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