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서울시의 이른바 ‘조건 없는 청년수당’에 대하여: 기본소득의 시각

“우리가 청년들을 위한 미래를 건설할 수는 없지만, 미래를 위한 청년들을 형성할 수 있다”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말이 오늘날처럼 절실하게 느껴질 때도 없을 것이다. 청년들의 현재와 미래, 무엇보다 그들의 심리 상태는 그 어떤 말로도 변명할 수 없는 스캔들일 뿐이다. 이럴 때 이들을 위해 그리고 우리의 미래를 위해 뭔가를 하겠다는 시도는 찬사를 받을 자격이 있다. 물론 그 찬사에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조언과 비판, 토론이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이번에 KBS를 비롯해 여러 언론을 통해 알려진 것에 따르면, 서울시가 이른바 ‘조건 없는 청년수당’을 실시할 계획이고, 일단 선발된 2,400명을 실험 집단과 통제 집단으로 나누어 2년간 매달 50만 원씩 지급하는 실험을 실시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때 쟁점은, 많은 언론이 다룬 것처럼, ‘청년에게 수당(혹은 기본소득)을 주어야 하는 이유’ 그리고 ‘조건 없이 주는 이유와 그 효과’이다. 물론 재원 문제는 덧붙여진다.

흔히 경제활동 인구에 포함되는 청년에게 어떤 조건도 부과하지 않으면서 현금을 지급하는 정책은 기존의 사회복지 철학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는 주로 필요에 의해 설계되는 기존의 복지 정책과 그 기반 및 지향점이 다르다는 것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기존 복지 정책에서 필요는 주로 질병이나 실업 등 예외상황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생산적 복지’나 ‘사회투자국가’라는 담론에서는 예외적 필요가 아니라 일종의 준비적 필요라고 하는 점에서 복지가 설정되기도 하지만, 고용을 정상상태라고 본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조건 없는 청년수당’을 검토할 때 당연히 나와야 하는 질문은 이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이다. 이는 2016년부터 시행 중인 기존의 서울시 청년수당에 대해서도 나왔던 질문이다. 처음 설계할 때 청년수당은 좀 더 폭넓은 활동을 ‘촉진하는 수당’이었지만 보건복지부와의 협의 과정에서 반대에 부딪혀 사실상 ‘구직 수당’이 되고 말았다. 다시 말해 기존의 청년수당은 청년의 취업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렇다면 ‘조건 없는 청년수당’은 도대체 어떤 목표를 설정할 수 있는가?

서울시의 ‘조건 없는 청년수당’을 설계하고, 실험 실시를 제안하고 있는 LAB2050의 이원재 대표에 따르면 “흔들리지 않는 안정망”을 제공하여, “청년이 자유롭게 혁신, 사회변화, 공헌 등을 선택할 수 있게” 하는 게 이 제도의 기본 정신이라고 한다. 겉보기에 크게 틀린 말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안정망 혹은 안전망을 제공하는 것과 그것이 개개인들에게 어떤 효과로 나타나는가는 다른 문제이다. 게다가 ‘혁신, 사회변화, 공헌 등’을 언급했는데, 어떤 게 혁신이고 무엇이 사회변화이며, 공헌은 어떻게 판별한 것인가도 문제이다. 여기서는 이것 자체도 사회적으로 결정되고 재결정되는 문제라는 정도만 언급해두자.

현대 사회에서 개개인에게 현금을 주는 것은 결국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주는 것이다. 1793년 자코뱅 헌법 이래 현대 국가의 헌법은 생존을 권리로 규정하고 있으며, 당연히 국가는 이런 인간과 시민의 권리를 충족시켜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이런 점에서 현행 대한민국 헌법도 크게 다르지 않다. 현대 복지국가는 이를 고용, 사회보험에 기초한 급여와 서비스, 공공부조라는 방식으로 보장하려고 했고, 나라에 따라 상당한 수준의 보장이 이루어지고 있는 경우도 있다. 이런 점에서 앞서도 말했듯이 청년에게 조건 없이 현금을 주는 것은 낯선 생각이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근거를 찾아야 할 것인가? ‘조건 없는 청년수당’은 ‘청년 기본소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제는 많이 알려져 있듯이 기본소득은 ‘모두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개별적으로, 정기적으로, 현금으로’ 지급하는 소득이다. 기본소득 지지자들은 이런 기본소득을 필요에 따라 주어지는 사회복지가 아니라 인간과 시민의 권리로 본다. 그 이유는 몇 가지에서 찾을 수 있는데, 모든 사람에게 실질적인 의미에서 자유를 보장하는 것, 정치공동체의 모든 시민이 그 구성원으로 적절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 그리고 모두의 것인 공유에 대한 일정한 몫이다.

모두의 것인 공유에 대한 일정한 몫이라는 주장은 오늘날 특히 강조할 필요가 있다. 양팔저울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을 때 우리는 정의가 실현되었다고 말하듯이 모두에게 각자의 정당한 몫을 주는 게 정의이다. 토지와 같은 자연자원이건 오늘날 주목받고 있는 빅데이터 같은 인공적, 사회적 자원이건 그것은 모두에게 주어진 것이거나 함께 형성한 것이다. 따라서 모두가 이에 대한 정당한 몫이 있다. 이러한 공유에서 기본소득 재원을 마련하는 것은 따라서 정의를 실현하는 하나의 길이다.

비록 기존의 청년수당 그리고 지금 이야기되고 있는 ‘조건 없는 청년수당’이 현재 청년이 처한 어려움을 해결하자는 취지에서 나왔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온전한 의미의 기본소득이 되고, 이 속에서 기존 사회 제도를 혁신하는 계기가 되려 한다면, 말 그대로 ‘조건 없는’ 청년수당이 되어야 한다. 이때 조건이 없다는 것은 정책입안자가 임의로 설정한 목표가 없어야 한다는 것도 포함한다. 또한 지금은 ‘청년’ 기본소득으로 시작한다고 하더라도 모두를 위한 기본소득으로 발전할 전망 속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청년 기본소득은 문제의 해결이 되는 게 아니라 또 다른 불화를 낳을 수도 있다.

사실 현대 복지국가는 대공황과 총력전이라는 폭발적인 비참한 사태 속에서 그 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현실, 즉 수많은 자살,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위험한 업무, 미래에 대한 불안, 널리 퍼져 있는 혐오 등은 우리가 또 다른 전쟁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을 들게 한다. 다만 이 전쟁이 저강도 전쟁이라 날카롭게 느끼지 못할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우리 발밑이 허물어지고 있다는 위기감 속에서 새로운 사회 질서를 모색하는 일이다. 기본소득의 일환으로서의 ‘조건 없는 청년수당’이 이러한 변화의 촉매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2019년 2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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